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춘의 국제경제 심층 분석]
-위기 타개책으로 거론되는 화폐개혁…섣불리 추진하다 ‘부작용’만 키운다

[한경비즈니스= 한상춘 한국경제신문 객원논설위원 겸 한국경제TV 해설위원] 최근 다시 ‘금을 사라’는 권유가 부쩍 많이 들린다. 세계 경기 둔화 우려, 세계 증시 조정, 투자자의 안전 자산 선호 등 나름대로 근거는 있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화폐개혁을 단행해 금 본위제를 부활할 것이라는 그럴듯한 이유가 눈에 확 들어온다. 금 본위제는 금과 달러화 교환 비율을 고정하는 국제결제 시스템을 말한다.

작년 11월 치러졌던 중간선거에서 불리해진 트럼프 대통령이 1년 앞으로 다가온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극적인 돌파구가 필요한 상황이다. 최후 버팀목이 될 것으로 여겨졌던 미국 경기가 ‘2020 대선’ 출발 직전인 올해 4분기에는 성장률이 1%대까지 떨어질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미국 증시도 불안하다.

◆ ‘금 본위제 부활’ 사실상 불가능

워싱턴 정가를 중심으로 ‘세 가지 빅딜 설’이 거론된다. 중국 마찰과 관련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금리 인상 속도 조절과 관련해 제롬 파월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 미국 국민의 생존권 보장과 관련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대타협을 모색할 것이라는 전략이다. 모두 타협이 쉽지 않고 타협되더라도 미국 국민의 표심을 끌어올릴 만한 변수는 안 된다.

‘협상의 달인’이자 ‘오뚝이 인생’이란 닉네임이 붙은 트럼프 대통령이 화폐개혁의 일환으로 금 본위제 부활을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는 카드다. 그의 저서 ‘협상의 기술(The Art of Deal)’을 읽어보면 위기에 처할 때마다 극복 카드로 썼던 충격요법(shock therapy)이 기술돼 있다. 한마디로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면 뭐든지 다 동원한다.
미국 ‘화폐개혁’·한국 ‘리디노미네이션’…왜 동시에 거론되나?

금 본위제 부활은 트럼프 대통령이 속한 공화당이 궁지에 몰릴 때마다 위기 타개책으로 제시돼 왔던 단골 메뉴다. 2차 오일쇼크 직후인 1980년대 초 미국 경제가 경기 침체하에 물가가 올라가는 종전에 볼 수 없었던 스태그플레이션 국면에 빠지자 로널드 레이건 정부는 특별위원회까지 설치해 금 본위제 도입을 검토했다.

자신의 금리 인상 속도 조절론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는 Fed와 파월 의장을 길들이기 위해서도 쓸 수 있는 카드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미트 롬니를 비롯한 대부분 공화당 후보는 버락 오바마 민주당 정부에 편향돼 있는 Fed의 통화정책과 벤 버냉키 Fed 전 의장을 견제하기 위해 금 본위제 부활을 공론화한 적이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금 본위제를 부활시키려면 가장 큰 전제 조건인 충분한 금을 확보해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지해 왔던 금 본위제가 1971년 리처드 닉슨 미국 전 대통령이 금 태환 정지를 선언했던 것은 세계 교역량에 맞춰 늘어나는 달러화 가치를 금으로 맞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47년이 지난 현시점에서 금 본위제 부활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한동안 잠잠했던 ‘리디노미네이션’ 논의가 한국에서도 거론되고 있다. 현 정부 출범 초 비트코인 투기 광풍을 잡기 위해 논의된 이후로 두 번째다. 종전과 다른 것은 세계 경기 10년 호항 종료, Fed의 출구전략 추진 중단, 노딜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우려 등 대전환기에 논의되고 있는 점이다.

리디노미네이션은 화폐가치에 변동을 주지 않으면서 거래 단위를 낮추는 것을 의미한다. 달러당 네 자릿수대의 원화 환율을 두 자릿수대로 변경하거나 한 그릇에 7000원 하는 설렁탕 가격을 7.0으로 표기하는 것이다. 2005년 이후 신흥국을 중심으로 마치 유행처럼 추진했던 리디노미네이션은 대부분이 이에 해당한다.

