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서영의 명품 이야기-루이 비통②]


도둑들의 표적이 된 트렁크 보호하기 위해 만든 텀블러 자물쇠도 명품 명성에 한몫
루이 비통, 모조품 막기 위해 고안한 모노그램이 명품 상징 돼
[한경비즈니스 칼럼=류서영 여주대 패션산업과 교수] 루이 비통이 1892년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조르주 비통이 가업을 이어 받았다, 당시 파리에서는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유명세를 탄 루이 비통의 여행 가방 모조품이 유행했다. 이런 모조품을 막기 위해 고안해 낸 디자인과 패턴들이 루이 비통 명품의 상징이 된 것은 아이로니컬하다.
루이 비통, 모조품 막기 위해 고안한 모노그램이 명품 상징 돼
루이 비통, 모조품 막기 위해 고안한 모노그램이 명품 상징 돼
루이 비통과 아들은 1888년 모조품 방지를 위해 다미에라는 바둑판무늬의 패턴을 개발했다(사진 2). 조르주 비통은 아버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다미에에 이어 1896년 새로운 패턴의 모노그램 캔버스도 탄생시켰다(사진 1 참조). 다미에 캔버스와 모노그램 캔버스는 120년 이상 그 전통을 이어 오면서 다양하게 재창조돼 루이 비통을 상징하고 있다.
루이 비통, 모조품 막기 위해 고안한 모노그램이 명품 상징 돼
루이 비통, 모조품 막기 위해 고안한 모노그램이 명품 상징 돼
루이 비통, 모조품 막기 위해 고안한 모노그램이 명품 상징 돼
꽃무늬 모티브와 루이 비통의 머리글자인 L과 V를 이용한 모노그램 캔버스는 명품 로고의 대명사가 됐다. 모노그램 디자인은 기하학과 식물이 결합된 4가지로 만들어졌다. 겹쳐진 루이 비통의 이니셜인 L과 V, 가장자리 선이 오목하게 들어간 다이아몬드 형태 안에 4개의 잎이 달린 꽃무늬, 색이 완전하게 입혀진 4개의 잎이 달린 꽃무늬, 원 안에 4개의 둥근 잎의 꽃이 담긴 디자인 등이다(사진 1).

모노그램 디자인은 당시 프랑스 전역에서 부흥했던 아르누보 양식과 동양과의 교류를 통해 접할 수 있었던 다양한 꽃문양에서 영감을 받았다.모노그램 캔버스는 당시 명사들과 부인들이 애용하면서 루이 비통의 명품 이미지를 한층 더하게 되는 요인이 됐다. 조르주 비통의 VIP 마케팅이 빛을 발한 것이다. 루이 비통의 트렁크는 당시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조르주 비통은 이렇게 루이 비통을 국제적으로 명성을 알리는 기반을 만든 주역이다. 외국 유학을 통해 글로벌 감각을 익힌 그는 세계적인 명성의 중요성을 일찍이 간파해 1885년 루이 비통 최초의 해외 매장을 런던에 열었다.이후 미국 워싱턴과 뉴욕 등에 잇달아 개점했다. 1914년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여행 용품 전문 매장을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 오픈했다.
루이 비통, 모조품 막기 위해 고안한 모노그램이 명품 상징 돼


1980~1990년대 들어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 맞아

루이 비통과 조르주 비통의 고민은 당시 루이 비통의 여행용 트렁크가 강도들의 표적이 됐다는 점이다. 트렁크 안의 물건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두 부자는 고심 끝에 텀블러 자물쇠를 개발해 특허 출원했다(사진 3). 텀블러 자물쇠는 2개의 회전판 잠금 시스템으로, 열쇠 한 개로 여러 개의 트렁크를 열 수 있다. 독특한 문양의 번호로 돼 있는 텀블러 자물쇠는 루이 비통 디자인의 한 부분이 됐다.


조르주 비통은 자물쇠 개발을 홍보에 활용하기도 했다. 자물쇠의 뛰어난 효과를 알리기 위해 신문 광고를 통해 당시 미국의 유명한 마술사인 해리 후디니에게 특별 제안했다. 루이 비통 케이스에서 자물쇠를 열어 탈출해 보라는 제의는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후디니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 광고는 사람들에게 루이 비통 자물쇠의 효과를 톡톡히 알리는 계기가 됐다. 텀블러 자물쇠는 이후 응용을 거듭하면서 발전했다. 최근엔 잠금장치의 고유 번호와 고객 정보 등을 입력해 고객이 열쇠를 잃어버리면 새로 열쇠를 제공하는 식스 텀블러를 판매하고 있다.


루이 비통이 명품으로 이름을 얻은 원동력으로 장인 정신을 꼽을 수 있다. 무두질 과정에서 어떤 화학 소재도 사용하지 않아 가죽의 질을 유지할 수 있었다. 모든 제작은 장인들의 수작업으로 진행됐다. 루이 비통이 지금도 고객 개개인의 취향을 반영한 특별 주문 제작을 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루이 비통의 아니에르 공방은 160년이 넘도록 고객의 희망 사항과 요구에 맞춘 수많은 특별한 가방들을 제작해 왔다.


그렇다고 시대 변화에 둔감하지 않았다. 변화에 발맞춰 장인 정신을 토대로 하드 사이드 트렁크 분야의 끊임없는 혁신을 입증하고 있다. 루이 비통은 설립자가 다가올 여행 시대의 요구를 예상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새 경계를 허물어 왔다. 이런 파격적인 아이디어들은 아니에르 공방이 전통과 최신 기법 기술을 결합한 장인 정신의 원천이다.


루이 비통은 1980~1990년대에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를 맞는다. 그 중심에 선 인물이 베르나르 아르노다. 그는 1949년 프랑스 북부 소도시 루베의 부유한 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프랑스 최고 명문대인 에콜폴리테크니크를 거쳐 국립행정학교(ENA)를 졸업한 그는 당초 패션 사업과 인연이 없었다.1979년 아버지에게 건설 업체를 물려받아 운영하던 도중 프랑스에서 사회당 소속의 프랑수아 미테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미국으로 떠났다.


그가 명품에 관심을 가지게 된 배경은 미국에서 만난 택시 운전사 때문이었다. 그가 운전사에게 프랑스에 대해 물어보자 프랑스의 명품 브랜드 크리스찬 디오르는 아는데 대통령은 누구인지 몰랐다. 그는 명품의 중요성을 인식하던 차에 프랑스 사회주의 정권이 보수적으로 바뀌자 귀국해 1984년 경영난에 빠진 크리스찬 디오르를 인수했다. 인수한 지 2년 만에 대대적인 구조 조정 등을 통해 회사를 흑자로 바꿨다. 그다음 그는 루이 비통으로 눈을 돌렸다. 1987년 명품 제국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가 탄생하게 된다.
루이 비통, 모조품 막기 위해 고안한 모노그램이 명품 상징 돼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304호(2020.11.23 ~ 2020.11.29)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