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표 싱크탱크를 가다 - 김도훈 산업연구원 원장

정부 전문성 공백 채운 산업 연구의 메카…해외 네트워크 구축·미래 연구 박차
[스페셜 인터뷰] “규제 개혁, 이벤트보다 시스템이 필요하죠”
김도훈(57) 산업연구원 원장은 연구원 이름과 관련된 숨은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산업연구원의 뿌리는 1976년 중동 건설 붐을 타고 문을 연 중동문제연구소다. 1년 뒤 국제경제연구원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고 1982년 한국과학기술정보센터와 통합돼 ‘한국산업경제기술연구원’이라는 멋진 명칭을 새로 얻었다. 김 원장은 “하도 길고 복잡하다 보니 연구원 이름이 정확하게 적힌 우편물이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1984년 내부 논의를 거쳐 ‘한국’과 ‘경제’, ‘기술’을 떼내면서 ‘산업연구원’이 됐다. ‘산업’에 ‘경제’와 ‘기술’이 다 포함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을 반영한 것이다. 그 후 이름이 그대로 굳어졌지만 연구원 성격은 몇 차례 더 변화를 겪었다. 1989년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출범으로 연구원의 한 축이던 무역과 지역 연구 기능을 이관한 것이 대표적이다.

김 원장은 이런 변화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산증인이다. 1979년 대학 졸업과 함께 당시 서울역 앞 대우빌딩(현 서울스퀘어) 21층에 있던 국제경제연구원에서 연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 후 35년 동안 프랑스 유학과 국제협력개발기구(OECD) 파견을 제외하곤 줄곧 연구원을 지켰다. 김 원장은 현재 한국규제학회 회장을 맡고 있는 규제 개혁 전문가이기도 하다. 지난 3월 말 박근혜 대통령 주재로 청와대에서 열린 규제 개혁 끝장 토론에서 “의원입법은 황사 같은 존재”라고 일갈해 큰 반향을 부르기도 했다. 지난 4월 22일 홍릉 산업연구원에서 김 원장을 만났다.


언제부터 규제 개혁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까.
김영삼 정부 때 세계화추진위원회를 만들었는데 거기서 규제 개혁을 추진했어요. 김종석 홍익대 교수와 함께 이 작업을 이끌던 김기환 서울파이낸스포럼 회장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금융 마피아’의 힘이 굉장한 걸 그때 처음 알았죠. 금융 개혁 아이디어를 냈는데 찾아와 ‘뭘 알면서 이야기하라’고 하더라고요. 외환위기를 겪은 김대중 정부 때가 규제 개혁에선 절정기였어요. 노무현·이명박 두 정부는 실망만 줬죠. 이명박 대통령은 처음에는 ‘전봇대 뽑기’로 목소리를 높였지만 규제 개혁을 마치 사업 하듯이 추진했어요. 시스템으로 접근했어야죠.


의원입법은 어떤 문제점을 갖고 있습니까.
정부가 법을 만들 때는 반드시 규제개혁위원회의 검토를 거쳐 국회에 제출합니다. 거기서 규제에 따른 부작용을 사전에 면밀하게 체크하죠. 반면 의원입법은 사각지대예요. 걸러 주는 장치가 아무것도 없거든요. 일부 부처는 규제개혁위원회 심의가 골치 아프니까 그걸 피하려고 의원입법을 활용해 ‘청부 입법’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죠. 걸러 주는 시스템이 전혀 없으니까 황사 같은 존재 아닙니까.


작년 원장 취임 이후 연구원에 어떤 변화가 있었습니까.
연구원들에게 외부와의 네트워킹을 많이 주문하고 있지요. 같은 분야 연구자들이나 공공 기관, 대학교수, 업종별 단체, 거기에 공무원도 참여해 정책 아이디어를 끊임없이 나누는 게 중요합니다. 연구원에만 있다 보면 컴퓨터와 연구하는 게 편해져요. 컴퓨터만 있으며 웬만한 데이터를 다 얻을 수 있거든요. 해외 네트워킹 강화도 추진 중이죠. 중국·일본·대만과는 관계가 잘 구축돼 있지만 미국, 특히 유럽이 취약해요. 요즘 히든 챔피언이나 통일 문제 때문에 독일에 대한 관심이 뜨겁죠. 독일·영국·프랑스 정도는 조만간 인적 교류를 시작해요.


