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메가 뱅크론 띄우고 국민·주택 합병 압박…투서 등 자리다툼 과열

‘매머드’ 통합 은행장 꿰찬 김정태
2000년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이한 한국은 외환위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는 듯했다. 상업은행과 한일은행이 합병해 설립된 한빛은행을 비롯해 하나은행(하나은행+보람은행)·국민은행(국민은행+장기신용은행)·조흥은행(조흥은행+강원은행+충북은행) 등이 합병을 통해 재탄생하면서 금융권 구조조정도 마침표를 찍는 것처럼 보였다.

불행히도 은행권의 구조조정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대우 사태’가 불거졌다. 1999년 경영 부실로 재계 2위 대우그룹이 해체되면서 은행 부실이 또다시 증가했다. 은행권 구조조정 이슈는 한국형 ‘메가 뱅크’가 필요하다는 논의로 이어졌다. 굵직한 기업들을 감당할 만한 대형 은행이 이제 한국에도 필요하다는 논리였다.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의 합병을 얘기하기 전에 긴 배경 설명이 필요한 이유다. 당시엔 국민은행과 주택은행 두 곳 모두가 소매 금융에 특화돼 있기 때문에 합병해도 시너지 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대형 은행이 필요하다는 논리에 두 은행은 극적인 결합을 하게 된다.


소매 금융 공통점…처음엔 양쪽 모두 부정적
당시 대형 은행이 필요하다는 논리의 근거가 된 사건이 있었다. 2000년 당시 현재 SK하이닉스의 전신인 현대전자가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정부는 중복 투자와 과당경쟁을 막겠다는 취지로 ‘대규모 사업 구조조정’을 실시했다. 업체 간 ‘빅딜’ 이었다.

반도체 산업도 ‘대규모 사업 구조조정’ 대상이었다. 1999년 10월 현대전자가 LG반도체를 합병했다. 현대전자는 LG반도체 인수를 위해 무려 15조 원에 달하는 차입금과 인수 대금까지 내야 했다. 문제는 세계 반도체 경기가 유례없는 불황에 빠진 것이다.

정부는 은행들을 동원해 본격적인 현대전자 살리기에 들어갔다. 하지만 현대전자에 대해 1조 원의 신디케이트론을 추진할 때 각 은행은 금융감독위원회의 특별 승인을 받아야 했다. 은행마다 동일인 여신 한도를 초과했기 때문이다. 은행 수는 많았지만 현대전자의 여신을 감당할 만한 곳이 없었던 것이다.

당시 은행 구조조정에 몸담았던 정부 관계자는 “규모면에서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고만고만한 은행들이 넘쳐나고 있는 사례였다”고 말했다. 우량 은행에 대한 필요성과 은행 공급과잉이라는 인식이 합쳐져 은행권 2차 구조조정의 근거가 만들어졌다. 당시 일본이 미즈호그룹 등 4개 금융그룹으로 은행 산업을 재편한 것도 은행 수를 줄이고 합병으로 대형화를 꾀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렸다.

정부는 공식적으로는 은행 간 합병을 강요하지는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실상은 합병을 위한 정지 작업에 본격적으로 들어간 상태였다. 이기호 청와대 경제수석이 2000년 5월 1일 “올 하반기 중에 은행들이 필요에 의해 합병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면서다. 이 수석은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일본은 은행이 최근 3~4개로 합병됐는데 경제 규모가 작은 한국은 8개나 된다”고 덧붙였다.

언론과 금융권에선 이 수석의 발언을 제2차 금융 구조조정을 앞두고 은행 간 합병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으로 풀이했다. 은행권 구조조정의 물밑 작업이 시작됐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의 합병 가능성을 점치는 이는 거의 없었다. 오히려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을 두 축으로 삼고 여기에 공적자금 투입 은행과 후발 은행들을 합쳐 명실상부한 리딩 뱅크로 만드는 방안이 힘을 받았다.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의 합병은 처음엔 가능성이 낮은 것으로 점쳐졌다. 김상훈 국민은행장은 2000년 5월 기자 간담회에서 “업무 영역 확대 측면에서 주택은행과의 합병은 시너지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못 박았다. 그는 “소매 금융이라도 거액 고객들은 투자은행 업무와도 연결된다”고 말했다. 시너지 효과를 내려면 우량 은행이면서 투자금융 분야 등에 강한 하나·한미·신한은행 등과의 합병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을 내비친 것으로 풀이됐다.

