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실의 ‘노예’에서 ‘실권자’로…역사적 영웅 중 환관 출신 많아
침팬지들은 싸울 때 무척 잔인해진다. 내부 권력투쟁 때도 그렇지만 외부 집단과 전투를 할 때는 더하다. 집단 린치가 무자비한 살상으로 이어진다. 영장류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이때 침팬지는 상대방을 동종의 유인원이 아니라 먹이로 보는 것 같다고 한다. 상대의 손발을 공격하고 음낭을 공격한다. 영아 살해, 즉 자신과 교미한 적이 없는 암컷의 새끼를 죽이는 일도 벌어진다. 사지를 찢고 신체 기관을 물어뜯는다. 상처에서 뿜어 나오는 피를 마시기도 한다.상대의 음낭을 공격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도록 하거나 영아를 살해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일은 침팬지 사회에서만이 아니라 인간 사회에서도 흔히 일어났다. 생식기능을 없애 대를 잇지 못하도록 하는 형벌을 궁형(宮刑)이라고 했다. 대역죄인은 삼족 혹은 구족을 멸하는 일도 허다했다. 영아 살해 역시 신화나 ‘성경’에만 나오는 일은 아니었다.
고독 이기지 못해 결혼했던 환관들
우리는 사마천이 한무제의 노여움을 사서 궁형에 처해졌고 절치부심 끝에 ‘사기(史記)’라는 불세출의 저작을 남겼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그가 원래 사형을 언도받았지만 궁형을 자청하면 감형되는 법률을 활용해 목숨을 부지하게 된 사연은 잘 모른다.
또 옛날 환관들이 결혼해 가정을 꾸린 것은 알지만 그 이유는 잘 모른다. 그들은 개인적으로는 처절한 고독을 견디기 힘들어, 사회적으로는 사람들의 멸시를 피하기 위해 결혼했다. 명대에 들어서도 태조 주원장이 환관의 결혼을 금했지만 그때뿐, 세월이 흐르면서 흐지부지됐다.
최초의 환관은 전쟁 포로였다. 중국 은나라 시절 포로로 잡혀 온 소수민족 강족(羌族)을 강제로 거세해 부역을 시킨 것이 환관의 시초다. 나중에는 전쟁 포로가 아니라 일반 죄인들을 궁형에 처한 뒤 궁중으로 보내 노역을 시켰다고 한다. 그러다가 세상이 바뀌면서 환관이 되는 이유도, 되고 난 후의 사회적 신분에도 변화가 생겼다.
초기와 달리 나중에는 사회 최하층민들이 그야말로 먹고살기 위해 환관이 되기를 자청했다. 환관의 숫자도 급증해 당나라 시절 5000명이던 환관이 명나라 때는 10만 명을 훌쩍 넘었다. 명나라 말기에는 환관 3000명을 뽑는데 2만 명이 지원했을 정도다. 가히 ‘생계형 환관’이라고 할만하다. 먹고살기 위해 생식기능을 포기한 것이다. 프로이트주의자들의 주장이 무색해진다.
지위에도 변화가 생겼다. ‘황제의 노예’에 불과했던 환관들이 ‘황제의 수족’이 되더니 어느새 ‘황실의 실권자’로 변신했다. 한나라·당나라·명나라는 환관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당나라 때는 궁중 권력을 장악한 환관들이 일곱 명의 황제를 키우고 두 명의 황제를 죽이기까지 했다.
악질적인 ‘정치 환관’의 원조는 진시황 시절의 조고(趙高)다. 그는 황제의 권세를 믿고 갖은 악행을 저질렀다. 조고는 진시황이 천하를 순행하던 중 병사하자 유언을 날조한다. 장남 부소에게 황위를 승계한다는 유언을 어리바리한 막내 호해에게 넘기는 것으로 바꾸고 부소는 자결하도록 만든다.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 진나라는 역사에서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졌다.
하루는 조고가 만조백관 앞에 사슴을 데려 왔다.
“여기 말이 한 필 있소이다. 이 말을 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왼쪽에, 사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오른쪽에 서시오!”
