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기 사장 임명 두 달간 이유 없이 지연…수주량·주가 동시 하락
정성립 STX조선 사장이 대우조선해양의 차기 사장으로 내정됐다. 이에 따라 유례없는 최고경영자(CEO) 공백 상태가 두 달여 만에 해소됐지만 CEO 선임 과정에서 불거진 혼란은 고스란히 기업의 실적 부진과 주가 하락으로 이어졌다. 최대 주주인 KDB산업은행이 내놓은 정성립 사장 카드도 ‘외부 인사 절대 불가’를 외치며 파업도 불사하겠다는 노조의 벽부터 넘어서야 한다. 대우조선은 과연 CEO 리스크를 넘어 글로벌 경쟁력 1위의 위상을 되찾을 수 있을까.
조선 업계의 특성상 CEO 인선 문제는 단순히 경영진 교체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말이다. 수천억 원, 크게는 조 단위의 빅딜이 기본인 계약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해당 기업의 지속 가능성과 안정성이기 때문이다. 누가 CEO가 될지 모르거나 아예 CEO가 부재한 기업에 선박 건조를 맡기는 선주는 없다. 그런 면에서 CEO 인선을 두 달이나 미룬 산은의 처사는 납득하기 어렵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었다.
최대 주주 산업은행의 어이없는 행보
산은은 지난 4월 6일 정성립 STX조선 사장을 신임 대우조선 사장으로 추천했다고 발표했다. 산은의 계획대로라면 4월 10일 임시 이사회를 거쳐 5월 말 주주총회를 통해 최종 승인을 받게 된다. 이에 따라 유례없이 두 달간의 ‘시한부’ 사장을 맡았던 고재호 현 사장도 자리에서 물러날 전망이다.
정성립 내정자는 1981년 당시 대우조선공업에 입사해 2006년에 회사를 떠나기까지 25년간 일해 온 정통 대우맨이다. 입사 후 15년간 영업 부문에서만 일한 정 내정자는 유럽 지사장 등을 거치며 대형 거래처를 뚫는 데 공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사장에 취임한 2001년에는 대우조선의 워크아웃 졸업을 이끌어 내며 경영자로서의 능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정 내정자는 대우조선을 떠난 후 2012년까지 대우정보시스템 회장을 맡으며 조선 업계를 떠났다. 하지만 2013년 12월 워크아웃 상태인 STX조선 사장으로 부임하며 다시 업계에 컴백했다. 정 내정자를 STX조선 위기 탈출의 구원투수로 낙점한 것도 산은이었다. STX조선의 최대 주주 역시 산은이다.
산은의 이번 정 사장 카드는 차기 사장 선임에 외부 출신 인사를 반대하는 노조의 요구를 무마하는 동시에 업황 위기를 돌파할 적임자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산은은 “대우조선의 기업 문화를 잘 이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경영 혁신 및 조직 쇄신 의지를 가지고 대우조선의 체질을 개선할 수 있는 전문 경영인”이라며 추천 배경을 설명했다.

대우조선 노조는 후임 CEO 선임 이야기가 퍼지던 올 1월부터 줄곧 낙하산 사장 임명과 정치권 개입 금지를 요구해 왔다. 노조는 정 사장 내정이 알려진 4월 7일 성명을 통해 “정치권 눈치 보기로 직무를 유기하면서 대우조선을 좌초의 위기로 내몰았던 산은이 벼락치기로 외부 인사인 정성립 전 사장을 추천하면서 대우조선을 파국으로 내몰고 있다”며 “노조가 외부 인사라고 규정한 정 전 사장 추천이라는 강수를 둔 것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고 밝혔다.
노조가 정 사장 내정에 강력히 반대하는 이유는 외부 인사라는 점이다. 아무리 대우조선 출신이라고 하더라도 10년 이상 회사를 떠나 있던 사람을 내부 인사로 볼 수 없다는 얘기다. 노조는 또 외부 인사가 사장으로 선임될 경우 대대적인 혁신 작업의 일환으로 인적 구조조정에 나설 것이란 의심을 거둬들이지 않고 있다. 실제로 경쟁사인 현대중공업은 권오갑 사장이 새로 부임한 이후 올 초 과장급 이상 사무직 직원 1500명을 대상으로 희망퇴직 신청을 받았다. 이어 3월에는 15년 이상 장기근속한 고졸·전문대졸 여사원 579명을 대상으로 희망퇴직 신청을 진행했다. 현대중공업 노조는 이를 사실상의 구조조정으로 규정하고 강력히 반발하며 권 사장과 관련 경영진을 검찰에 고소까지 한 상태다.
