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장 바뀔 때마다 옛 국민·주택 출신 격돌…내분 타고 관치금융 득세

이렇게 바쁜 와중에서도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긴장감이 역력했다. 합추위를 구성하고 있는 35개 팀별로 책상이 배정돼 있었는데 한쪽은 국민은행, 다른 쪽은 주택은행 직원들이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합추위부터 화합시키자는 취지에서 각 은행 멤버들을 함께 일하도록 했지만 결과는 오히려 ‘끼리끼리’ 분위기를 부추겼다는 평가였다. 밥을 먹을 때도, 회식을 할 때도 각자 움직였다. 담배를 피울 때도 마찬가지였다. 업무 협의도 국민은행은 국민은행끼리, 주택은행은 주택은행끼리 모여 했다. ‘합병추진위원회’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였다.
회식도 ‘따로’ 담배도 ‘따로’
당시 합추위에 몸담았던 국민은행 관계자는 “갈등이 없었다면 거짓말 아니겠느냐”며 “당시 물리적인 화합 시도에만 노력했을 뿐 서로 ‘한 몸’이라는 진정한 융합은 없었다”고 기억했다. 이미 시작부터 국민은행 출신과 주택은행 출신 간의 갈등이 감지되고 있었다. 소매 금융 전문인 대형 은행들이 합병하는 가운데 직원들끼리의 자존심 싸움이었다.
합병 은행장 선임도 간단하지 않았다. 김상훈 전 국민은행장과 김정태 전 주택은행장이 합병 은행장이 되기 위해 경쟁했지만 정부는 결국 김정태 전 행장의 손을 들어줬다. 김 전 행장이 합병 국민은행장으로 취임하면서 갈등 이슈는 잠시 수그러드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김 전 행장에 대한 평가를 두고 두 은행 출신들은 사사건건 부딪치기 시작했다.
강력한 카리스마의 소유자로 알려졌던 김 전 행장도 이 같은 분열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대표적인 사건이 김 전 행장에 대한 감사원 지적을 둘러싸고 두 은행 노조가 대립한 일이었다. 김 전 행장은 주택은행장에 취임하면서 ‘월급 1원’을 선언했다. 그 대신 주택은행 40만 주를 ‘스톡옵션’으로 받았다. 은행이 이윤을 낸 만큼 돈을 받아가겠다는 의미였다. 당시 금융권에선 이를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합병 국민은행 출범 당시 주당 4만 원 정도에 불과하던 국민은행 주가가 재임 기간 내에 9만 원 가까이로 치솟았다. 3년의 재임 기간이 끝난 뒤 스톡옵션 행사를 통해 그가 ‘1원’의 월급 대신 얻은 시세 차익은 140억여 원에 달했다.
이 일은 그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스톱옵션 행사 차익 중 절반을 불우이웃 돕기에 내놓는 등 사회에 환원했지만 감사원이 스톡옵션 행사 과정에서의 문제를 제기했다. 감독 당국도 김 전 행장에게 주의적 경고를 내렸다.
감사원의 지적을 놓고 국민은행 내의 ‘한 지붕 두 노조(구 국민은행, 구 주택은행)’가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국민은행은 합병 후 구 국민은행과 구 주택은행 노조의 통합을 추진해 왔지만 이질적인 은행 문화로 통합 작업이 지연돼 왔다. 김 전 행장에 대한 감사원의 지적을 두고 두 은행 노조가 각각 다른 의견을 제시한 것이다.
국민은행 내 구 주택은행 노조는 성명서를 통해 “김정태 행장의 스톡옵션 문제는 금융감독원 검사를 거쳐 결론 난 사안”이라고 주장했다. 주택은행 노조는 또 김 전 행장이 앞서 한 월례 조례에서 사퇴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힌 데 대해서도 “통합 은행의 미래와 최고경영자(CEO)로서의 소임을 강조한 것은 시의적절했다”고 평가했다.
구 주택은행 노조가 ‘김정태 구하기’에 나선 반면 구 국민은행 노조는 오히려 김 전 행장을 비판하고 나섰다. 구 국민은행 노조는 “노동조합이 경영진을 비호하는 것은 옳지 않다”며 “구 주택은행 노조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고 밝혔다.
2004년 김 전 행장의 연임 문제를 두고도 국민은행은 ‘내홍’을 겪었다. 구 국민은행 노조가 김 전 행장의 연임을 앞두고 기자회견을 열어 김 전 행장을 비롯한 경영진에 대한 문책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경영진이 과도한 성과급을 챙겼다는 이유였다.
당시 은행권에선 갈등의 근본 원인이 구 국민은행 노조로 대표되는 구 국민은행 출신들이 은행 내에서 느끼는 소외감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구 주택은행 출신들이 통합 국민은행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데 대한 구 국민은행 직원들의 반감이 표출됐다는 것이었다.
새 행장 출신 따라 1·2채널 희비 엇갈려
구 국민은행과 구 주택은행 출신 간의 갈등은 행장을 비롯한 경영진 인사가 있을 때마다 불거졌다. 초대 합병 국민은행장에 구 주택은행장을 맡고 있던 김 행장이 선임되면서 ‘2채널’로 불린 구 주택은행 출신들이 힘을 얻었다면 김 행장이 물러나면서 1채널은 ‘기회’를 잡았다고 판단했다. 1채널과 2채널은 차기 행장을 두고 심각한 갈등을 겪었고 채널 간 감정 대립이 격화되자 행장후보추천위원회는 외부 출신인 강정원 행장을 영입했다. 지주회사 체제가 출범한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1채널 출신인 민병덕 행장이 발탁되면서 1채널의 ‘황금시대’가 열렸다. 2010년 7월 갓 취임한 어윤대 KB금융지주 회장이 차기 국민은행장을 뽑기 위해 직원들을 상대로 설문 조사를 실시했다. 당시 어 회장은 국민은행 직원 1300명에게 설문지를 돌려 차기 행장 후보로 언론 등에 이름이 거론된 12명 중 한 명을 고르게 했다. 어 회장은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상위 3명 중 한 명을 행장으로 선임할 계획이었다.
