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서영의 명품 이야기-샤넬①]

혼수품·아동 의류 취급 용품점이 첫 직장…
‘코코리코’ 노래 불러 인기,‘코코 샤넬’ 애칭 얻어
고아원·기숙학교 거쳐 노래로 ‘코코 샤넬’이 되다 [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고아원·기숙학교 거쳐 노래로 ‘코코 샤넬’이 되다 [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한경비즈니스 칼럼=류서영 여주대 패션산업과 교수] 가브리엘 샤넬은 1883년 8월 19일 프랑스 남서부의 시골 마을인 소뫼르의 기독교 자선병원에서 태어났다. 당시 귀족들은 주치의와 하인의 도움으로 집에서 출산하는 것이 보통인 반면 서민들과 빈민들은 대부분 빈민 구호병원에서 아이를 낳았다. 출생증명서엔 그의 성이 샤넬이 아닌 샤스넬이라고 잘못 기입됐다.

출생증명서를 작성하기 위해 빈민 구호병원의 관리 세 명이 방문했을 때 어머니는 몸져누워 있었고 가난한 장돌뱅이인 아버지는 출산 당일에도, 다음 날에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관리 세 명은 모두 나이가 많고 문맹이었고 아이의 성과 이름은 입으로 전해져 가브리엘 샤스넬로 출생증명서에 오르게 된 것이다. 샤스넬이란 잘못된 이름이 바로 잡혀진 것은 30년 뒤 샤넬이 패션 업계 명성을 얻은 뒤였다.

샤넬의 아버지 알베르 샤넬과 어머니 잔 드볼이 결혼한 것은 이듬해인 1884년 11월 17이었다. 드볼은 결혼 당시 이미 가브리엘 샤넬과 쥘리아 두 딸이 태어났고 아들 알퐁스를 임신한 상태였다. 결혼증명서에 “알베르 샤넬은 쥘리아와 가브리엘을 자녀로 인정한다”라고 돼 있다.

샤넬은 남동생을 네 살부터 1939년까지 충실히 돌봐 줬다. 1889년 샤넬이 여섯 살 때 남동생 뤼쉬앵이 태어났지만 1년이 안 돼 사망했다. 어머니 잔은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허리를 펴기 힘들 정도로 닥치는 대로 일했다. 하지만 어린 샤넬에게 불행이 찾아왔다.

열두 살 되던 1895년 2월 16일 어머니가 숨졌다. 추운 날씨에 감기가 걸렸으나 제대로 치료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머니 사망 후 아버지 알베르 샤넬은 가족들을 돌볼 능력이 되지 못했다.
고아원·기숙학교 거쳐 노래로 ‘코코 샤넬’이 되다 [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어린 시절 어머니 병사·아버지, 딸들 고아원에 맡겨

아버지는 딸들을 수도원인 오바진의 고아원에 맡기고 떠나버렸다. 프랑스에서 가장 큰 수도원인 오바진은 수녀들이 운영했다. 나중에 샤넬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는 나를 밀가루 포대 던지듯 이모들에게 던져버리고 미국으로 가버렸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이모는 수녀를 뜻한다.

샤넬에게 오바진은 어린 시절 가슴에 오롯이 상처를 남긴 기억하기 싫은 장소였다. 이 때문에 샤넬은 고아원이란 말을 입에 담는 것조차 싫어했다. 그는 패션업계에서 큰 명성을 얻은 뒤 “그 이후 고아라는 말만 들어도 소름이 끼쳤다”며 “오늘날까지 눈시울을 적시지 않고 고아원을 지나가 본 적이 없다”고 돌아봤다.

샤넬은 열여덟 살이 되던 해 오바진을 떠나야 했다. 18세 이후에도 오바진에 남아 있으려면 수녀가 되기를 희망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떠나야 하는 게 규정이었다. 샤넬은 다른 친구 대부분이 수녀가 되기로 한 것과 달리 오바진을 떠나기로 했다. 사넬은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야 하는 오바진의 생활을 원하지 않았다. 수녀가 될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수녀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샤넬은 안개가 자욱하게 낀 밤 오바진을 빠져나왔다.

