[비트코인 A to Z]


늘어나는 암호화폐 투자 수요와 ‘포용’하기 시작한 규제 당국이 핵심
‘핀테크 원조’ 페이팔이 비트코인을 다루기 시작한 두 가지 이유 [비트코인 A to Z]
[한경비즈니스 칼럼=오태민 지놈체인 대표, ‘비트코인은 강했다’·‘비트코인, 지혜의 족보’ 저자] 암호화폐의 계절이 다시 올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전 세계 3억4000만 명의 사용자를 확보한 페이팔이 비트코인·이더리움·비트코인캐시·라이트코인을 취급한다는 뉴스에 비트코인 가격이 즉각 10% 이상 뛰어오르며 신속하게 반응했다. 뉴스가 과장됐다는 후속 보도가 나오자 상승 속도가 진정됐지만 전반적인 강세는 계속되고 있다.


페이팔은 뉴욕 주 금융 당국(NYDFS)으로부터 일반 고객들에게 암호화폐를 판매할 수 있는 라이선스를 받았다. 하지만 페이팔은 비트코인을 전송하는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는다. 즉 비트코인으로 결제나 지불을 하는 서비스는 아니다. 페이팔 애플리케이션(앱)을 통해 비트코인을 사거나 팔 수 있고 고객의 암호 자산은 페이팔이 보관한다.


분산화에 대한 원리주의적인 기준을 가진 비트코이너들은 또 하나의 중앙화된 암호화폐 거래소일 뿐이라며 확대 해석을 경계하고 있다. 하지만 인터넷 대중화 시기에 설립돼 성공한 테크핀 기업 중 거의 원조에 해당하며 엘론 머스크의 이름을 널리 알린 시작점이기도 한 페이팔의 상징성만으로도 시장은 아직 뉴스의 가치를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볼 정도다.


억만장자 투자자이며 암호화폐 전문 자산 운용사인 갤럭시디지털의 마이크 노보그라츠 최고경영자(CEO)는 페이팔 뉴스가 월가에는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한 발의 총성과 같다며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고객 예치금 규모로 따지면 페이팔은 미국에서 30위 안에 드는 은행이므로 다른 금융 기업들이 ‘우리는 뭐 하고 있지’라고 물을 수밖에 없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트윗을 통해 “모든 은행들이 이제 암호화폐 서비스 경주를 벌일 것이다. 우리는 루비콘강을 건넜다”고 말했다. 민간 우주 개발 업체 버진갤럭틱의 차마스 팔리하피티야 CEO도 트위터를 통해 “페이팔 발표 후 글로벌 은행들이 비트코인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선택 사항’이 아니다”고 말했다.

“전쟁의 시작 알리는 총성 울렸다”

전 세계를 하나의 결제망으로 묶겠다는 페이팔의 기업 정신은 비트코인의 설계 의도와도 겹친다.

페이팔의 설립자 중 한 명인 피터 틸은 페이팔이 이루고자 했지만 못한 것을 비트코인은 해냈다고 일찌감치 비트코인을 극찬했다. 실제로 2014년 페이팔에서 비트코인을 지불 가능한 화폐의 하나로 삼겠다고 발표한 적도 있다. 하지만 페이팔이 언제나 비트코인에 우호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빌 해리스 페이팔 전 CEO는 비트코인이 역사상 가장 거대한 사기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는 구글과 페이스북 같은 빅테크 기업들이 비트코인과 비트코인 공개(ICO) 광고를 차단할 때 페이팔도 비트코인을 취급할 생각이 없다고 밝히기도 했다.


주류 금융 엘리트들이 비트코인을 놓고 오락가락하는 일은 새로울 것이 없다. 하지만 왜 하필 지금이냐는 질문은 던질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특히 지난해 찻잔 속의 태풍에 그쳤던 페이스북 리브라 때와는 무엇이 달라졌는지 살펴봐야 한다.


첫째, 믿을 수 있는 대기업을 통해 암호화폐에 접근하고 싶어 하는 시장 수요를 제도권이 감지했다. 비트코이너들은 자신의 암호화폐를 금융 기업의 손에 맡기는 것은 비트코인에 대한 배신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미국 통화감독청(OCC)이 은행들이 암호화폐 수탁 서비스를 할 수 있다고 명시한 것이 암호화폐 가격을 끌어올린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암호화폐 구입·보관·사용에 대한 접근성은 믿을 수 있는 기업이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대중의 인식은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이다.


