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직격탄 맞은 장기신용은행 합병…인재 유출로 시너지 ‘물거품’

‘기업금융의 강자’ 삼킨 국민은행
소매 금융의 강자로 불리는 국민은행도 한때 기업금융의 강자로 떠오를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었던 때가 있었다. 1998년 한국장기신용은행과의 합병이 성사됐을 때다. 장기신용은행은 1998년 외환위기 이후 은행에 입행한 이들이라면 알기 힘들 수도 있는 이름이지만 한때는 금융권 최고의 직장으로 불리던 은행이었다. 한국에선 드물게 기업금융의 강자로 불리며 기업들을 위한 장기자금 조달을 담당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국민은행은 장기신용은행과의 합병 시너지를 제대로 내지 못했다는 분석이다. 합병 당시 장기신용은행의 우수 인력들이 대거 빠져나가서다. 그때 인력들을 잘 활용했다면 지금 은행권의 판도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기업금융의 강자로 불리는 우리은행과 외환은행을 제치고 국민은행이 기업금융과 개인 금융을 모두 휩쓸 수 있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개발 시대, 기대 속에서 탄생
장기신용은행은 장기(長期) 기업 대출을 주력으로 하던 금융회사다. 1967년 4월 20일 발족된 한국개발금융회사(KDFC:Korea Development Finance Corporation)를 전신으로 한다. 특이한 점은 한국 최초의 민간 개발 금융회사였다는 점이다.

정부의 도움 없이 어떻게 장기 기업 대출이 가능한 은행이 민간에서 탄생할 수 있었을까. 한국개발금융회사가 세워지기 전에도 기업들이 장기로 돈을 빌릴 수 있는 곳은 있었다. 1954년에 세워져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산업은행이다. 하지만 1962년부터 시작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으로 기업들이 급성장하기 시작하면서 산업은행이 크게 늘어난 자금 수요를 모두 감당하지 못했다.

경제 개발 계획을 실행에 옮길 자금부터 턱없이 부족했다. 일본의 식민 지배와 6·25전쟁으로 이미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에서 국민들로부터 산업자금을 조달하는 것은 꿈도 꾸기 힘들었다. 외자 유치도 힘들긴 마찬가지였다. 미국은 무상 원조를 받는 국가에 차관을 줄 수 없다는 방침을 갖고 있었다. 일본은 국교가 없는 나라와 차관 협정을 맺을 수 없다고 거부했다. 물론 일본의 도움을 받는 것에 대해 국민 여론도 결코 좋지 않았다.

당시의 자금 부족이 어느 정도 심각했는지는 1차 5개년 계획의 핵심 사업인 대한석유공사 울산정유공장을 짓는 데 외화가 없어 합작사인 미국 걸프오일에서 건설비를 빌려 와야 했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정부는 1차 5개년 계획 중 덜 급한 부문을 축소하거나 연기했다.

결국 정부는 산업은행으로는 5개년 계획을 실행에 옮기고 기업의 자금 수요를 감당하기에 부족하다고 판단, 국제기구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정부는 1965년 세계은행(IBRD)에 설립 지원을 요청했고 같은 해 세계은행·국제통화기금(IMF) 연차 총회에 대표단까지 파견했다. 당시 한국경제인협회(현 전국경제인연합회)에는 설립준비위원회까지 구성됐다. 결과적으로 1967년 설립 당시 자본금 500만 달러 가운데 305만 달러가 민간투자였고 105만 달러는 외국인 투자로 채워졌다. 김진형 씨가 초대 사장에 선임됐다.

금융권과 언론이 한국개발금융회사에 거는 기대는 대단했다. 1960년대 시중은행들은 실질적으로 국영 은행이었던 것에 비해 한국개발금융회사는 상법에 준거해 설립된 ‘민유민영(民有民營)’의 공개 주식회사여서다. 민간 경영의 자주성을 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당시에도 정부가 대주주로서 ‘관치금융’을 휘두르면 은행의 부실이 심화될 수 있고 합리적인 경영을 할 수가 없을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한국개발금융회사는 승승장구했다. 1969년 주식을 증권거래소에 상장했고 1971년 한국투자금융을, 1975년 한국개발리스를 각각 세웠다. 1979년 장기신용은행법이 제정되면서 이름을 한국장기신용은행으로 바꿨다. 1987년 장은경제연구소를, 1989년 장은투자자문을, 1997년 장은선물을 각각 세웠다.

