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실 덜한 국민·주택이 대동·동남은행 떠안아…은행원 구조조정 칼바람

금융업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때 다른 은행보다 높은 연봉으로 각 금융회사의 인재들을 쓸어간 은행들이 줄줄이 외환위기 때 문을 닫았다. 높은 연봉을 바라보고 직장을 옮긴 은행원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곳이 대동은행과 동남은행이다.
대동은행과 동남은행은 모두 중소기업에 대한 금융 지원을 강화한다는 취지로 설립된 곳이다. 대동은행은 1989년 11월 대구·경북 지역 주민 및 상공인이 700억 원을 출자하고 은행 등 금융회사가 300억 원을 출자해 총 1000억 원의 자본금을 가지고 대구광역시에서 문을 열었다.
고액 연봉 믿고 신설 은행으로 대거 이동
동남은행도 같은 해 설립됐다. 부산광역시에 본점을 둔 은행으로, 제도 금융권에서 소외된 기업을 지원하고 낙후된 지방 중소기업을 육성한다는 게 설립 목적이었다.
이들 은행이 개점을 준비하면서 제일 먼저 한 일은 기존 은행의 인재들을 스카우트하는 일이었다. 아직 미래가 불확실한 은행이 인재들을 영입하기 위해선 유인책(?)이 필요했다. 그래서 내놓은 게 ‘승진’과 ‘높은 연봉’이었다. 기존 은행에서 일할 때보다 한 직급 승진시키고 그만큼 연봉도 높여 줬다.
실제 당시 5개 시중은행(조흥·상업·제일·한일·서울은행)은 동남은행과 대동은행이 설립된 1989년 한 해 동안 이직한 사람의 숫자가 3174명에 달했다. 전년의 1683명보다 85.3%가 늘어난 수치다. 한 은행의 임원은 “당시 왜 나는 대동은행이나 동남은행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오지 않는지 내심 서운하기도 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이들 은행의 설립 취지는 좋았지만 문제는 정치 논리가 상당히 강하게 작용했다는 점이었다. 대동은행과 동남은행 모두 1989년 노태우 정부의 ‘지방 소재 중소기업 전담 은행 설립 방안’에 따라 세워졌다. 하지만 당시 정치권 인사들이 영남 지방을 근거지로 한 은행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먹혀들어서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미 설립 초기부터 정치권의 입김에서 자유롭기 힘든 구조였다.
금융계의 고위 관계자는 “요즘은 은행장들은 거액 여신에 대한 심사를 하는 여신협의회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돼 있지만 과거에는 참여할 수 있었다”며 “정치권에서 은행장을 통해 외압을 넣던 시절이었다”고 말했다. 이렇다 보니 두 은행 모두 대출을 해주지 말아야 할 부실 기업에 돈을 빌려주는 사례가 늘었다는 분석이다.
부실한 여신 관리에 외환위기를 전후로 경기 침체가 겹치다 보니 이들 은행의 손실이 빠르게 늘어갔다. 무리한 영업도 많았다. 이 같은 상황에서 1997년 1월 불거진 한보 사태의 여파는 금융권도 피해 갈 수 없었다. 10대 재벌 중 하나였던 한보그룹을 시작으로 기아·대우·쌍용 등 30대 재벌 중 10곳 이상이 줄줄이 쓰러졌다. 대기업들의 부실은 이들의 협력 업체의 부실로 전이됐다. 돈을 빌려줬던 은행들도 직격탄을 맞았다.
1998년 6월 이헌재 당시 금융감독위원장은 대동·동남·동화·경기·충청은행 등 5개 은행을 퇴출시키겠다고 발표했다. 한국 금융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은행권에 인수·합병(M&A) 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했다. 특히 대동은행은 1998년 3월 말 현재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이 마이너스 8.88%로 5개 은행 중 최악이었다. 부채의 자산 초과 규모도 2942억 원으로 가장 컸다. 당시 부실 기업이었던 기아자동차에 530억 원, 한라에 320억 원이 물려 있었다.
정부의 숙제는 이들 부실 은행을 누구에게 떠안기느냐였다. 사실상 답은 정해져 있었다. 가계 대출을 위주로 영업해 왔던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은 상대적으로 이들보다 건실한 상황을 유지하고 있었다.
대동은행과 동남은행을 이들 은행에 인수시키는 길 외에는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정부 발표 이후 부실 은행에 대한 인수 작업이 신속하게 진행됐다. 1998년 6월 28일 오전 금융감독위원회는 당시 주택·국민·신한·한미·하나은행 등 퇴출 은행을 인수할 은행들을 비상소집했다. 이들 은행들은 전 직원이 출근해 인수팀으로부터 인수를 위한 사전 교육을 받고 현장 투입(?)을 준비했다.
인수 은행들은 긴급 이사회를 열었다. 피인수 은행의 자산과 부채 인수를 의결하는 한편 피인수 은행의 본점 전산실을 접수했다. 영업점 개점 시간 전에 인수할 은행의 본점 각 부서와 지점에 인수팀들이 들어가 인수 작업에 본격 착수했다. 동남은행에서 일했던 한 금융권 관계자는 “인수 당하는 은행들로선 점령군이 들어온 셈이었을 것”이라고 당시 상황을 돌아봤다.
법원 “퇴출 은행 고용 승계 의무 없다” 판결
주택은행도 정리 대상 은행인 동남은행에 파견할 직원 440명을 확정한 데 이어 이들을 대상으로 동남은행 부산 본점과 전산실, 각 지점을 접수하기 위한 최종 교육을 실시했다. 교육이 끝나는 대로 직원들을 파견, 늦어도 업무정지 발표 1시간 전에는 전산실 등 주요 부서를 장악(?) 한다는 게 주요 시나리오였다.
