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력 회복해 ‘스타 기업’ 키우려면 지배 구조 개편 서둘러야

대기업의 위기는 곧 지배 구조의 위기와 같다. 저성장, 미·중·일 기업들 사이에 낀 삼중고, ‘땅콩 회항’ 사건으로 극명하게 드러난 반기업 정서, 후계 구도를 둘러싼 경영 능력 입증 등은 모두 국내 대기업의 지배 구조 개편 문제와 맞물려 있다. 핵심 역량과 미래 성장 가능성을 확보한 기업을 중심으로 한 사업 구조 재편, 지배 구조 개편을 통한 오너십 재정립 등이 현재 한국 대기업이 안고 있는 숙제다.
미중일 사이서 ‘트리플 넛크래커’
현재 한국 기업의 위기는 근본적인 문제점에서 출발한다. 바로 경쟁력 저하다. 최근 3년 사이 한국 기업들이 글로벌 경쟁에서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경제 전문지 포천이 선정한 글로벌 500대 기업에 포함된 한국과 중국의 기업은 2000년만 해도 각각 12개로 같았지만 현재는 17개와 100개로 따라잡기 힘든 수준까지 격차가 벌어졌다.
전 세계 시가총액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비중도 2.3%에서 1.9%로 하락했고 선진 시장에서는 3.5%에서 2.7%로 하락률이 더욱 두드러진다. 중국의 시가총액은 이미 한국의 2.6배에서 4.2배로 커졌고 미국은 15.1배에서 19.4배까지 늘었다. 신흥 시장에선 중국에 추월당하고 선진 시장에선 여전히 미국과 일본에 치이는 ‘트리플 넛크래커’ 형국이다.
금융 위기를 가장 빨리 극복했다는 평가를 받은 한국의 기업이 급속한 위기에 휩싸인 데는 혁신과 창조를 위한 기술 개발을 등한시한 내부적 요인이 크다. 선진국에선 이미 구경제가 돼버린 건설·조선·운송·철강·화학 같은 자본집약적 2차산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미 미국은 실리콘밸리로 상징되는 정보기술(IT)을 발판으로 기술집약적 2차산업과 3차산업에서 혁신적인 사업 모델을 만들어 가고 있다.
삼성전자와 함께 세계 스마트폰 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애플의 지난해 4분기 영업이익률은 32.5%를 기록했다. 금액으로는 26조 원에 달한다. 반면 삼성전자 IM사업부는 영업이익률 7.46%, 금액으로는 1조9600억 원을 기록했다. 금액만 놓고 보면 13배에 달한다.

국민연금의 운용 규모가 커지고 복지 수요가 커질수록 연금의 수익률을 감시하는 눈도 많아질 수밖에 없다. ‘식물 대주주’라는 비판의 목소리를 피하기 위해선 기업의 지배구조 개선 등 투명 경영을 적극적으로 요구할 가능성도 커진다. 최근 국민연금과 외국인 투자자들이 한목소리로 배당 확대를 요구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불투명한 지배 구조, 대주주 중심의 이사회 구성, 불합리한 의사 결정 과정 등이 계속된다면 이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커질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칼 아이칸 같은 외국계 기업 지배 구조 개선 펀드가 개입한다면 기업의 지배 구조 개선이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한 필수 조건이 될 수밖에 없다.
후계 작업에 나선 기업과 최고경영자(CEO)의 경영 능력 검증도 피할 수 없게 됐다. 한국은 소비 둔화로 2020년대에 이르면 마이너스 성장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생산가능인구(15~64세)는 2017년부터 2026년까지 10년간 6.84% 감소할 전망이다. 초고령사회로 접어든 일본보다 빠른 속도다. 저성장 기조가 고착화된 상황에선 기업의 생존을 위한 CEO의 역량이 더욱 중요해진다.
“경영권 승계, 투명 경영 실천에 달려”
어려운 여건에서 3~4세 경영자들이 경영 능력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성장에 대한 희망을 보여주고 강력한 리더십으로 이를 일궈 내는 것이다. 현재 한국의 기업은 유망 사업(‘스타’)이 공백 상태나 다름없어 위기감이 더욱 고조되고 있다. 기업의 경영 및 사업 포트폴리오 전략 수립에 널리 쓰이는 보스톤컨설팅그룹(BCG)의 BCG 매트릭스는 시장점유율과 성장률을 중시하는데, 사업 구조 개편을 판단할 때는 수익성도 함께 고려한다.
한국의 산업을 BCG 매트릭스에 따라 ‘수익성-성장성-시장점유율’로 나눠 분석하면 세 가지 지표가 모두 높은 스타 산업은 반도체·디스플레이·휴대전화 정도에 불과하다. 반대로 자본집약적 1차산업인 석유화학·조선·건설·기계·철강 등 중후장대하면서 수익성이 떨어지는 산업(‘도그’)이 여전히 우리 경제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최근 이들 산업에서 대규모 손실이 발생한 것은 중국 등 후발 주자의 추격은 물론 한국 기업끼리의 과당경쟁도 한몫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건설·해운·화학 등 수익성과 성장성이 모두 떨어지는 산업은 구조조정을 통해 수익성을 높여 ‘캐시카우’가 되도록 유지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또 이런 산업에 낭비되는 자원을 당장은 수익성과 시장점유율이 낮지만 성장성이 높은 산업(‘문제아’)에 집중적으로 투자할 것을 주문한다. 이를 위해선 기업의 지배 구조 개편 문제가 조속히 정리되면서 기업 경쟁력 확보에 전력을 다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 포천이 선정한 글로벌 500대 기업 가운데 한국 기업이 진출한 업종은 전체 50개 가운데 10개뿐이다.
반기업 정서의 고조도 지배 구조 개선과 맞물린 숙제다. ‘땅콩 회항’ 사건에서 드러나듯이 대중의 외면이 기업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시대가 됐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와는 거리가 먼 일부 3~4세대들에 대한 반감은 비단 특정 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라 후계 작업에 직면한 한국 기업 모두가 풀어야 할 숙제라는 지적이다.
국내 대부분의 대기업들은 2~4세대로 경영권 이양을 진행 중이거나 앞두고 있다. 해외 기업들의 사례에서 보듯이 기업의 역사가 오래될수록 오너 일가의 지분과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은 필연이다. 그동안 순환출자와 일감 몰아주기 등을 통해 대주주 중심의 경영 체제를 유지해 왔던 우리 기업도 이제는 변화가 불가피하다는 게 시장의 분석이다.
강성부 LK투자파트너스 대표는 “성공적인 경영권 승계는 투명 경영의 실천에 달려 있다”며 “결국 지주회사 전환 등 지배 구조 변화가 뒤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국내법상 지주회사는 체제는 금산 분리 원칙을 적용받고 순환출자가 금지돼 있다. 또 적은 지분으로 계열사를 장악한 지금의 체제보다 대주주 소유 지분을 지주사에 집중해 지분과 지배력을 동시에 늘리는 게 더 합리적인 방안이라는 설명이다.
한국의 대표적 기업집단인 삼성그룹·롯데그룹·현대중공업·현대자동차그룹·한화그룹 등은 모두 후계 구도 확립 작업이 한창 진행되는 기업들이자 지주사 전환이 아직 이뤄지지 않은 곳들이다. 경영 투명성 확보와 후계자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2015년을 한국 기업 지배 구조 개혁의 원년으로 보는 이유다.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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