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 없는 학문과 문화는 사상누각일 뿐, 사전은 한 나라의 정신 토대

[김경집의 인문학 속으로] 탄탄한 사전 하나가 문화를 바꾼다
하는 일마다 어깃장 놓듯 어그러져 스타일 망가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화가 나고 부끄러워진다. 이런 상황을 딱 두 마디로 줄이면 ‘이미지 데미지(Image Damage)’라고 하면 된다. 운(rhyme)도 잘 맞아떨어지니 입에 딱 달라붙는다. 이런 식의 어구들만 모아놓은 사전이 실제로 있다. 독일의 ‘로로로(ro-ro-ro)’ 사전 시리즈인데, 일종의 라임사전을 들춰보면 이런 낱말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다. 역순사전 같은 사전들도 있어 최적의 낱말을 글밭에서 캐낼 수 있으니 글 쓰는 이들뿐만 아니라 그 누구에게나 큰 도움이 된다.

사전 하나가 한 나라의 문화를 살찌운 경우를 찾는 건 어렵지 않다. 사전뿐만 아니라 영어라는 언어의 역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것은 새뮤얼 존슨(Samuel Johnson, 1709~1784년)의 ‘영어사전(Dictionary, 1755년)’이었다. 존슨은 거의 혼자 힘으로 7년간 애쓴 끝에 영어사전을 만들어 냈다. 1747년 사전 발간 계획서를 발표하고 귀족의 후원을 받으려고 했지만 무산됐다. 하지만 그는 4만 단어가 표제어로 들어 있고(파생어까지 계산에 넣으면 그 수효는 훨씬 늘어날 것이다) 거기에 11만4000개의 용례가 포함된 엄청난 규모의 사전을 편찬했다. 그뿐만 아니라 스펜서와 시드니 등 16세기 작가들로부터 18세기 작가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용례를 수집해 낱말의 쓰임새를 명시해 줬다는 점은 놀랍기만 하다.

2300페이지에 4만2773개의 단어 정의와 10만 개 이상의 인용구로 이뤄진 이 사전은 영어 역사의 이정표가 됐다. 최초의 영어사전은 아니었지만 가장 완벽하고 영향력 있을 뿐만 아니라 가장 독특한 사전이었다. 사전 출간 후 영어는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됐다. 천재적 언어 감각에서 우러나온 정확하고도 포괄적인 낱말에 대한 정의는 지금 봐도 놀랍다. 이 사전은 100년간 가장 표준적인 사전으로 영국 문단을 배양했다. 사전 하나가 영국의 문학과 문화 발전에 중요한 버팀돌이 됐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존슨은 단어의 의미를 고정해 언어의 혼돈 속에 질서를 가져오려고 굳게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는 곧 언어가 살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목록으로 분류할 수는 있어도 통제할 수는 없다는 점을 깨달은 그는 살아생전 네 차례의 개정판을 냈다. 1928년 ‘옥스퍼드 영어사전’ 초판은 존슨의 사전을 개정한 것이며 최신판 옥스퍼드 사전에는 그가 내린 정의 중 1700개가 실려 있다. 존슨은 1784년 이렇게 말했다. “사전이란 시계와 같다. 가장 좋은 것도 아주 정확할 것이라고는 기대할 수 없다.”


영어의 역사를 새로 쓴 새뮤얼 존슨
사전의 출현은 단순히 낱말을 모아 뜻을 설명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한 국가의 언어와 문학, 더 나아가 문화의 표준과 토대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19세기에 발달한 과학적 언어학의 성과와 함께 이를 실행에 옮긴 그림(Grimm) 형제에 의해 1852년부터 ‘독일어 사전’이 간행된 독일이나 리트레(Littre)의 ‘프랑스어 사전’을 펴낸 프랑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전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범위 안에서 쓰이는 낱말을 모아 일정한 순서로 배열해 싣고 그 각각의 발음·의미·어원·용법 따위를 해설한 책’이다.

사전은 최소한 두 가지 목적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하나는 자국어의 표준적 의미와 용례를 정함으로써 언어의 통일적 체계를 확립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언어를 습득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정확하게 학습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적 목적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국어와 외국어를 소통하게 할 수 있는 기본적 장치의 필요성 때문에 만들어졌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소통에는 비단 외국어 번역과 이해뿐만 아니라 자국어에서도 고어와 현대어의 간극을 해소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 중국이 대표적인데, 고어(古語)의 이해를 위한 사전의 편찬이 일찍이 시작됐다.