대동은행을 인수할 은행으로 결정된 국민은행은 팀장 40명에 대한 교육을 실시한데 이어 실무 인수팀 150명을 대상으로 대동은행 인수를 위한 최종 점검 작업을 벌였다.
이에 따라 1998년 주택은행은 동남은행을, 국민은행은 대동은행을 각각 자산·부채 이전(P&A) 인수 방식으로 사들였다. 인수 기업을 M&A하면 자산과 부채를 모두 승계해야 하지만 자산 부채 계약 이전을 하면 우량하다고 판단하는 자산과 부채만 인수할 수 있다.
문제는 P&A 방식으로 인수한 것이 이후 퇴출된 대동·동남은행 직원들의 고용 승계를 어렵게 했다는 점이다. 이들 은행이 인수된 지 2년이 지난 2000년 5월 법원이 퇴출된 동남은행 직원들의 고용 승계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판결을 내렸다. 당시 판결은 법원이 은행 퇴출 조치의 정당성을 인정한 것이어서 지금 진행 중인 2차 금융 구조조정에도 큰 영향을 줬다.
1998년 동남·대동은행을 비롯해 경기·충청은행에서 해고된 직원은 모두 5500여 명이었다. 이들은 ‘5개 퇴출 은행 공동투쟁위원회’를 조직, 소송을 비롯한 각종 투쟁을 벌였다. 이들이 고용 승계를 주장하는 근거는 1998년 당시 주택은행과 동남은행의 합병이 영업 조직 전체가 이전되는 ‘영업 양수도’에 해당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금융권은 외환위기 전에 비해 점포 수와 직원 수 면에서 상당수 줄어들었다. 대동·동화·동남·경기·충청 등 5개 군소 은행이 한꺼번에 퇴출당하면서 1997년 말 7643개인 은행 점포는 1998년 말 6662개로 981개(12.8%)가 감소했다. 당시 은행원도 11만4619명에서 7만 5604명으로 3만9015명(33.7%)이 줄어들었다. 당시 ‘치킨집 사장의 절반이 퇴출된 은행원’이라는 눈물겨운(?) 우스갯소리가 돌아다닌 것도 이처럼 은행원들이 대거 구조조정 대상이 됐기 때문이다.
‘예금 확보’에서 ‘대출 경쟁’으로
대거 구조조정이 있은 뒤 은행권에선 예전과 달라진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게 ‘실적 중심주의’의 대두다. 실적 중심주의는 외환위기 이후 본격 도입됐다. 핵심성과지표(KPI)가 대표적인 사례다. 예·적금, 대출 등으로 단순했던 성과 목표치 항목이 다양해지고 가중치도 달라졌다. 은행뿐만 아니라 증권사·보험사 등 금융권 전반에 실적 평가에 대한 강도가 세졌다.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은행 영업 패턴이 ‘예·적금 확보’에서 ‘대출 경쟁’으로 바뀐 것도 달라진 점이다. 이전에는 고객들의 재산을 형성하는 것과 은행원의 성과 목표가 일치했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에는 대출 자산을 늘릴수록 은행의 수익성이 확보돼 고객 이익과 배치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원금 보장이 안 되는 펀드를 팔아야 하는 것이 2008년 금융 위기 직전 고객과의 갈등 요인이 됐다.
은행원들의 인식이 ‘국내 경제 발전에 대한 기여’에서 ‘실적 올리기’로 무게중심이 옮겨 가면서 과거처럼 은행원이 책임을 지고 기업을 발굴하고 살리려는 의지도 약해졌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기업의 부실이 곧 은행의 부실로 이어지고 이때 정부도 은행을 책임질 수 없다는 것을 경험하고 나서다.
상공인들, 즉 기업인들이 은행을 가져선 안 된다는 고정관념도 생겼다. 2013년 경남은행 민영화 당시 경남·울산 지역 상공인이 중심이 된 경남은행 인수추진위원회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외환위기 당시의 잘못이 되풀이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기업체들이 대주주로 있다 보면 공격적인 대출 영업을 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해서다. 한 시중은행 임원은 “제조업체들은 무조건 영업을 많이 해 매출을 늘리는 게 좋지만 은행은 부실 관리도 함께 진행해야 한다”며 “기업인들이 은행 경영에 간섭하다 보면 리스크 관리보다 대출과 자산 경쟁에 힘쓸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국민은행은 대동은행을 인수하면서 자산 규모가 2위로 커졌다. 자산 규모가 54조4000억 원이었던 국민은행은 대동은행(7조7152억 원) 인수 후 자산 규모가 62조1000억 원대로 불어났다. 주택은행은 46조9529억 원의 기존 자산에 동남은행의 자산 10조555억 원을 인수하면서 57조 원으로 3위에 올랐다.
이런 변화는 남아 있는 은행들이 생존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다른 은행과의 합병을 추진하게 되는 뇌관 역할을 하게 됐다. 신한은행이 조흥은행을 인수하는 계기가 됐다는 분석도 있다.
당시 은행 구조조정은 어느 정도 마무리됐지만 이는 시작일 뿐이라는 시각도 지배적이었다. 거래 기업의 재무구조와 성장 가능성을 따져 여신을 결정할 수 있는 심사 전문가를 키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자본 확충과 함께 선진 금융 기법을 조기에 도입하지 않으면 개방화된 시장에서 경쟁력을 상실할 가능성이 높으므로 끝없는 자구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에도 이견이 없었다. 대동은행과 동남은행의 퇴출은 남은 은행들이 살아남기 위해 목숨을 건 경쟁을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
박신영 한국경제 금융부 기자 myuso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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