대우조선 노조 역시 “대우조선 매각을 앞두고 산은의 충실한 대변인 역할에 적합한 사람을 선정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경쟁 업체의 사장이 곧장 자리를 바꿔 타는 것도 유례가 없는 일이다. 정 내정자는 현재 STX조선의 사장으로, 모그룹의 부도로 워크아웃에 들어간 STX조선을 정상화하기 위한 채권단(산은)의 결정으로 사장에 선임됐다.
일각에선 이러한 갈등을 산은이 자초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CEO 공백 상태를 일으킨 주역이 바로 산은이기 때문이다. 대우조선 사장의 임기는 3년이다. 통상 임기가 끝나는 해의 2월에 새로운 사장을 선임하거나 기존 사장이 연임하는 식으로 인선이 이뤄져 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고재호 사장의 임기를 두 달만 연장하는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신임 사장 인선이 미뤄졌다.
사장 선임 논란은 당장 기업의 실적 악화로 이어졌다. 경쟁사인 삼성중공업은 올 1분기에 컨테이너선·유조선·액화천연가스(LNG)선 등 총 18척을 새로 수주했다. 특히 지난 3월 2일에는 홍콩 OOCL사로부터 2만1100TEU(1TEU는 20피트짜리 컨테이너 1대분)급의 초대형 컨테이너선 6척을 9억5000만 달러에 수주하는 등 국내 조선 빅 3 중 신규 수주에서 가장 앞선 상태다. 이에 비해 대우조선의 올 1분기 신규 수주액은 컨테이너선과 LNG선 등을 합쳐 8척에 그치고 있다.
그나마 2월부터는 단 1척의 신규 수주도 없는 상태다. 한 회사 관계자는 “한 척에 1조 원짜리 배를 만드는데, 사장도 없는 회사와 누가 사인하려고 하겠느냐”며 수주 실적 부진의 원인을 CEO 선임 문제에서 찾았다.
2월 이후 신규 수주량 ‘제로’
대우조선의 CEO 인선과 관련한 잡음은 개인의 경영 능력이나 성향보다 구조적인 문제점에서 출발한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국책은행인 산은이 대주주이다 보니 정부나 정치권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통상 대우조선 사장 선임은 산은 관계자와 사외 이사 등으로 구성된 사장추천위원회의 추천을 거쳐 왔다. 고 사장도 이런 과정을 거쳐 임명됐는데, 이번 정 사장 내정 과정에선 따로 사장추천위가 열리지 않았다. 이에 대해 산은은 “사장추천위가 법적으로 규정된 사안은 아니다”면서 “정 사장 내정은 은행 내 담당 부서인 기업금융4실이 주도했다”고 밝혔다.
정부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보니 산은 차원을 넘어 ‘윗선’의 의중을 살피느라 인선이 늦어졌다는 얘기도 나온다. 이번 정부 들어 공공 기관장 인선이 제때 이뤄지지 않으며 속출하고 있는 업무 공백 사태가 대우조선 사장 임명 과정에서도 재현됐다는 뜻이다. 실제로 고 사장은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12년 4월 사장에 임명된 후 이번에 연임에 도전했다가 결국 낙마하고 말았다.

CEO 인선이 안갯속에 싸이자 내부 조직 관리나 업무 기강이 흔들리는 것은 당연했다. 한 직원은 “최근 몇 달간 모든 직원의 하루 시작이 스마트폰으로 ‘대우조선 사장’을 검색해 보는 것이었다”며 “조직 기강이 잡힐 리가 없다”고 털어놓았다.
신임 사장 인선에 대한 노조의 극렬한 반발도 사실상 처음 있는 일이다. 그동안 단 한 번도 내부 인사 발탁이라는 전례가 깨지지 않고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노조 핵심 관계자는 올 초 산은을 항의 차 방문했을 때 “적절한 내부 인사가 없고 사장 후보군 간에 잡음이 끊이지 않아 부득이하게 외부 인사를 영입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고 밝혔다.