3000명의 미국 소비자를 대상으로 한 코너스톤 어드바이저의 최근 서베이에 따르면 페이팔 사용자 중 14%가 암호화폐를 소유했던 경험이 있다. 페이팔을 사용하지 않는 이들 중 암호화폐 보유자는 8%에 그친다. 페이팔 사용자의 15%가 향후 12개월 내에 암호화폐를 살 생각이 있다고 했다. 비록 미국 사용자에 한정된 조사지만 전 세계적으로 페이팔 사용자 3억4000명 중 10%인 3400만 명이 페이팔의 앱을 통해 비트코인을 구입한다면 현재 비트코인 잔액이 있는 지갑보다 더 많은 것이다. 참고로 잔액이 0이 아닌 비트코인 지갑은 3200만 개, 그중 500만 개만 거래를 발생시키는 활성화된 지갑이다.


암호화폐 거래소 출범시킨 싱가포르 최대 은행

둘째, 금융 기업들이 암호화폐 시장을 포용하는 방향으로 규제 당국이 방향을 잡았다. 페이스북 같은 빅테크 기업이 치고 나갈 때는 규제 당국과 사전 합의했을 것이라고 시장은 판단했었다. 하지만 현실은 기대한 것과 달랐다. 미국을 비롯해 각국의 규제 당국이 강하게 반발했고 결국 페이스북은 리브라 프로젝트를 무기한 연기해야 했다. 그러나 이번 페이팔의 선언은 다르다.


일단 비트코인 라이선스 법안을 세계 최초로 만든 뉴욕 주의 금융 당국에서 허가를 받았다. 그리고 규제 당국의 관점에서 볼 때 페이팔의 사업 내용도 평범하다. OCC가 은행들이 할 수 있다고 했던 암호화폐 수탁 서비스에 가깝다.


한편 페이팔이 규제 기관과의 소통에 공을 들이는 것을 알 수 있는 뉴스가 뒤따랐다. 페이팔과 관련 있는 블록체인 분석 회사 TRM랩스가 미국 재무부 산하 금융범죄단속네트워크(FinCEN) 자문역이던 마리 레드보드를 스카우트했다. 이 회사는 지갑들 간의 거래를 추적해 불법 자금의 경로를 찾아낸다. 암호화폐에 뛰어든 주류 기업들은 자금 세탁 방지에 대한 대책을 선도적으로 제시하는데 아예 그 책임자를 감독 기관 출신으로 선택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시파이라고 부르는 암호화폐 중계 기업들은 규제 당국 출신 인재들을 채용하고 있다. 비트코인 관련 범죄를 수사했던 캐서린 혼 검사가 암호화폐 거래소 코인베이스 이사로 영입된 바도 있었다. 규제 당국과 피감업계가 인재 풀을 공유하는 일은 회전문 인사로 비난 받기도 하지만 하나의 신생 업계가 주류화돼 가는 과정에서 피하기 어려운 경로다.


한국은 암호화폐 거래소의 허가권을 사실상 은행에 위임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개별 은행들이 거래소에 실명 계좌를 제공할지 판단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규제에서 생존하려면 거래소들이 은행 출신들을 이사진에 대거 포함시켜야 한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추론하자면 암호화폐 거래소와 같은 유망한 업종을 은행의 신사업 분야로 삼겠다는 것이다. 주류 엘리트들로서는 기득권을 보호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있을 때 논란이 되는 산업을 제도화할 수 있는 법이다.


때마침 싱가포르 최대 은행 DBS뱅크도 암호화폐 거래소를 출범시켰다. 주로 기관투자가들의 암호화폐 거래를 유치할 계획인 이 거래소는 다른 거래소들과 달리 주말에는 열지 않고 주중에도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개장한다.


페이팔 뉴스는 비트코인이 11년 만에 또 하나의 챕터를 맞이하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제 비트코인의 제도화는 논란의 대상이 아니다. 이 신생 산업에서 누가 우위를 점할 것인지 문제가 남아 있을 뿐이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301호(2020.10.31 ~ 2020.11.06)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