김정태 주택은행장도 국민은행과의 합병을 부정적으로 본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는 2000년 8월 영국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국민·신한·하나·한미은행 등 4개 우량 은행을 놓고 합병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국민은행과 합병에 대해 “업무 영역이 비슷해 비용 절감 효과는 있겠지만 합병 후 2만7000여 명이나 되는 인력의 절반 가까이를 정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해 가능성을 낮게 봤다.

오히려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은 각각 적합한 합병 상대를 찾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김상훈 국민은행장은 간부 회의 석상에서 명예퇴직 실시와 관련, “이번에는 가급적 퇴직 인원을 최소화하라”고 지시했다. 은행권에선 “향후 그 어떤 은행과 합병되면 어차피 또 한 차례 인원 조정이 불가피하고 이때 합병 시점의 직원 수가 인력 감축 비율을 정하는 기준이 될 것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근영 금감위원장, “세계 100위권 은행 나와야”
분위기는 2000년 11월 급전환됐다. 김정태 주택은행장이 2000년 11월 23일 한 강연에서 “합병 파트너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소매 금융에 강점이 있는 은행이어야 한다”고 밝혀서다. 이와 관련, 주택은행이 국민은행과의 합병을 추진하려는 사전 포석이라는 해석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 같은 발언은 정부의 압박(?)과도 무관하지 않았던 것으로 해석된다. 정부도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을 겨냥해 우량 은행 간 합병을 강력히 요구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근영 금융감독위원장은 비슷한 시기 시중은행장과의 간담회에서 “우량 은행이 현재와 같은 영업 행태로는 앞으로 계속 우량 은행이 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시너지 효과가 있는 은행과의 합병에 행동으로 나서 달라”고 촉구했다.

이근영 위원장의 발언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한 달 뒤 그는 “조만간 내주 초부터 한빛은행 중심의 금융지주회사에 포함될 개별 지방은행들의 합병 발표를 비롯해 금융지주회사 구성 발표가 이어질 것”이라며 “이 밖에 우량 은행과 우량 은행의 합병 발표가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당시 진행 중인 한미은행과 하나은행의 결합을 제외한 다른 우량 은행 간의 합병을 뜻하는 말이었다. 이근영 위원장은 또 “세계 100위권 이내의 대형 은행이 2개는 있어야 국가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며 “은행들 자신을 위해서도 그런 은행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그런 은행은 반드시 나올 것”이라고 덧붙였다.

은행권은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의 합병을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였다. 실제 12월 중순 김상훈 국민은행장과 김정태 주택은행장이 합병한다는 원칙에 합의한 사실이 공식 확인됐다. 두 행장이 노조에 먼저 관련 사실을 밝히면서다.

이경수 국민은행 노조위원장은 “김상훈 국민은행장과 면담한 결과 두 은행장이 합병한다는 데 원칙적으로 합의하고 국민은행의 대주주인 골드만삭스의 인수·합병(M&A)팀이 입국해 주택은행의 컨설팅 회사와 합병 비율 등 조건에 관해 협의를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고 밝혔다. 김정태 주택은행장도 강제적인 인원 감축은 없다고 은행 노조원들에게 밝혔다.

김상훈 국민은행장과 김정태 주택은행장은 12월 22일 한국은행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두 은행의 합병을 공식 발표했다. 두 행장은 이날 오후 모처에서 만나 합병 합의서(MOU)에 서명했다. 합의서에는 두 은행이 경쟁력 강화 차원에서 합병하되 합병 방식은 새로운 은행을 신설, 두 은행을 흡수하는 형식을 취하도록 했다.