장기신용은행의 주요 업무는 금융채 발행을 통해 기업에 중·장기 자금을 대출해 주는 것이었다. 예금으로 자금을 마련해 기업에 대출해 주던 당시 일반 은행과는 사업 구조가 차이가 있었다. 장기신용은행은 자기자본의 20배까지 채권을 발행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예금도 받았지만 주요 자금원은 채권을 발행해 이를 팔아 기업들에 장기 대출을 해줄 수 있었다.

기업금융 전문이었던 만큼 정부의 선택과 집중 정책으로 대기업들이 급성장하면서 장기은행도 함께 커갔다. 창립 20주년이던 1987년에는 ‘봉사하는 은행’, ‘내실 있는 은행’, ‘앞서가는 은행’이란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기업에 대한 단순한 자금 조달 창구가 아닌 민간 은행으로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던 셈이다. 1997년 창립 30주년을 맞은 ‘3년 뒤인 2000년에는 자산 43조1000억 원, 당기순이익 1900억 원을 실현, 양적·질적으로 경쟁력 1등 은행이 되겠다’는 의지를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다짐을 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아 외환위기가 닥쳤다.


서로 점찍은 최상의 파트너
1997년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기업들의 부실이 드러났다. 기업에 막대한 자금을 대출해 줬던 은행 등 금융권도 경영 위기에 빠졌다. 장기신용은행도 예외는 아니었다. 기업금융 전문이었던 만큼 외환위기의 직격탄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기업금융과 국제금융에 전문성을 가지고 있던 장기신용은행은 1998년 9월 소매 금융에 특화돼 있던 국민은행과의 합병을 발표했다. 외환위기 이후 셋째로 이뤄진 자발적인 은행 합병이었다. 두 은행의 합병으로 국민은행은 자산 총액 기준 98조 원의 국내 최대 은행으로 올라섰다. 합병 직전 장기신용은행은 직원 1015명, 총자산 36조5000억 원, 점포 45개를 보유하고 있었다.
‘기업금융의 강자’ 삼킨 국민은행
장기신용은행과 국민은행의 합병은 시장에서 예상한 것 이상으로 빠르게 진행됐다. 1998년 9월 9일 장기신용은행 관계자는 언론에 “국민은행과의 합병을 위한 협의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다만 “합병 논의가 현재 시작 단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실제 협상은 급진전됐다. 이 같은 보도가 나온 지 사흘 만인 9월 11일 두 은행은 1999년 1월 새로운 은행으로 공식 출범한다고 합병을 선언했다. 국민은행과 장기신용은행은 이날 오전 10시 은행연합회에서 송달호 국민은행장과 오세종 장기신용은행장이 합병 양해각서(MOU)를 교환하고 “세계적 초우량 은행의 탄생을 바라는 국민적 열망에 부응하고 세계 초일류 은행과 겨룰 수 있는 명실상부한 한국 최고의 은행을 만들기 위해 자발적 합병을 결의했다”고 발표했다.

두 은행의 합병은 ‘상업·한일은행’과 ‘하나·보람은행’에 이어 셋째 은행 간 자발적인 합병이었다. 자산 기준으로 국민은행은 60조4914억 원, 장기신용은행은 36조4555억 원이었다. 합병되면서 총자산이 96조9469억 원에 달해 ‘상업·한일은행’에 이어 자산 규모 2위의 초대형 은행으로 재탄생했다.