조고 자신이 말이라고 하면 사슴도 말이 되어야 했다. 사슴을 사슴이라고 제대로 말한 사람들은 죽임을 당했다. 지록위마(指鹿爲馬)의 고사가 여기에서 나왔다.
소설 ‘삼국지’의 배경이 되는 동한말년은 ‘십상시(十常侍)’라고 불리던 정치 환관들의 극성기였다. 제11대 환제 때부터 권력의 중심에 들어선 환관들은 영제가 즉위하고부터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다. 영제는 환관 장양(張讓)을 ‘아버지’라고 부를 정도였다.
“외척은 여자를 통해 황제의 신임을 얻고 환관은 아부를 통해 총애를 얻는다”고 했던가. 외척과 환관이 발호하면서 망조가 든 나라에 황건적까지 들고일어났다. 각지 호족 세력이 연합해 황건적을 토벌하자 포상하지는 못할망정 공을 세운 장수들에게 뇌물을 요구하기까지 했다. 십상시들의 위세는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였다.
권세가로 변해 망국 이끌다
장양을 이어 십상시를 이끈 리더는 건석(蹇碩)이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는 건석의 숙부가 건석의 위세를 믿고 법을 어기며 까불다가 조조의 몽둥이에 맞아 숨지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사실 건석은 역시 환관이었던 조조의 할아버지 조등(아버지 조숭의 양아버지)이 뒤를 봐주며 키웠던 후배 환관이었다.
건석을 위시한 환관들은 자신들을 죽이려던 하진 장군을 역으로 선수를 쳐 죽인다. 하진은 영제의 후첩이었다가 나중에 황후가 된 하태후의 오라비다. 하태후는 소제의 생모다.
“열흘 붉은 꽃은 없다”고 했다. 기고만장하던 십상시들도 황건적의 난이 완전히 진압된 후 군대를 이끌고 낙양으로 진격해 온 원소에 의해 몰살된다.
유비의 아들 유선은 촉한의 2대 황제가 됐다. 당시 유선의 곁에 빌붙어 권력을 농단하던 환관은 황호(黃皓)라는 자다. 17세에 황제가 된 유선은 제갈량에게 내정과 외정을 모두 총괄하게 했다. 제갈량 사후에는 장완·비의·양의·강유 등에게 나라를 맡기고 국정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이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자가 황호였다. 황호는 황제를 부추겨 북벌에 나선 제갈량의 후계자 강유의 군대를 전쟁 중에 되돌아오게 하는 등 국정 혼란의 주범이었다. 촉한이 멸망한 후에도 뇌물로 목숨을 부지하려고 할 만큼 뼛속 깊은 간신배였다. 촉한 마지막 황제 유선 곁에 황호가 있었다면 오나라 마지막 황제인 손호의 곁에는 잠온이라는 간신배 환관이 있었다. 황제가 황호나 잠온 같은 간신배를 가까이하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았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했을 것이다.
물론 환관이라고 이런 악질적인 정치 환관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가 잘 아는 종이를 발명해 세계 문화 창달에 기여한 채륜도 동한 명제 때의 환관이었다. 대군을 이끌고 해외 원정에 나선 명나라 장수 정화도 환관이었다. 30년 동안 6차례나 원정에 나선 정화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역으로 가는 해상 항로를 개척해 중국과 다른 나라들과의 국제적인 교류가 가능하게 하는 공을 세웠다.
사족. 환관들은 고독과 멸시를 피하기 위해 결혼하고 입양했다고 한다. 이해가 간다. 사실 프로이트 신봉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사람은 성적인 본능에만 그토록 얽매여 살아가지는 않는다.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유전자 전승에만 혈안이 돼 있는 것도 아니다. 질환이나 사고로 성 기능을 상실한 사람은 그렇다 치더라도, 성생활과는 거리가 있는 초고령자 부부들을 보라. 그들은 노환이나 각종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서로에게 의지하고 배려하면서 얼마나 아름답게 여생을 보내는가. 가족이란 그런 것이다. 단순하게 성적인 혹은 유전적인 한두 개의 잣대만으로 잴 수 없는 게 인간이라는 고등 유인원이 살아가는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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