샤넬의 외모는 독특했다. 성년이 안 된 시골 소녀는 고전적인 미와는 거리가 멀고 가슴도, 엉덩이도 밋밋했다. 새까맣고 억센 머리털, 근육이 잘 발달된 얼굴, 화가 나면 넓게 퍼지는 콧구멍…. 샤넬 스스로 “내 머리칼은 굴뚝 청소부처럼 까맣고 피부는 오베르뉴 산들의 용암처럼 거무스름하다”고 한 그대로였다. 그럼에도 우수가 깃든 그의 눈은 독특한 중성적인 매력을 발산했다.

그의 인생에 중요한 전기가 된 이른바 벨 에포크(프랑스에서 정치적인 격동기가 끝나고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전인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좋은 시대’라는 뜻) 시대 파리는 전에 없는 풍요와 평화를 누렸다. 이런 풍요와 평화의 시대에 파리에서 예술과 문화가 덩달아 번창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벨 에포크 시대에 프랑스 사람들은 새로운 기대를 품기 마련이다. 이런 벨 에포크는 샤넬에게 대도시 파리에서 기대를 실현할 기회를 줬다.

파리는 1900년 4월 개막된 세계 박람회로 들떠 있었다. 세상은 급변했다. 독일 여성들은 1903년 여성사에서 한 페이지를 연 두 가지 요구를 담은 청원서를 독일 의회에 제출했다. 여성에게 대학 입학 자격을 부여할 것과 여성을 공무원으로 채용할 것 등이었다. 오바진을 나온 샤넬은 그러나 바로 파리로 가지 못했다. 프랑스 중부 지방 도시 물랭에 있는 노트르담 여자 기숙학교에 입학했다. 샤넬은 교회재단이 만든 기숙학교 생활에 만족했다.
고아원·기숙학교 거쳐 노래로 ‘코코 샤넬’이 되다 [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손님들 특성에 잘 어울리는 색상·디자인 골라줘 인기

기숙학교는 학비가 면제되는 가난한 집의 딸과 학비를 내는 부르주아 집의 딸이 있는 두 반이 있었다. 복장도 달랐다. 가난한 집안의 딸은 푸른빛이 도는 낡은 하얀 치마를, 부르주아 집 딸들은 고급 소재인 캐시미어로 만든 교복을 각각 입었다. 샤넬은 교복을 좋아했다.

고아원과 기숙학교 시절 입은 교복 스타일은 이후 샤넬 디자인에 고스란히 스며들었다. 그의 모토는 ‘레스 이즈 모어(Less is more)’였다. 즉 ‘모자란 것이 많은 것이다’는 뜻이 모토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샤넬이 처음으로 일자리를 얻은 곳은 물랭의 재봉 용품점이다. 노트르담 수녀들이 주선한 일자리다. 생트 마리라는 이름의 이 용품점은 혼수품과 아동 의류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곳으로 지역 상류 사회에서 꽤 인기가 있었다. 생트 마리는 샤넬이 그의 패션 인생에서 첫 실력을 발휘한 곳이기도 하다. 손님들 개개인의 특성에 잘 어울리는 색상과 디자인을 골라줘 인기를 얻었다. 그는 상류 사회 숙녀들의 패션 상담사 역할도 했다.

사넬은 젊은 장교들이 많이 찾는 ‘로통드’라는 카페에서 노래도 하면서 생계를 이어 갔다. 물랭엔 프랑스 기병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샤넬이 부른 첫 노래는 ‘코코리코’다. ‘꼬꼬댁 꼬꼬’를 뜻하는 프랑스의 의성어인 동시에 ‘갈리아 수탉들’이란 의미로 애국자의 외침을 상징한다.

그의 목소리는 가늘었지만 풍부한 표현력으로 독특한 매력을 지녀 군인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군인들은 코코 샤넬을 연호하며 앙코르를 외쳤다. ‘코코 샤넬’이 애칭으로 불린 계기는 1905년 이 노래 때문이었다.

※‘코코샤넬(카타리나 칠코프스키 저, 솔 출판사)’ 등 참조
고아원·기숙학교 거쳐 노래로 ‘코코 샤넬’이 되다 [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312호(2021.01.18 ~ 2021.01.24)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