실제로 회사 내부의 차기 사장 후보들 간에 회사 의전 차량의 개인 용도 사용 고발, 술자리 접대와 관련된 투서 같은 이전투구가 없지 않았다는 게 회사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후보들 간의 경쟁이 특별히 이번 선임 과정에서만 불거진 것은 아니었고 사장 선임이 완료되면 웬만한 갈등은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게 통상 벌어진 일이었다는 게 관계자들의 말이다.

경영 공백 5월 말까지 이어질 듯
회사 안팎에서 의아해 하는 것도 이 부분이다. 두 달 후면 스스로도 옷을 벗어야 할 사람이 독단적으로 제 손에 피를 묻혔다고 보는 것은 무리라는 평가다. 차기 CEO가 할 일을 굳이 퇴임 두 달을 앞둔 사장이 전격 단행한 것은 인사권자인 산은과의 교감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게 노조의 주장이다. CEO 공백 기간이 늘어나면서 후보자 간 경쟁이 격화될 수밖에 없었고 이를 계기로 내부 인사의 사장 임명이 부적절하다는 명분 쌓기가 가능했다는 주장이다.
현재 대우조선 노조 측은 “그동안 거론됐던 내부 인사가 왜 적합한 인물이 아닌지, 또 정 사장을 추천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 등에 대한 해명을 산은에 요구한 상태다.
산은의 이중적 태도도 노조 측의 반발을 불러 왔다. 정 내정자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사장 내정 사실을 열흘 전쯤 알았다”고 밝힌 바 있다. 정 사장 내정이 처음 보도를 통해 알려진 것은 4월 6일이다. 정 내정자가 열흘 전에 통보받은 게 사실이라면 노조가 차기 사장 선임을 조속히 마무리해 달라며 상경 투쟁을 벌였던 3월 31일 전에 이미 차기 사장 인선이 마무리됐었다는 뜻이 된다.
대우조선은 지난해 매출 16조 원을 달성했다. 글로벌 조선 업계가 극심한 불황에 시달리는 와중에 거둔 의미 있는 실적이다. 하지만 차기 CEO 선임이 명확한 이유도 없이 두 달이나 미뤄지면서 기업이 떠안은 손실이 이미 적지 않다. 수주량 급감은 물론 지난 2월 9일 대우조선 사장에 대한 교체 검토가 언론에 보도된 이후 약 두 달 동안 주가도 10% 이상 빠졌다. 일반적으로 조선사의 신규 수주는 3월부터 본격화된다. 정 내정자의 취임이 무리 없이 진행된다고 하더라도 공식 임기가 시작되는 5월 말까지는 경영 공백이 생길 수밖에 없는 처지다.
돋보기
정성립 사장, ‘위기 돌파’ 구원투수 될까

정 내정자가 대우조선 사장으로 처음 취임한 것은 2001년이다. 대우조선이 워크아웃을 졸업한 것도 바로 그해다. 한 회사 관계자는 “정 사장은 사장 취임 직전까지 경영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인사(노무) 부문을 맡았다”며 “워크아웃 졸업은 이전 경영진의 공도 컸다”고 말했다.
‘조직 구성원들과의 소통 능력이 좋다’는 일부 언론 보도에 대해 의문을 갖는 이도 있었다. 사장 재임 기간에 노조와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 악화된 경험 때문이었다. 노조 핵심 관계자는 “당시 집행부가 인력팀 사무실을 점거해 농성을 벌이는 등 분위기가 매우 험악했었고 노조위원장을 비롯해 조직실장·조직부장 등이 모두 구속되기까지 했다”고 밝혔다.
정 사장의 퇴임 과정도 경영 능력과는 거리가 먼 게 사실이다. 정 사장은 워크아웃 졸업의 공을 인정받아 연임에 성공했지만 임기를 1년여 앞둔 2006년 중도 퇴진했다.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주기 위해 용퇴에 나섰다”는 게 정 사장이 밝혔던 퇴임 이유다. 하지만 당시 대우조선은 2004년 608억 원의 영업이익이 2005년 들어 1240억 원의 적자로 돌아서는 등 극심한 실적 부진에 시달렸다. 사실상 경영 실적 악화에 따른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물러났다는 게 당시 업계의 평가였다.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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