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5일 어린이날, 100명의 학생은 모두 큰 사고 없이 오대산 청소년수련원으로 내려왔다. 선발이 되든 안 되든 2박 3일의 산행은 그들에게 자신감을 키워 줬고 좋은 친구를, 그리고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는 자신을 만나게 해 줬다.
[CEO 에세이] 비바람 견뎌 낸 2박 3일
노익상 한국리서치 대표

1947년생. 1971년 고려대 사회학과 졸업. 1973년 고려대 사회학 석사. 2002년 고려대 사회학 박사. 1978년 한국리서치 대표(현). 2007년 대한산악연맹 부회장(현).



세월이 그렇다. 그냥 ‘선박 사고’라고 말한다. 구조를 기대했었던 때에는 텔레비전과 신문, 인터넷을 쉬지 않고 보았었다. 지금은 보고 싶지 않다. 말하고 싶지도 않다. 친구들이 모이면 “그 얘기는 그만 하자”고 한다. 학생들의 부모와 일반인 유가족을 도울 수 있는 때가 곧 올 것이다. 그때 돕는 일밖에 지금 할 일은 없는 것 같다.

날씨도 그렇다. 5월 3~5일, 대관령에 눈이 오고 오대산에는 매서운 비바람이 몰아쳤다. 대한산악연맹 한국청소년오지탐사대원의 마지막 선발을 위한 2박 3일의 시험(테스트) 산행이었다. 몹시 추웠다. 오지탐사대의 책임자로서 “사고라도 나면…”하는 걱정을 하다가 머리를 저으며 생각을 지웠다. 20명의 학생들이 한 조다. 모두 5개조 100명. 대학생이 80명, 고교생이 20명. 100명 중 여학생이 30명이다. 이들은 수만 명의 관심 속에서 서류 전형에 합격하고 다시 체력 테스트와 면접을 통과한 100명이다. 이번 산행을 통해 그들 중 반은 최종 선발되고 반은 떨어진다. 오지탐사대의 정원은 50명뿐이기 때문이다. 각 조의 선두는 학생이다. 그들은 스스로 임무를 나눴다. 지도를 보며 길을 찾는 운행, 식량 준비와 취사·장비·기록·촬영·의료 등의 역할 분담이다. 산을 처음 와 보는 학생들이 100명 중 70명이 넘는다. 그들 옆에는 대한산악연맹의 기라성 같은 전문 산악인 20명이 따라간다. 그러나 리더 역할을 하지 못한다. 지도가 아니라 평가하기 위해 왔기 때문이다. 도와주지 못한다. 말로도, 행동으로도 돕지 못한다. 학생들을 뒤나 옆에서 주시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선두와 후미가 떨어지지 않도록 은근히 독려하고 사고가 날 것 같은 장소에는 미리 가서 대비한다.

사고가 날 것 같아도 조금 더 참는다. 눈빛으로 경고를 줄 뿐이다. 그래야 공정한 평가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오대산 능선의 차가운 비를 맞으며 야간 운행을 그치고 천막을 쳤다. 전문 산악인이 추워서 떠는 한 학생의 팔에 슬며시 손을 대 보았다. 소름이 끼쳐있는 차가운 팔이었다. 그 학생은 버너에 불을 붙이고 손을 쬐다가 결국 손등에 화상을 입었다. 바로 그 순간 그 산악인은 차가운 물티슈로 학생 손등의 온도를 내리고 소독약을 바른다. 그리고 같이 내려가자고 한다. 학생은 내려가지 않겠다고 한다. 내려가면 탈락이기 때문이다. 붕대를 감아주고 화상의 후유증이 없도록 한다. 그리고 그 학생의 행동을 주시한다.

5월 5일 어린이날, 100명의 학생은 모두 큰 사고 없이 오대산 청소년수련원으로 내려왔다. 그들의 말이다. “저는 여기 오기 전에는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지금은 남을 위해 무엇인가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저 자신이 이렇게 강한 줄 몰랐습니다. 이제 저는 저의 가능성을 다시 찾았습니다.” “저는 모범생입니다. 제가 제일 잘난 줄 알았습니다. 이제 저는 저보다 잘난 사람들이, 아니 저와 같이 잘난 친구들이 많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대견하다. 선발이 되든 안 되든 2박 3일의 산행은 그들에게 자신감을 키워 줬고 좋은 친구를, 그리고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는 자신을 만나게 해 줬다. 그들의 몫이다. 그들의 자산이고 추억이다. 대한산악연맹의 것이 아니다. 연맹은 그들이 학교로 돌아가 젊은 산악인으로서의 첫발을 내딛기를 기대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