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합·창의 막는 경직된 지배 구조 공통점, 정치 의존증 벗어나야

‘몸살 앓는 아시아’…낡은 시스템 걷어내야
장기적인 저성장 기조나 디플레이션 우려, 청년 실업의 장기화 등 한국 경제를 둘러싼 부정적 이슈들이 심각하게 거론된 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온갖 정책 주문이 강조되고 백방의 묘책이 강구되고 있지만 상황은 좀처럼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한국 경제의 주 엔진인 글로벌 대기업들의 미래에 대한 걱정마저 늘어나고 있다. 총수들과 정치권과의 회동도 잦아지고 있다. 그동안 믿었던 중국 경제마저 주식시장 폭락 조짐까지 보이면서 주변 상황의 심각성을 부추기고 있다.

한마디로 작금의 무기력증은 수시로 환경 변화에 적응해야 할 사회 구성원들이 고유의 역할과 기능을 스스로 저버리고 외부적 해법에 생존을 의존하게 된 결과다. 경제 생태계가 스스로의 주권을 포기하고 정치적으로 변모한 결과다. 외부 여건은 각자가 수시로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한 해법 모색을 요구하고 있지만 우리들은 스스로의 변화를 거부하고 외부적 정치력에 기대 현상 유지의 ‘지대(rent)’를 장기화하려고 골몰하고 있다.


효율적 관료 시스템 ‘옛말’
그리스나 중국의 혼란은 바로 정책 노력에만 의존하는 시스템 자체의 경직성과 직결돼 있다. 메뚜기도 한철이라고 환경에 좋을 때는 다 좋아 보이지만 정작 시장의 테스트는 어려울 때의 대응 여력에 달려 있다. 먹구름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중국이 그리스와 다르다는 점을 보이려면 내부적 신축성을 허용하는 지배 구조의 현명한 판단 능력을 다시금 대외에 보여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리스와 달리 중국의 리더십은 어느 정도의 낙관을 허용하고 있다. 비민주적인 정치 프로세스로 비쳐지는 이질적 요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시장경제의 생리를 그동안 잘 살려 왔기 때문이다.

엄밀히 보면 세계적으로 판도를 변화시키고 있는 새로운 성장 동력의 핵심은 개방과 협업이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변화가 효율적인 관료 시스템과 국가적 지원을 토대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끌어 냈던 아시아 경제로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문이다. 이러한 여건 변화의 핵심은 그동안 막강한 공급 체인을 장악한 글로벌 기업과 수동적인 수요 기반으로 간주됐던 민간과 시장에 대한 엄중한 각성을 동시에 요구한다. 더 이상 수직적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 관계 재정립을 통해 민주적인 생존 기반을 모색해야 하기 때문이다. 비근한 예로 항공사들이 스타얼라이언스·스카이팀 등의 합종연횡을 통해 생존을 모색하는 것만 보더라도 거대한 시장에 노출된 개별 요소는 생존하기 어렵게 됐다.

연결된 세상이 우리에게 주문하는 거스를 수 없는 핵심적 변화는 최대한 많은 고객에게 어필할 수 있는 합종연횡의 기반에 올라타라는 것이다. 변화의 물결이 점차 강해지고 있는데 과거 국가의 틀 안에서 승승장구하던 아시아의 기업들은 여전히 정부에 기대 변화의 주역으로 나서기보다 막연한 상실감과 혼란 속에서 정부 로비에 나서고 있다. 아직도 구태의연한 정책 주문으로 일상의 에너지마저 소진하고 있다. 그래서 노력은 배가되고 있지만 결과는 오히려 참담하다. 불행하게도 세상의 변화와 이에 적응하지 못하는 시스템의 괴리는 수출 주도 경제에서 더욱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실제로 그동안 대외 수출 엔진으로 고도성장을 구가하면서 자신에 찬 아시아 경제는 절체절명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 과연 관료 주도로 커 온 동양권에서 이러한 본질적인 핵심 변화가 어느 정도까지 구현될 수 있을 것인지에 미래가 달려 있다.


5년 주기 정치 실험에 속수무책
이제는 민간 스스로 변화를 적극적으로 극복하고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생태계의 진화적 변화는 공동의 책임이자 필수적인 작업이다. 소위 창조 경제의 핵심이 창의성이라면 이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가야 하므로 지금의 리더십은 과거와 다른 방식의 간접 지원에 나서야 한다. 결국 개별 요소가 모여 시스템이 운영되지만 무엇이 이러한 시스템의 낙후성을 초래하는지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 있어야 한다.

한마디로 아시아 경제는 고부가가치 창출에 필요한 융합과 창의성을 수용하기에 지배 구조가 지나치게 경직적이다. 기득권의 주장과 국익 관련 가정이 과도하게 강조되다 보니 기대하는 창의성은 외국에 유출되거나 자체적으로 시들 수밖에 없다. 연어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도록 충분한 수량이 보장돼야 하듯이 민간의 시장 참여 기회를 대폭 늘려야 한다. 허가를 통해 기회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시장 여건을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국가적 차원의 생존에 필수적인 기득권 보호라는 가정 때문에 정무적 차원에서만 일부 여건 변화를 허용하고 있다.

정치적 힘에 대한 의존도는 일견 단기에 가시적 결실을 가져다주는 듯하지만 그 피해는 장기적으로 나타난다. 거듭된 비리와 부실을 경험한 우리로서는 더 이상 뻔한 정치 게임에 우리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 모든 경제적 결정은 가급적 시장 원리가 존중돼야 하며 시장 실패의 영역은 정부의 시장 친화적 참여를 통해 여지를 줄여 나가야 한다. 시장 실패보다 더 심각한 것은 더욱 비효율적인 진입 장벽으로 무장한 공기업의 존재다. 이렇듯 시장 기구의 변종이나 정책 노력은 부수적인 차원에 그쳐야지 본질이 될 수 없는데 유감스럽게도 아시아 경제는 공통적으로 정치적 의도와 연관된 조급함이 모든 사안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

누구보다 빠르게 대량으로 만들어 내는 기술만으로 우리는 선진국 진입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제라도 질적인 성장 기반이 무엇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준비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한국은 5년마다 바뀌는 정권의 핵심 어젠다에 의해 모든 것들이 과도한 영향에 놓이게 된다. 외부 환경에 적응해야 할 주체들이 5년 주기의 정치 현실에 적응하느라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서 점차 약화되는 경쟁력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고 있는 셈이다.

정치는 선거로 관리되지만 경제는 모두가 참여하는 나름대로의 생존 원칙이 존재한다. 경쟁력이 저하된 경제는 세계적으로 외면 받게 돼 있다. 5년 주기의 정치 과정이 100년 앞을 내다보고 준비해야 할 경제 기반의 구축에 더 이상 방해가 돼서는 안 된다. 정치가 정치인에 의해 이뤄지듯이 경제는 기업가들에게, 연구는 연구자에게 맡겨야 한다. 취약한 연결 고리로 지대 추구에 골몰하는 중간자의 역할을 과감하게 대체해야 한다. 경제적 자유와 개방 그리고 창의성을 어떠한 경우에도 보장할 수 있는 미래 지향적 정치적 결단이야말로 이제 글로벌 환경에 노출된 우리 경제에 가장 필요한 관건이 됐다.


최공필 한국금융연구원 상임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