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아·남아용 구분해 성 역할 굳어져…소비자, 유통 업체 압박 나서

장난감의 성별 중립성을 강조하는 곳은 영국이다. 젊은 부모들이 주축이 된 온라인 시민 단체 ‘렛토이즈비토이즈’, ‘핑크스팅스’ 등의 활약 덕분이다. ‘장난감을 장난감답게’, ‘악취 나는 분홍색’ 등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단체들은 여아와 남아용으로 구분해 상품을 파는 완구 업계의 전통적인 마케팅 방식에 반기를 든다. 이들은 왜 여자아이들에겐 장난감 오븐과 핑크색 화장대를 권하고 남자아이들에겐 슈퍼 히어로 옷과 과학 상자를 파느냐고 묻는다. 영국의 소비자들은 놀이 문화에서조차 보수적인 성 역할을 강조하다 보면 아이들의 사고가 제한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슈퍼 히어로 시계에서 ‘소년용’ 문구 없애
시민 단체들은 페이스북·트위터 등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를 통해 성차별적인 장난감을 판매하는 완구 업체나 유통 업체들을 지속적으로 노출시키고 있다.
블랙리스트에 오른 업체들은 소비자들의 부정적인 여론을 의식해 성별 라벨을 신속하게 제거하겠다고 대응했다. 렛토이즈비토이즈에 따르면 현재까지 14곳의 주요 소매 유통 업체와 8개의 출판사들이 매장 선반이나 장난감 포장지 등에 성별 표시를 지운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지난해 연말 테스코는 슈퍼 히어로가 그려진 시계의 포장지에 소년용이라고 쓴 문구를 없앴다. 일곱 살짜리 소녀 매기의 사진 한 장 때문이었다.
평소 영웅 캐릭터·용·기사에 관심이 많던 매기는 테스코 장난감 매장에서 ‘소년을 위한 선물’이라는 문구가 적힌 슈퍼 히어로 시계를 보자마자 화가 났고 아이의 엄마가 이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트위터에 남기면서 큰 화제를 모으게 됐다. 여론이 악화되자 테스코 측은 즉각 사과하며 성별이 적힌 문구를 삭제하겠다고 말했다.
몇 해 전 세인즈버리도 여자용으론 간호사 옷, 남자용으로는 의사 옷을 판매하다가 핑크스팅스의 강력한 항의에 성별 라벨을 없앴다. 백화점 데븐햄스도 고객들을 의식해 영국 내 모든 장난감 매장에서 성별 표시를 없애기로 했다.
이처럼 달라진 소비자들의 태도에 업체들도 발맞추고 있다. 카탈로그 광고에 경찰관 옷을 입은 여자아이, 인형 놀이를 하는 남자아이 사진을 넣고 ‘엄마처럼 예쁘게’ ‘아빠처럼 스마트하게’라는 식의 문구를 자제하는 식이다.
영국 못지않게 ‘성차별 없는 장난감’에 관심이 많은 곳은 스웨덴이다. 올해부터 스웨덴어 공식 사전에 남자나 여자가 아닌 중립적 인칭대명사인 ‘헨(hen)’을 추가하기로 할 정도로 젠더 이슈에 관심이 많은 스웨덴에선 포장지에 성별 표시를 없앤 장난감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대형 완구 체인 토이저러스(Toys R Us) 스톡홀름점은 2013년부터 매장 내에서 성별을 나누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 업체는 자체적으로 포장지를 바꾸고 전국 매장에 성 중립 정책을 확산시키고 있다. 이 장난감 매장에는 주방놀이 세트와 기차놀이 세트가 나란히 붙어 있고 장난감 유모차와 놀이용 총을 한곳에 둔다.
여자용은 분홍색, 남자용은 파란색으로 구분하지도 않는다. 업체 관계자는 아이들 스스로 취향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고 말한다. 업계 전문가들은 향후 키즈 비즈니스에서 중성 아이템이 마케팅의 중요한 소재가 될 것이라고 내다본다.
헤이그(네덜란드)=김민주 객원기자 vitamj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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