기원전 99년 후한(後漢)의 허신(許愼)은 자체의 해설을 위주로 한 자서(字書)인 ‘설문해자(說文解字)’를 편찬했다. 부(部)를 540개로 나누고 편방(偏旁)에 따라 9353자를 분류했다. 중국에서는 이러한 자서와 함께 한자 자음(字音) 해설 위주의 운서(韻書), 고전어를 주석하는 훈고의 자서, 오늘날의 백과사전처럼 다양한 분류로 편찬하는 유서(類書)와 종합적 실용 자서 등이 만들어졌다. 실용 자서의 최고본은 양(梁)나라 고야왕(顧野王)의 ‘옥편(玉篇(543년)’이지만 전해지지 않아 현재까지는 송나라 진팽년(陳彭年) 등의 ‘대송광회옥편(大瀉按폽堰玉篇)’이 최고본으로 인정받고 있다.

서양의 사전 편찬은 중국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한참 뒤처진다. 영국 최초의 사전은 1440년께 편집된 ‘영라사전(英羅辭典, Promptorium Parvuloru)’으로 라틴어 단어에 영어 번역을 붙이는 방식이었고 약 2000단어를 수록했다. 용어 설명을 다룬 초기 사전으로 8세기께 만들어진 것도 있지만 오늘날 사전 수준은 아니었다. 최초의 영어사전은 코드리(Cawdrey)의 ‘어려운 영어 단어의 알파벳표(A Table Alphabetical of Hard Words)’이지만 대부분이 일상어가 아닌 어려운 낱말들만 모아둔 것이었다.

한국 최초의 사전은 1880년 프랑스 선교사들이 만든 ‘한불자전(韓佛字典)’이라고 평가된다. 순수 우리 손으로 만든 사전은 그 이후인데, 1911년부터 주시경·최남선 등을 주축으로 ‘말모이’라는 우리말 사전 편찬 시도가 있었지만 책으로 발간되지는 못했다. 한국 사람이 편찬한 최초의 국어사전은 1938년 발간된 문세영(文世榮)의 ‘조선어사전’으로 어휘가 8만 개에 달했다. 물론 1920년 조선총독부가 펴낸 ‘조선어사전’이 있긴 하지만 우리가 우리말 어휘를 우리말로 설명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나라를 빼앗기면 언어의 표준조차 남의 손에 빼앗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다.

현대적 의미의 본격적인 국어사전은 1947년 10월에 발간된 한글학회의 ‘큰사전’을 들 수 있고 국어사전의 완성을 의미한 기념비적인 사전은 1961년 12월 28일 초판을 발행한 ‘국어대사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희승이 민중서관의 발행인 이병준의 기획 하에 6년의 세월을 거쳐 1956년 완결해 1959년 제작, 1961년 발행했다. 엄청난 기간과 인력을 동원해 완성한 국어사전의 완결편이라고 할 수 있다. 사전을 편찬하는 일은 엄청난 인력과 재정적 지원, 긴 시간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쉽게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사전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문화는 밑돌 없이 기둥을 세우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사전 작업의 퇴보나 몰락은 심각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즘 젊은이들은 사전을 이용하는 일이 드물다. 물론 사전 자체를 아예 쓰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예전처럼 책으로 된 사전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을 통해 필요한 단어를 검색한다. 종이 사전을 짚어가며 찾는 번거로움보다 글자를 입력하기만 하면 자동으로 구현되는 사전이 그들의 생리에 맞기 때문이다. 이를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진화인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스마트폰 시대…누가 사전 편찬에 투자할까
무엇보다 사전을 직접 찾아보면 하나의 낱말이 다양한 뜻과 쓰임을 갖고 있으며 여러 용례들을 갖고 있어 적확한 의미의 이해뿐만 아니라 용례의 다양성을 습득할 수 있다. 언어 자체에 대한 맥락적 이해가 풍부해지는 것이다. 인터넷도 사전이냐고 묻는 것은 이제 우문에 불과하다. 그것은 이미 새로운 형태, 새로운 방식의 사전이다. 다만 그렇게 사용하는 사전이 앞서 언급한 얄팍함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사전이 갖는 문화 근간으로서의 발전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하게 접근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전자사전 방식은 기존의 종이 사전을 외면하게 만들고 결국 시장을 위축되게 함으로써 가뜩이나 사전의 출간을 기피하는 출판 당사자들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사전 편찬과 보완 작업을 포기하게 만들 수 있다. 종이 사전이 만들어지지 않고 전자사전이 발전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사전을 만드는 데에는 엄청난 공력이 든다. 사전 출판사도, 사전 편집부도 사라지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게다가 사전은 이미 앞서 존슨이 지적한 것처럼 완결된 것이 아니다. 꾸준히 수정·보완하고 의미가 변화하는 것이 글밭에서 일어난다. 이에 따라 종이 사전과 전자사전이 공존하고 모든 학문의 토대로서의 사전의 질이 향상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더 늦기 전에 그 해법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도서관 분류에서 사전이 0번으로 자리 잡은 것은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사전은 모든 지식과 정보의 바탕이고 참고의 토대이며 학문의 기준이다. 이런 사전이 허물어지면 결국 무분별과 혼란 그리고 천박함과 미욱함만 남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