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전광우 국민연금공단 전 이사장

국민연금 ‘연못 속 고래’…글로벌 무대서 진검 승부 펼쳐야
“초저금리 시대, 기존 방식으론 위험하죠”
“국민연금공단으로부터 기금운용본부를 분리하되 전문성·독립성을 중심으로 목표와 원칙에 충실한 지배 구조가 돼야 합니다. 단, 국가 정책 수단의 동원 도구가 돼서는 안 됩니다.” 지난 4월 21일 서울 광화문 개인 사무실에서 만난 전광우(66) 국민연금공단 전 이사장은 기금운용본부의 전문성·독립성 우려에 대한 평소 소신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2009년에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에 취임해 2013년 4월 자리를 떠난 그는 역대 ‘최장수’, ‘최초 연임’한 이사장이었다. 재임 기간 ‘자본시장의 대통령’, ‘연·기금의 슈퍼스타’ 등으로 불리며 국민연금의 기금 운용을 주도해 나갔다. 특히 해외투자에 앞장서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의 ‘국격’을 높인 인물로도 평가 받는다.


국민연금 지배 구조의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입니까.
“기금운용본부의 독립은 2008년에도 정부안이 발의됐지만 폐기됐고 2013년에도 이번 안과 비슷한 안이 나왔지만 변화는 없었습니다. 그때마다 논의의 배경과 명분은 운용의 ‘전문성과 독립성’ 제고였습니다. 이번에도 같은 상황이죠. 갈수록 비대해지는 국민연금을 채권 투자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데, 초저금리 시대에 기존 방식대로 운용하는 것은 안 될 일입니다. 이는 전문성이 부족한 탓이 큽니다.”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람이 경쟁력 아닙니까. 그런데 기금운용본부는 올바른 투자 결정을 하고 좋은 투자처를 발굴하기 위한 정보력, 글로벌 네트워크 등을 갖춘 전문가가 부족합니다. 기금운용본부에 200명 남짓 되는 전문가가 있습니다. 이 중 해외투자 담당은 50여 명뿐이고요. 전체를 두고 봤을 때 국민연금 기금 500조 원 시대에 1인당 2조 원에 달하는 기금을 운용하는 꼴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이런 사례는 없어요. 캐나다의 국민연금 기금 규모는 우리보다 적지만 인력은 두 배 이상입니다.”


왜 인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습니까.
“국민연금공단이 공적 기관이라는 데서 오는 한계점이 있습니다. 첫째, 국민연금은 장기 투자 위주인데, 이를 관리하는 기금운용본부의 전문가들의 턴오버(이직·이동)가 많습니다. 자주 자리를 바꾸면서 업무에 전문성·연속성·일관성이 낮아질 수밖에 없죠. 이직이 많은 이유는 민간 회사보다 낮은 임금도 한몫합니다. 둘째, ‘중복 감사’입니다. 1년에 반 이상은 각종 감사(기획재정부, 보건복지부 감사원, 국회 국민연금위원회 등)를 받느라 정신이 없어요. 정작 중요한 자금 운용에 들이는 시간이 부족해지는 겁니다. 감사는 당연한 것이지만 기관들이 돌아가면서 수시로 진행하는 중복 감사가 본업을 방해한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감사 후에 몰려오는 투자에 대한 자신감 저하도 능률을 떨어뜨리고요. 실제로 많은 이들이 이 때문에 힘들어 하고 또 국민연금공단을 떠나고 있습니다.”


외부 전문 인력과 협력하는 방법도 있지 않습니까.
“물론 기금운용본부의 내부 역량을 키우는 것이 일차적으로 중요하지만, 사실 하루아침에 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외부 역량, 즉 글로벌 금융 리더들과의 적극적인 전략적 제휴가 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세계적인 전문 투자 그룹과 은행 등의 협조, 지원을 받는 것이죠.”


구체적인 사례가 있습니까.
“2009년 국민연금은 해외 사모 펀드인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P)와 함께 미국 콜러니얼 파이프라인을 인수하고 2013년 국내 기관투자가들과 함께 1조4000억 원 규모의 펀드를 조성해 가스 파이프라인 투자에 나섰습니다. 2012년 영국의 사모 펀드와 함께 미국 스무디킹 본사를 인수했죠. 국내 기업과 손잡고 투자에 나선 적도 있죠. 대표적 사례는 미래에셋맵스PEF·휠라코리아와 함께 미국 골프 용품 업체인 아쿠시네트(타이틀리스트)를 인수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외부 실력파들과 함께 협력하며 우리의 역량 역시 키우는 겁니다. ‘소비자 수준에 맞춰 서비스한다’는 말처럼 우리 스스로도 역량을 키워 수준을 높여 나가야 좋은 외부 인력들과 전략적인 투자를 할 수 있고 이렇게 해야 기금운용본부가 전 세계적으로 성공적인 연·기금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습니다.”