합병 안이 발표됐지만 실제 합병 과정은 지지부진했다. 두 은행 간 주도권 싸움이 치열해서다. 주택은행의 국민주택기금 부실 문제와 국민은행의 국민카드 자본이득 문제 등으로 서로 흠집 내기를 시작한 것이 대표적이다.

특히 합병 은행장 선임 문제가 쟁점이었다. 진념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이 합병 은행의 투서가 문제라고 발언하는 일까지 있었다. 진 부총리는 “합병 은행 경영진과 관련, 투서가 난무하고 서로를 모함하고 있다”며 “갈등이 계속된다면 모두 물러나야 한다는 게 나의 소신”이라고 강하게 발언했다.

두 은행은 실제 합병 은행장 배출에 은행의 사활이 걸렸다는 듯이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해당 은행에서 합병은행장이 나와 주도권 싸움에서 유리한 고지를 확실하게 점령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투서도 난무했다.

김상훈 국민은행장이 주주총회 자리에서 “시장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은행에서 합병 은행장이 나오는 것이 관례”라고 발언해 사실상 자신이 합병 은행장이 돼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주택은행은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이었다. 합병 당사자로서 개인적인 희망 사항에 불과하다는 논리였다.

이 때문에 당초 합병 은행장을 조기에 선정하기로 한 원칙은 지켜지지 못했다. 두 은행 간의 갈등 조짐으로 합병 작업에 차질이 빚어질 것을 우려해 합병 본계약을 맺는 3월 말까지는 행장 선임 등에 대해 일절 논의하지 않기로 서로 암묵인 합의까지 했다. 두 은행장은 합병 본계약이 합병 발표를 한 지 반년 만인 6월 14일에야 양쪽 경영진이 모두 배석한 가운데 공식 만남을 가졌을 뿐이다.


정부, 합병추진위 간사 통해 통합 은행장 낙점
승자는 김정태 주택은행장이었다. 당시 정부가 그의 손을 들어줘서다. 합병 은행의 최대 주주는 지분 10%를 가진 골드만삭스였다. 하지만 골드만삭스가 10%의 지분만 갖고 행장을 마음대로 선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2대 주주가 변수였다. 주주명부상으로는 국민 6.21%, 주택 15.36%의 지분이 뉴욕은행 명의로 돼 있었다. 하지만 뉴욕은행은 외국계 펀드들의 수탁은행이어서 명의상으로만 지분을 갖고 있을 뿐이었다. 실질적인 2대 주주는 국민 6.48%, 주택 14.5%의 지분을 갖고 있는 정부였다.

합병 은행장 선정 과정에서 정부는 최범수 합병추진위원회 간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관여했다. 당시 정부 측을 대표했던 최범수 합병추진위원회 간사는 “도대체 정부의 의중은 누구냐”는 골드만삭스 등 외국계 대주주의 질문에 대해 답변하는 방식으로 정부의 뜻을 전달했다.
‘매머드’ 통합 은행장 꿰찬 김정태
국민·주택 합병 은행인 ‘국민은행’은 11월 1일 공식 출범했다. 합병 은행은 자산 185조 원으로 국내 최대, 세계 60위권의 초대형 은행이 됐다. 당시 우리금융지주회사(101조 원)의 2배 정도에 이르고 신한금융지주(63조 원)의 3배나 되는 규모였다. 한국에도 세계적인 대형 은행이 생겼다는 기대감에 금융권은 들떴다.

하지만 여전히 노사 관계 및 조직 융화 문제는 합병 은행의 불안 요인이 되고 있었다. 두 은행의 조직 문화가 다른데다 상당수의 직원들이 아직까지 합병에 대해 긍정적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김정태 행장이 이 같은 양 은행 간 감정의 골을 어떻게 채우고 국민은행 직원과 노조를 설득할 수 있느냐가 향후 합병 은행의 성패를 결정지을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합병된 이후 두 은행 간의 갈등이 현재까지 15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이어질 것이라고 예상하지는 못했다.


박신영 한국경제 금융부 기자 m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