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수지 흑자, 해외투자로 빠져나가…엔·유로 비해선 이미 큰 폭 상승

최근 미국 재무부는 의회에 제출한 환율 보고서에서 ‘한국 정부는 외환시장 개입을 중단하고 원화 가치 상승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한국 정부는 국제적으로 용인되는 수준의 미세 조정을 했을 뿐이라고 대응했다. 앞으로도 한국이 대폭의 경상수지 흑자를 내면서 한미 외환 정책 당국자 간에 이런 논쟁이 더 심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미 재무부는 한국의 경상수지 흑자가 환율이 아니라 한국 경제의 구조 변화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미 재무부가 원화 가치가 저평가됐다고 보는 이유는 한국의 대규모 경상수지 흑자에 있다. 2014년 한국의 경상수지 흑자는 892억 달러로, 규모로는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고 명목 국내총생산(GDP) 대비로도 6.3%라는 매우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일부 원유 수출국과 독일을 제외하면 경상수지 흑자가 GDP의 6% 이상인 나라는 별로 없다. 한국의 경상수지 흑자가 지나치게 많고 이것이 원화 가치의 저평가에 기인한 것으로 보는 미 재무부의 주장이 어느 정도 타당한 이유다.


미 재무부, “환율 개입 중단하라” 경고
그러나 한국의 경상수지 흑자는 단지 환율 때문이 아닌 인구 변화 등 구조적 요인에 기인한다. 국민소득 결정식(소비+투자+정부 지출+수출=소비+저축+조세+수입)에서 정부가 균형예산을 편성한다면 저축과 투자의 차이는 수출과 수입의 차이와 같게 된다. 즉, 저축이 투자보다 많으면 수출이 수입을 넘어 무역(경상)수지가 흑자를 이루게 된다. 실제로 1998년 이후 한국의 저축률이 투자율보다 높아졌고 경상수지가 지속적으로 흑자를 내고 있다. 특히 2014년에는 총저축률이 34.7%로 국내 총투자율(29.0%)을 훨씬 넘어섰고 경상수지 흑자 폭이 사상 최대로 확대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저축률이 투자율을 초과할까. 우선 인구구조 측면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중·장년층(30~59세) 인구 비중이 높아질 때 저축률은 올라간다. 왜냐하면 이들이 직장에 다니면서 돈을 버는데 다 소비하지 않고 노후를 대비해 저축을 늘리기 때문이다. 한국의 중·장년층 인구 비중은 1990년 36%, 2000년 42%에서 2015년 48%까지 높아졌다. 2020년 이후에는 이 인구 비중이 낮아지겠지만 그 이전까지는 높은 수준을 유지할 전망이다.

중·장년층 인구 비중이 높아진 것과 달리 유·청년층(29세 이하) 인구 비중은 계속 낮아지고 있다. 예를 들면 유·청년층 비중이 1990년에 56%였지만 2000년 45%, 2015년 34%로 크게 낮아졌다. 이들이 낮아지면서 교육이나 주택에 대한 투자가 상대적으로 감소한 것이다.

한편 가계의 소비 심리 위축과 기업의 투자 부진도 저축률과 투자율의 차이를 확대하고 있다. 1%대의 매우 낮은 예금 금리와 함께 주식과 부동산 가격의 조정으로 가계 자산이 크게 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한국 경제가 구조적으로 저성장으로 가면서 고용도 불안해지고 있다.

2011년에 3.4%까지 떨어졌던 가계 순저축률이 지난해 6.1%에 이르러 2004년(7.4%) 이후 10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한 것이 그 증거다.

다른 한편으로는 지난해 말 현재 504조 원에 이르는 현금성 자산을 보유하고 있는 기업도 투자를 크게 늘리지 않고 있다. 1997년 경제 위기 직전에 GDP의 14%까지 올라갔던 설비투자가 최근에는 9% 안팎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 경제의 잠재성장률이 3% 안팎으로 떨어진데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기업이 투자를 미루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의 투자 위축은 다시 잠재성장률을 낮추고 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중·장년층의 인구 비중의 증가와 가계 소비 및 기업 투자 심리 위축으로 앞으로도 5년 정도는 저축률이 투자율을 넘어설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대폭의 경상수지 흑자 추세는 지속될 것이다. 한국은행은 올해 경상수지 흑자가 960억 달러로 사상 최고치를 경신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원·달러 환율 내리지 않는 진짜 이유
이론적으로 경상수지가 흑자가 나면 원화 가치는 상승(원·달러 환율이 하락)해야 한다. 경상수지 흑자로 달러가 국내 외환시장에 공급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달러 환율은 최근 3년 동안 1050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올 들어서는 경상수지 흑자 규모가 확대되고 있는 데도 원·달러 환율이 1100원을 넘어설 정도로 오르고 있다. 그 이유는 근본적으로 한국의 금융 계정 적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지난 한 해 금융 계정에서 904억 달러의 적자가 났다. 경상수지 흑자(892억 달러)로 들어온 달러보다 직접 투자(-207억 달러)나 증권 투자(-336억 달러) 등으로 나간 자금이 더 많았다.