특정국에서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하면 거래 편의 제고, 회계 기장 처리 간소화, 인플레이션 기대 심리 차단, 대외 위상 제고, 부패와 위조지폐 방지, 지하경제 양성화 등의 장점이 있다. 하지만 화폐 단위 변경에 따른 불안, 부동산 투기 심화, 화폐 주조비용 증가, 각종 교환비용 등 단점도 만만치 않다.

◆ 리디노미네이션, ‘정세 안정기’에 추진해야

어수선할 때마다 리디노미네이션 논의가 재현되는 것은 한국 경제 위상에 맞지 않는 원화 거래 단위로 충격을 더 받는다는 이유에서다. 하드웨어 면에서 한국은 선진국으로 분류된다. 무역액·시가총액·외화보유액은 모두 세계 8위, 소득(GDP)은 12위다. 30K-50M(1인당 소득 3만 달러, 인구 5000만 명) 클럽에도 세계에서 일곱째로 가입했다.

하지만 부정부패와 지하경제 규모 등으로 평가되는 소프트웨어 면에서는 신흥국으로 분류된다. 독일의 국제투명성기구(TI)가 발표한 지난해 한국의 부패인식지수(CPI)를 보면 조사 대상 180개국 중 45위로 현 정부 들어 개선됐긴 했지만 하드웨어 위상에 비해 여전히 부패가 심한 국가로 평가됐다.


한국과 같이 선진국과 신흥국에 중간자 위치에 있는 국가는 대전환기에 쏠림 현상이 심하게 나타난다. 좋을 때는 선진국 대우를 받아 외국 자금이 대거 유입되다가 나쁠 때는 신흥국으로 전락해 외국 자금이 한꺼번에 빠져 나가면서 어려움이 닥친다. ‘경기 순응성’과 ‘금융 변수 변동성’이 심해진다는 의미다.

리디노미네이션 논의가 재현되는 것도 외형상 선진국 지위에 맞게 부패를 척결하고 화폐 거래 단위를 변경해 쏠림 현상을 줄이자는 목적에서다. 비슷한 목적으로 2000년 이후 각국은 신권을 발행했다.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선진국은 신권을 발행해 구권을 교환하되 리디노미네이션을 병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흥국은 리디노미네이션을 결부해 신권을 발행했다. 그 후 이들 국가는 부패와 위조지폐 방지, 대외 위상 제고 등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고사하고 물가가 앙등하고 부동산 투기가 거세게 불면서 경제가 더 불안해졌다. 터키·모잠비크·짐바브웨·베네수엘라가 그랬고 2009년 단행했던 북한도 실패했다.

법화(法貨) 시대에 신권을 발행하는 것만큼 국민의 관심이 높은 것은 없다. 일종의 화폐개혁에 해당하는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하면 권력층과 부자일수록 더 그렇다. 이 때문에 경제가 안정되고 국민의 공감대가 형성돼야 신권 발행과 리디노미네이션 단행의 목적을 거둘 수 있다.

선진국은 이 전제 조건의 성숙 여부를 중시했지만 신흥국은 부정부패가 심할 때나 니콜라스 마두라 베네수엘라 대통령처럼 장기 집권을 위해 그것도 급진적인 리디노미네이션까지 병행해 단행했다. 전제 조건 충족 여부보다 상황 논리에 밀리거나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추진됐다는 의미다. 이것이 결과의 차이다.

한국도 리디노미네이션 논의가 잊을 만하면 나오는 것은 경제 규모가 커졌지만 1962년 화폐개혁 이후 액면 단위는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기업 회계에서 경(京)원까지 심심치 않게 나온다. 원화 거래 단위도 달러화의 1000분의 1로 국제 위상과 맞지 않다. 리디노미네이션의 필요성은 충분히 일리가 있다.

하지만 최근처럼 어수선한 상황에서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하거나 논의하는 것은 상당한 부작용이 예상된다. 국내 정세가 안정되고 국민의 공감대가 형성될 때 추진돼야 한다는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의 주장은 바람직하다. 때만 되면 이 문제를 들고나오는 일부 국회의원의 전문적인 식견과 국민을 생각하는 성숙된 자세가 필요한 때다.

schan@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19호(2019.04.08 ~ 2019.04.14)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