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E - This March 23, 2010, file photo shows the Google logo at the Google headquarters in Brussels. Google said Tuesday, April 2, 2019, it will require staffing companies it works with to pay workers at least $15 an hour and give them health benefits. (AP Photo/Virginia Mayo, File)
[한경비즈니스 칼럼=박찬희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 촘촘하게 짜인 철 지난 전략계획은 회사의 발을 묶어 버리고 일하는 사람들만 피곤하게 만들 때가 많다.
경영전략의 새로운 흐름으로 불리는 ‘애자일(agile) 경영’은 이런 꽉 막힌 경영을 탈피해 업무의 현장에서 직접 경영 방향을 찾고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을 추구한다.
기업에 ‘메가트렌드 분석’, ‘장기 목표 설정’과 같은 무리한 전사적 수준의 계획을 입히기보다 실제 당면한 사업들을 중심으로 가능한 범위의 목표와 계획을 세우고 수정해 나간다는 것이 애자일 경영의 골자다.
다만 애자일 경영이 전에 없던 새로운 경영 방식이라고는 볼 수 없다. 기업의 가치는 원래 여러 개의 사업들이 갖고 있는 고유의 가치와 이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시너지의 합이다. 예컨대 영화·건설·유전 개발 같은 산업 분야만 보더라도 이미 큰 틀에서 애자일 경영을 실천해 왔다. 프로젝트 단위로 직면한 현안을 해결하면서 사업을 진행 중이다.
자동차 회사와 같이 대규모 생산 시스템을 구축한 제조업도 마찬가지다. 장·단기 계획에 맞춰 신차 개발이나 공장 신축과 같은 일들은 프로젝트 단위로 운영해 자율성과 탄력성을 확보한다.
다만 조금 더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애자일 경영은 크고 복잡한 조직의 관료제적 구조에서 이뤄지는 계획·통제의 과정과 달리 ‘사업 현장에 밀착한 대안’을 추구하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물론 경영학의 이론이 늘 그렇듯이 까칠하게 살펴봐야 할 거품 가득한 환상도 숨어 있지만 말이다.
◆혁신 기업의 경영 방식으로 주목
애자일 경영을 주장하는 전문가들은 직접 일하는 과정에서 마주치는 문제점이나 처음의 생각과 달랐던 변화에 대해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강조한다. 이를 통해 계획 자체가 수정되고 사업 모델이 진화해 간다. 해당 사업을 잘 아는 사람들로 구성된 프로젝트 단위의 팀에 이런 ‘수정과 진화’의 권한이 부여된다.
대규모 생산 시스템은 속성상 탄력적 변화가 어렵다. 한 번 투자하면 십여 년 넘게 버텨야 하는 고정 설비를 중심으로 안정된 시스템을 만들어 운영되기 때문이다. 총괄 생산계획과 자원 조달 프로그램을 짜고 예측과 다른 변동은 여유 재고를 두거나 운영 시간을 조정해 해결한다.
이에 반해 정보기술(IT)업계, 특히 소프트웨어 분야에서는 전문화된 팀을 중심으로 한 유연한 개발 방식이 가능했는데 이것이 애자일 경영 방식의 시작이다.
수백만 줄에 달하는 대형 프로그램과 달리 1990년대 이후의 컴퓨터 소프트웨어는 특정 작업(task)을 목표로 한 작은 프로그램 모듈을 짜 이들을 연결하는 방식으로 진화했다.
따라서 소프트웨어의 개발 과정이나 사용 환경에 맞춘 수정·진화의 과정 역시 해당 작업 모듈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본격적 공개 이전에 베타 테스트를 통해 필요한 수정을 하고 다시 실제로 구동되는 과정에서의 피드백을 반영한다.
일반 사용자들이 쓰는 컴퓨터도 사실은 다양한 사업자들이 개발한 애플리케이션(앱) 프로그램들을 운영체제(OS)에 맞물려 구현하고 이를 수시로 업데이트하고 있다.
여러 부문들 사이에 장벽을 쌓아 놓고 ‘가져오면 검토해 보내주겠다’는 방식, 혹은 잘 알지도 못하는 일을 맡겨 놓고 이런저런 트집을 잡다가 ‘목표와 숫자가 다르다’면서 권세를 떠는 방식은 이런 현장 중심의 수정과 진화에서는 낄 자리가 별로 없다. 경영자나 ‘전사적 스태프’는 다양한 사업들 사이의 혼선을 줄이고 시너지를 만드는 데 집중한다.