저금리 등으로 해외투자 봇물
돈이 이처럼 빠져나간 이유는 한국의 저금리와 주식시장의 장기적인 조정에 있다. 최근 국채(3년) 수익률이 1.7%로 떨어져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고 주가(코스피)도 사상 최고치였던 2011년의 2230을 넘어서지 못했다. 적정 수익률을 얻기 위해 해외투자를 늘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현재 국민연금이 그 역할을 부분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국민연금은 해외 금융자산 투자, 특히 주식 투자를 크게 늘리고 있다. 2014년 말 국민연금은 해외 주식에 57조 원을 투자했는데, 이는 총운용 자산의 12%에 해당한다. 2005년과 2010년에 각각 0.4%와 6.2%였던 것을 고려하면 국민연금의 해외 주식 투자가 얼마나 빨리 증가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경상수지 흑자로 들어온 달러가 금융 계정을 통해 더 많이 나가기 때문에 대규모 경상수지 흑자에도 불구하고 원화 가치가 상승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원화 가치는 엔이나 유로화에 비해 크게 상승하고 있다. 2008년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 위기를 겪으면서 선진국들이 이른바 환율 전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환율 전쟁은 미국이 먼저 시작했다. 2008년에 금융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미국은 연방기금 금리를 5.25%에서 0~0.25%로 인하했고 이도 모자라 비전통적 통화정책인 양적 완화를 통해 3조 달러가 넘는 천문학적인 돈을 찍어냈다. 이에 따라 달러 가치가 떨어지고 미국의 수출이 늘면서 경제 회복에 기여했다. 특히 이 기간에 일본 엔화 가치가 급등했는데 2007년 말 122엔이었던 엔·달러 환율이 2011년에는 77엔까지 떨어졌다. 이는 일본 경제의 디플레이션 압력을 더 심화시켰다. 물가 상승을 유도하기 위해 일본도 2012년 이후 양적 완화를 통해 대규모로 돈을 풀었다. 일본 중앙은행은 2013년 본원통화를 48% 늘린 데 이어 2014년에도 37%나 증가시켰다. 이에 따라 엔·달러 환율이 77엔에서 최근에는 120엔에 이르고 있다.
원·달러 환율 내리지 않는 진짜 이유
2015년 들어서는 유럽중앙은행(ECB)이 환율 전쟁에 가담하고 있다. ECB는 올해 3월부터 매월 600억 유로씩, 내년 9월까지 총 1조1400억 유로를 공급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올 들어 유로 가치가 달러에 비해 큰 폭으로 하락하고 있다. 2009년 1.5134달러까지 올라갔던 유로 환율이 올해 3월에는 1.0496달러까지 떨어졌다. 이 기간에 유로 가치가 31%나 하락한 셈이다.

선진국 환율 전쟁 가운데 한국의 원화 가치는 엔이나 유로에 비해 큰 폭으로 상승했다. 이는 한국 수출 상품의 가격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있다. 한국의 자동차·석유화학·전자 등 주요 제품이 세계시장에서 일본과 경합 관계가 매우 높은데, 한국의 원화 가치가 최근 3년 5개월 사이에 일본 엔화에 비해 40%나 올랐다. 엔화 가치 하락은 2년 정도 시차를 두고 한국 수출에 부정적 영향을 줬는데, 올 들어 한국의 수출이 감소세를 이어 가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기 있는 것이다.

미국 재무부는 한국의 경상수지 흑자 원인이 저금리와 인구구조 등 구조적 변화에 있고 또한 엔이나 유로 가치 하락 때문에 대규모 경상수지 흑자에도 불구하고 원·달러 환율이 떨어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할 것이다.


김영익 서강대 경제대학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