국민연금의 해외투자가 바람직합니까.
“국내시장에서만 소화하기에는 국민연금이 너무 빠른 속도로 커지지 않았습니까. 이제 해외투자는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지금도 해외투자 비중은 국민연금 규모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습니다. 아직도 국민연금은 ‘연못 속 고래’와 같습니다. 태평양으로 눈을 돌려야 합니다. 현재 미국·유럽·일본·중국 등 전 세계 글로벌 유동성이 넘칩니다. 그러나 좋은 투자처는 제한돼 있어요. 그래서 투자자들끼리의 경쟁이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합니다. 이런 때 한국은 돈(연·기금)이 많다고 해서 느긋하게 있을 일이 아닙니다. 실력 없는 ‘갑’은 ‘밥’이 되고 맙니다.”


투자 손실 위험에 대한 우려도 많은데요.
“부동산·인프라 등의 가격 변동성이 큰 자산에 투자하더라도 다변화 전략을 쓴다면 채권 투자보다 수익률을 안정적으로 올릴 수 있습니다. 또 투자의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 감내할 수 있는 만큼의 리스크는 안고 가는 겁니다. 진짜 전문가의 역량은 어느 정도의 리스크는 안고 가되 안정성을 크게 훼손하지 않고 수익성을 높이는 것입니다.”


여전히 ‘안정적 투자’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국민연금 기금 운용은 수익성보다 안정성에 비중을 둬야 한다는 논리가 그동안 많이 나왔습니다. 일견 맞는 소리 같지만, 저는 이 말에 굉장히 오류가 있다고 봅니다. 적정 수준의 수익이 나지 않는 안정성은 ‘백해무익’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한국은 안정성을 고려해 과거 고금리 시절부터 시작해 온 채권 투자 비중이 높습니다. 지금 초저금리 시대에 안정성을 운운하며 채권 투자에 의존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수익을 내지 못하면 장기적인 기금의 재정 안정을 확보할 수 없습니다. 채권 투자의 집중은 재정을 악화시키는 확실한 방법입니다. 안정성의 덫·함정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운용 전략의 변화를 위해 기금운영본부의 독립이 필요합니까.
“독립하되 관리 기관들이 지켜야 할 원칙들이 있습니다. 본래의 목표와 원칙에 충실한 지배 구조가 개선돼야 합니다. 독립의 취지대로 투자 활동, 인사 등에서 외부의 입김이 작용하지 않도록 본부의 자율성을 보장해 주는 것입니다.”


공사화가 오히려 옥상옥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옵니다.
“사실 기금운용본부가 독립하더라도 여전히 보건복지부 산하에 있는 데다 운용에서 기획재정부가 개입하게 될 것은 자명합니다. 이 때문에 독립의 의미가 없다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국민연금 기금이 국가 정책 수단의 동원 대상이 돼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과거에 종종 기재부(당시 재경부)·국토부 등에서 연·기금을 마치 정부의 돈인 양 쓰려고 요구한 적이 있어요. 이런 입김에서 벗어나 기금운용본부의 전문가적 판단에 의해 자금 운용을 결정해야 합니다. 낙하산 인사도 문제가 될 수 있죠. 과거 몇몇 공사화 사례에서 나타난 것처럼 낙하산 인사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을 수 있습니다.”


최근의 지배 구조 개편 논의를 어떻게 보십니까.
“혁신의 모멘텀이라고 봅니다. 사실 2008년 발의된 법안을 보면 국민연금의 기금운용본부는 보건복지부로부터 완벽하게 독립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수조 원을 다루는 덩치가 큰 기금운용본부의 독립을 보건복지부가, 또 국회 보건복지위원회가 내보내고 싶어 하지 않았죠. 상황이 이렇다 보니 법안이 사장돼 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이번 상황은 조금 달라요. 보건복지부가 타협점을 찾은 듯합니다. 현재 거론되는 개혁 방안은 기금운용본부를 국민연금공단으로부터 떼어내되 소관 부처는 보건복지부로 한다는 계획을 밝혔습니다. 보건복지부 쪽에서 보면 산하 기관이 하나 더 생기는 것인데, 언해피(unhappy)할 이유가 없겠죠. 이번에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


기금 고갈의 대안은 없나요.
“연금 기금의 재원은 두 군데입니다. 신규 보험료 수입과 재정입니다. 하지만 한국은 심각한 저출산 문제를 안고 있어요. 이는 곧 미래에 보험료 낼 사람이 줄어드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나머지를 재정에서 채우게 되는 것입니다. 정부로서는 재정 부담이 되겠죠. 따라서 국민연금 기금 운용을 잘하면 잘할수록 미래에 재정 부담을 줄일 수 있습니다. 다른 나라들도 이렇게 하죠. 100여 년 전부터 국민연금을 시작해 이미 기금이 소진된 국가(독일 등) 역시 이런 방법으로 기금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김보람 기자 boram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