연구원의 가장 큰 경쟁력은 무엇입니까.
산업 연구를 15~20년간 계속해 온 고참급 연구원들이 많아요. 이들이 축적한 지식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어요. 한국의 산업이 강하다는 것도 그 배경이죠. 산업의 역사와 흐름을 오랫동안 지켜봤고 경쟁 국가나 경쟁 기업 분석도 체화돼 있어요. 변화가 심한 산업 분야에서는 매우 드문 일이죠.


한국개발연구원(KDI)·대외경제정책연구원과 어떤 차이가 나요.
KDI는 국내 경제문제를 연구하는 기관으로 만들어졌어요. 특히 거시경제·금융·재정 분야에 강점을 가졌죠. 애초 산업연구원은 수출 증가로 탄생했습니다. 무역과 산업 진흥이 두 축이었어요. 미시적 분석과 해외 지역 연구가 강했죠. 전두환 대통령 때 김재익 경제수석이 KDI와 산업연구원 통합을 추진한 적이 있어요. 국내문제, 국제 문제라는 구분이 사실 모호해 국회에서 중복 연구라는 지적이 많았거든요. 김재익 수석이 버마(현 미얀마) 아웅산 폭탄 테러로 사망하고 나서 서석준 상공부 장관이 경제기획원에 싱크탱크가 2개나 있을 필요가 없다며 산업연구원을 상공부 산하로 가져왔죠. 두 연구원은 그 후로도 계속 부딪쳤어요. 중화학공업 구조조정, 대기업 업종 전문화 정책, 삼성 자동차 진출 등을 놓고 입장이 갈렸죠. 1989년 조순 부총리가 경제기획원 산하에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을 새로 만들고 산업연구원의 무역 연구 부문을 이관하도록 조치를 취했어요. 당시 김적교 부원장이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초대 원장으로 가는 등 10여 명의 인력이 옮겨갔죠. 그러면서 산업 연구가 중심이 된 거죠.


“연구원들에게 외부와의 네트워킹을 많이 주문하고 있지요. 같은 분야 연구자들이나 공공 기관, 대학교수, 업종별 단체, 거기에 공무원도 참여해 정책 아이디어를 끊임없이 나누는 게 중요합니다.”


앞으로 연구원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가장 중요한 역할은 우리 산업의 미래를 국민들에게 제시하는 겁니다. 산업 분야는 끊임없이 변화가 일어나고 그때마다 새로운 국가적 과제가 등장해요. 요즘 창조 경제처럼 말이죠. 거기에 해답을 내놓아야죠. 또 산업 발전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같이 모여 토론하고 연구하는 장이 돼야 합니다.


국책 연구 기관의 역할이 끝났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한국처럼 정부 출연 연구원이 많은 나라는 없어요. 각 부처별로 있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곳도 많아요. 한국과 비슷한 일본도 정부 연구 기관이 매우 소수예요. 중국은 사회과학원이 있지만 한국처럼 정책에 깊숙이 개입해 목소리를 내지는 못하죠. 비슷한 사례를 찾기 어려운 매우 독특한 구조죠. 핵심 원인은 정부의 순환 보직 제도예요. 1~2년마다 업무가 바뀌다 보니 전문성이 부족해요. 연구원처럼 장기적인 시각에서 미래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필요한 거죠. 공무원들이 정책과 현업 관리를 동시해 해야 하는 구조도 문제입니다. 미국은 현업 관련 업무는 다 외청으로 떼어 놓고 부처에는 정책 기능만 남겨 놓았거든요.


민간 싱크탱크들의 영향력도 커지고 있는데요.
민간 파워가 커지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노무현 정부 때 인수위 시절 삼성경제연구소와 SK경영경제연구소의 도움을 받으면서 정부 출연 연구소의 존재 의의가 뭐냐는 회의론도 나왔죠. 하지만 갈수록 민간 연구소들이 정부 정책 영역에 잘 개입하려고 하지 않아요. 한때는 정부 자문위원회에도 적극 참여하고 정부 프로젝트도 많이 했는데, 지금은 아니에요. 기업과 정부가 합쳐지면 곤란하다는 인식이 생겼기 때문이죠. 민간 중에서는 그나마 현대경제연구원이 여전히 활발한 편이죠.


장승규 기자 sk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