두 은행은 합병으로 상당한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국민은행은 가계금융 부문에서 독보적 지위를 유지하면서 안정적인 수익을 얻고 있었다. 외환위기를 다른 은행들에 비해 비교적 잘 피해 갈 수 있었던 것도 가계금융에 치중해 있어서였다. 이에 비해 장기신용은행은 기업금융 부문에서 다른 은행에 비해 상대적으로 앞서 있었다. 당시 두 은행은 합병 이유로 국민은행의 가계금융과 장기신용은행의 기업금융을 합칠 경우 상호 보완 측면에서 시너지 효과가 클 것이라는 점을 꼽았다. 국민은행 관계자는 “두 은행은 외환위기 당시에도 외자 유치를 통한 독자 생존을 추구한다고 밝히면서도 만일 합병하게 된다면 가장 알맞은 파트너로 서로를 내심 꼽고 있었다”고 전했다.


시련 맞은 장기신용은행 출신들
하지만 기대는 현실화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장기신용은행 출신들이 상당수 국민은행을 떠나서였다. 장기신용은행은 한국 금융계에서 기업금융과 국제금융의 선두 주자였던 만큼 당시로서는 드물게 임직원의 상당수가 해외 유명 MBA나 국내 명문대 출신이었다. 대부분이 서울대를 졸업했고 일부가 연세대와 고려대를 나온 정도였다. 연봉과 복리후생 수준도 높아 대학생들이 가장 입사하고 싶은 직장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문제는 장기신용은행 출신들이 여러 여건상 국민은행에 남아 있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우선 ‘장기신용은행 출신’이라는 자부심에 일반 가계금융에 집중한 국민은행에 남아 있기를 거부한 이들이 있었다. 이 때문에 최근까지도 국내 투자금융 업계엔 장기신용은행 출신의 인재들이 상당수 포진해 있다.

장기신용은행 출신 중 일부는 합병 이후 직장 내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국민은행을 떠난 것으로 알려진다. 조직적 열세를 버티지 못한 것이다. 국민은행과 장기신용은행의 합병 은행 이름이 ‘국민은행’으로 결정됐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실제로 국민은행에 남았던 장기신용은행 출신들은 이후 국민은행과 주택은행과의 합병 이후 두 은행 출신 간의 세력 다툼에 끼여 두각을 나타내기가 어려웠다. 지금까지도 여전히 국민·주택은행 출신 간의 갈등은 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인사철마다 “주택은행 출신이 요직을 다 차지했다”, “국민은행 출신이 은행 전체를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식의 소문들이 돌아다니고 있다.

이 때문에 장기신용은행의 인재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국민은행 경영진의 역량이 국민은행과 주택은행 간의 자연스러운 융합을 이끌어 내지 못한 데서도 여실히 드러났다는 평가다. 국내 자산 규모 1위 은행임에도 불구하고 당기순이익 면에서 신한은행에 계속 뒤지는 것은 이 같은 조직 융합의 문제가 아직까지도 남아 있어서라는 지적이다. 본연의 업무보다 각 은행 출신 간의 사내 정치가 조직의 결속에 방해가 된다는 분석이다.

국민은행의 다른 관계자는 “이미 장기신용은행을 포용하지 못한 것부터가 국민·주택은행 간의 합병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조였을지도 모른다”며 “소매 금융에 치중하던 국민은행으로선 거대 은행 간의 합병 작업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들어선 국민은행도 장기신용은행 출신들을 주요 보직에 기용하기 시작했다. 국민·주택은행 합병 이후 1채널로 불린 국민은행 출신과 2채널로 불린 주택은행 출신 간의 고질적인 갈등에서 장기신용은행 출신들이 비교적 자유롭다는 판단에서다. 노조 측에서도 장기신용은행 출신들에 대한 인사 불만은 적은 편이다.

더욱 다행인 것은 장기신용은행·국민은행·주택은행 등의 출신에서 자유로운 통합 기수(2001년 이후 입행)들이 최근 차장급으로 승진하면서 국민은행 경영진에 오를 날도 머지않았다는 점이다. 인사에서 실력이 아닌 출신 성분을 따질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박신영 한국경제 금융부 기자 m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