어 회장의 논리는 명료했다. 20만 명이 넘는 직원을 가진 국민은행을 끌고 가려면 직원들의 신망도 상당히 중요하다는 판단이었다. 그는 “직원들의 의견을 국민은행장 선임 때 참고 자료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방식은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낳았다. 구 국민은행과 구 주택은행 출신 간 알력 싸움으로 번졌기 때문이다. 2001년 구 국민은행과 구 주택은행이 합병한 지 10여 년이 지난 시점이었는데도 완전한 화학적 통합까지는 도달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구 국민은행 출신은 국민은행 출신 행장 후보를, 구 주택은행 출신은 주택은행 출신 행장 후보를 밀면서 갈등이 심화됐다. 일부 직원들 사이에서도 구 국민은행과 구 주택은행 출신 간 알력을 되살렸다는 점을 비판하는 이들이 생겼다. 결국 국민은행장엔 국민은행 출신인 민병덕 당시 부행장이 선임됐다. 결과적으로 구 국민은행 출신들의 승리로 비쳐졌다.

2013년 국민은행에서 도쿄지점 부당 대출과 국민 주택 채권 위조·횡령 사건 등이 잇따를 때도 구 국민은행과 구 주택은행 출신 간 해묵은 갈등이 불거졌다. 국민은행에서 사고가 잇따르고 있는 것은 내부 인사의 제보에 따른 것이라는 관측이 금융권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직접적인 제보는 아니더라도 사건의 구체적인 내용을 감독 당국 등에 제보하면서 사건을 증폭시키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당시 감독 당국 고위 관계자도 “국민은행의 금융 사고 및 비리 사건이 잇따라 드러나고 있는 것은 해묵은 1채널(구 국민은행 출신)과 2채널(구 주택은행 출신) 간의 반목 때문인 것 같다”며 “최근 비리와 관련해서도 1채널 쪽에서 정보가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앞서 이건호 국민은행장이 취임하면서 균형추가 1채널로 급속히 기울었기 때문이다. 민병덕 전 행장 시절 구 국민은행 출신 임원은 10명, 구 주택은행 출신 임원은 11명이었다.
민 전 행장이 구 국민은행 출신을 중용했다고 하지만 외형상 숫자는 비슷했다. 하지만 이 행장 취임 후 구 국민은행 출신 임원은 5명인 데 비해 구 주택은행 출신은 9명으로 훨씬 많아졌다. 이에 대해 구 국민은행 출신이 퇴조했다는 분석이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사건 사고가 잇따르자 서로 ‘네 탓 공방’으로 갈등이 커지고 있다는 관측이었다.
정치적 ‘줄’ 찾기 경쟁…정부가 아직도 주인 행세
구 국민은행과 구 주택은행의 갈등이 KB금융지주와 계열사 전반에 ‘관치금융’을 자리 잡게 했다는 비판도 있다. 내부에서 갈등이 해결되지 않으니 관료와 정치권에 줄 대기를 하는 일이 많아졌다는 논리다. 실제로 금융 당국은 KB금융지주를 비롯해 국민은행의 중요한 사안마다 사사건건 간섭한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CEO 선임이 대표적인 예다.
임영록 KB지주 전 회장과 이건호 전 국민은행장의 갈등을 골자로 한 ‘KB 사태’가 두 사람의 퇴진으로 일단락된 뒤 새로운 KB지주 회장을 선임하는 과정에서도 나타났다. 금융 당국의 수장이 특정 인물을 이미 KB지주 회장으로 낙점했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루머가 돌자 금융 당국은 사실 여부를 떠나 강도 높은 비판을 받았다. 이미 물러난 임영록 전 회장과 이건호 전 행장이 갈등을 겪은 것도 서로가 다른 정치적인 줄을 타고 낙하산 인사로 내려와서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정치적 배경이 있다 보니 회장과 행장 사이에 협력 구도가 아닌 대결 구도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관측이었다.
현재 KB금융지주를 이끌고 있는 윤종규 회장이 선임될 때도 그랬다. 이미 지난해 9월부터 이런저런 말이 나돌았다. 당시에도 내정설과 외압설은 어김없이 나왔다. 그가 강력한 경쟁자였던 하영구 전 한국씨티은행장(현 전국은행연합회장)을 제치고 회장이 됐지만 금융 당국은 ‘KB금융의 LIG손해보험 인수 불승인’ 카드를 내세워 그를 압박했다는 게 금융권에서 돌고 있는 ‘정설’이다.
국민은행 관계자는 “구 국민은행과 구 주택은행 모두 한때 정부가 대주주였지만 지금은 정부 지분이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정부가 주인인 것처럼 행세하고 있다”며 “이런 관행에 젖은 직원들도 CEO가 되거나 승진하기 위해 이리저리 외부의 ‘줄’을 찾아다니면서 정부의 간섭과 직원들의 관행이 외풍을 끝없이 불러들이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신영 한국경제 금융부 기자 myuso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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