이를테면 구글은 10명 미만으로 구성된 팀들이 4000개 이상의 과제를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 완료된 과제에 대해서도 매달 50% 이상의 코드가 수정된다고 한다.
프로그램 자체를 ‘코드 리뷰’가 원활하도록 설계하고 그 내용도 공유한다. 본사 부문은 이런 과제들을 지원하고 통합하는 역할에 집중한다. 해당 팀들에 대한 감독과 평가는 수행하지만 세워 놓은 계획을 고집하면서 ‘실적 대비 성과’를 요구하는 전형적인 중간 관리 업무는 설 자리가 매우 좁다.
온라인 미디어 콘텐츠 서비스 업체 넷플릭스도 비슷하다. 연간 계획을 고집하지 않고 사업별로 수시로 방향을 수정하고 목표를 재설정해 그 결과에 책임진다. 콘텐츠의 기획·제작·배급·수익 확보의 과정이 1년 단위로 돌아가지 않고 철저히 프로젝트별로 진행되는 상황에서 경영진이나 스태프가 연간 계획과 통제를 하면 무리가 발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만들어 놓은 계획에 얽매이면 그나마 애써 포착한 기회도 놓친다. 잘 알지도 못하는 미래를 멋대로 예측해 짜 맞춘 계획을 우겨대고 그것도 모자라 연간 계획과 분기 계획으로 촘촘하게 나눠 들이대면 그야말로 신발에 발을 맞추는 꼴이다.
세상일들이 지구의 공전주기에 맞춰 12개월 단위로 이뤄지지 않는데 ‘회계연도’에 맞추느라 억지로 숫자를 짜 맞추는 황당한 일이 벌어지는 셈이다. 어설프게 공부한 경영학과 관행에 찌든 경영 기법이 경영의 현실을 망가뜨리는 셈이다.
◆애자일 경영 구축 위한 조건은?
물론 애자일 경영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우선은 직원들의 생각부터 남달라야 한다.
기업의 경영은 전쟁과도 같다. 전투 현장은 불확실성으로 가득하다.
아군이나 적이나 무수한 잘못을 저지르고 그 결과가 상황을 새롭게 만들어 전혀 다른 국면이 전개된다. 세상에 비밀이 없으니 정교하게 짜 맞춰 놓은 전략도 조금씩 새나가기 마련이고 유능한 적장은 아군의 전략을 읽고 역으로 이용한다.
유능한 적장은 기상의 변화, 적과 아군의 형세에 맞춰 전략을 변형시켜 적의 혼을 빼놓는다. 이런 일이 뜻밖에 일어나는 ‘출기불의(出其不意)’의 기동을 위해서는 지휘관이 전투 현장의 생생한 정보를 빠르게 파악하고 구성원들은 작전의 목표와 내용을 이해해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이 필요하다.
‘손자병법’에서는 이를 다양하게 펼쳐지는 상황을 활용하는 ‘구변(九變)의 이득’으로 설명하고 있다. 원래 전략계획은 짜는 실력보다 상황에 맞게 바꿔 가는 실력이 더 중요하다는 얘기다. 시시각각 벌어지는 새로운 상황에 맞춰 전략을 수정하고 진화시키려면 더 많은 능력이 필요하다.
직접 일하는 실무자가 변화의 요구를 읽고 답을 찾는 전략과 실무의 능력을 동시에 갖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과거의 성과에 연연하지 않고 ‘수정 요구’를 인정하려면 개인의 정직함과 조직의 열린 마인드가 같이 있어야 한다.
최고경영자(CEO)가 일을 맡기고 지원하려면 제대로 해낼 사람을 알아볼 능력이 있어야 하고 ‘수정과 진화’가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는지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문제의 원인을 그대로 두고 계속 껍데기만 바꾸며 덮고 있는지도 살필 수 있어야 한다.
되는 일이라고 판단되면 참고 기다리는 배짱도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력이 없을수록 불안해서 헛손질이 잦아지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 이를 구현하기는 매우 어렵다.
애자일 경영의 주장들이 지극히 맞는 얘기지만 ‘획기적 패러다임’으로 보기 어렵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이유는 무엇일까. 학문의 세계는 남들이 얘기하지 않던 새로운 이론이면 더 좋아하는 성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애자일 경영도 이런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
애자일 경영의 대표적 전도사인 이브 도즈 인시아드 명예교수가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얘기했지만 폭풍우 치는 바다를 항해하면서 처음 결정했던 항로만 고집하다가는 난파당하기 딱 좋다.
바람과 파도를 읽으면서 수시로 키를 바꿔 잡으려면 변화를 읽는 전략적 감수성이 필요하다. 또한 구성원이 몰입을 이끌어 내는 능력도 필수다. 수시로 자원을 재배치할 수 있는 유동성도 필요하다. 경영학 분야에서 늘 강조하던 그리 특별하지 않은 말들이다.
◆애자일 경영이 ‘능사’는 아니야
일정한 활동 기간을 설정해 조직 전반의 힘을 모으는 프로젝트 조직은 오래전부터 애자일 경영의 개념이 구현된 것이다.
특정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제품·기능·지역 등의 차원으로 구축된 기존의 조직들을 동원하므로 다차원 ‘매트릭스(matrix) 조직’이 되고 일정한 목적을 수행하면 해산하는 ‘임시적(ad-hoc) 조직’의 성격을 갖는다. 무역·건설 등은 사업 모델 자체가 이미 수천 년 전부터 프로젝트 단위로 완결돼 왔다.
최근 국내 금융사에서 애자일 경영의 사례로 제시되고 있는 핀테크·블록체인 분야의 대응 팀이나 신사업 기획팀 역시 임시적 성격의 프로젝트 팀이다.
특별히 새롭지 않다고 의미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애자일’이란 참신한 단어를 통해 변화를 담아가며 수정·진화되는 전략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어떤 능력과 준비가 필요한지 보여준 만큼 나름의 가치가 있다.
본격적인 사업화에 앞서 시험 평가와 시운전을 거치는 과정도 ‘베타 테스트’라고 부르면 훨씬 혁신적으로 보이듯이 말이다. 틀이 잡힌 대기업을 절차에 따라 운영하는데 그치는 ‘○○관리’로 이름 붙인 아둔한 경영학과 달리 유리한 판을 이끌어 내고 상대를 제압하는 ‘병법의 지혜’를 조금이나마 도입했다는 점에서도 공헌이 있다.
하지만 애자일 경영이란 테마가 각광받는다고 해서 모든 회사가 프로젝트 조직으로 개편할 필요는 없다. 사업을 수시로 수정하고 진화시킨다고 전사적 전략을 쓸데없는 짓이라고 매도할 수도 없다.
대규모 생산 설비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자동차나 석유화학도 임시적 프로젝트 조직을 운영해 왔듯이 무역이나 건설과 같이 원래 프로젝트별로 사업이 진행되는 것이라도 전사적 차원의 조정 통제와 시너지 창출을 위해선 다양한 작업들이 필요하다. 사람들과 사업들을 연결하며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플랫폼 경제의 시대에는 더욱 중요하다.
디즈니는 이미 1950년대에 애니메이션·영화·테마파크·방송 등을 망라하는 현재의 사업구조를 매우 구체적 수준까지 마련했다. 케이블·위성의 출현, 인터넷과 모바일의 보급 등 달라지는 세상에 맞게 꾸준히 수정해 왔다.
하지만 엔터테인먼트와 연관 사업들을 엮어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방향성은 뚜렷하게 유지했다. 애자일 경영이 달라진 세상에 맞춰 수정과 진화를 거듭하려면 ‘통합과 연결’을 위한 중심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애자일 경영의 핵심은 사업을 억지로 장기 전략계획이나 연간 계획과 같은 경직된 틀에 가두지 말고 사업 자체의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서 풀어가라는 것이다. 애자일 경영을 내세워 무작정 중간 관리자를 몰아낸다고 새로운 사업들이 샘솟듯 생기고 꼬인 문제들이 풀리지는 않는다.
기업의 속사정을 이해하고 필요한 수정과 진화를 실행할 사람들이 씨가 마를 뿐이다. 경영자와 구성원이 무능하면 그 어떤 경영 이론이나 기법도 독이 될 뿐이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21호(2019.04.22 ~ 2019.04.28)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