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 서둔 미국·중국 저만치 질주…‘위기 극복 모범생’ 빛 바래

[글로벌 투자 따라잡기] ‘산업 포트폴리오 조정’ 시작도 못한 한국
작년 말부터 올해 초까지 글로벌 투자자들에게는 세 가지 컨센서스가 있었다. “첫째,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가 올해부터 양적 완화 규모 축소(테이퍼링)에 나설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채권보다 주식이 좋을 것이다. 둘째, 주식을 산다면 경제가 좋은 선진국이 부도 위험이 있는 신흥국보다 좋을 것이다. 셋째, 자금이 선진국으로 흘러들어 가고 미국이 가장 먼저 긴축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달러가 강세일 것이다.”

아직 판단은 이르겠지만 연초 이후 글로벌 자산시장의 수익률을 점검해 보면 ‘주식-선진국-달러 강세’라는 세 가지 컨센서스는 모두 틀렸다. 주식보다 채권의 수익률이 두 배 이상 좋았고 선진국보다 신흥국 주식이 좋았으며 달러는 계속 약세다. 이런 현상이 나타난 배경은 무엇일까.

첫째는 해외 요인이다. 미 Fed 등 중앙은행들이 자산시장의 침체와 과열을 모두 원하지 않고 있다는 측면에서 자산 전략을 짜야 한다. 즉 글로벌 경제가 완연한 회복 기조를 보이기 전에 Fed의 양적 완화 축소 등을 경계해 자산시장이 먼저 위축되는 것도 싫고 반대로 지나치게 낙관적이어서 과열을 만들어 내는 것도 싫다는 의미다. 금융시장이 불안정한 흐름을 보이면 완화적인 제스처로 시장을 받치고 또 낙관론이 팽배해질 땐 어느덧 과열을 언급하며 조심스러운 의견들을 쏟아낸다. 중앙은행들이 금융시장의 상단과 하단을 모두 제어하고 있기 때문에 모멘텀이 강한 시장이나 자산 가격이 계속 상승하기는 부담스럽다. 경제가 좋아지고 있는 미국 주식의 고평가 논란이 대표적이다. 그 결과 일정 범위 내에서 지나치게 상승하거나 하락한 자산들을 발 빠르게 재조정하는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3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이후부터 살펴보면 신흥국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선진국과 신흥국 주식의 수익률 차이는 2010년부터 47%나 확대됐다가 지난 3월 중순 이후 한 달여간 7.0% 포인트 좁혀졌다. 달러 대비 신흥국의 통화가치는 약 3.8% 반등했다. 선진국 경제는 좋지만 주가는 그보다 더 많이 올라 부담스러운 반면 신흥국 자산은 부진한 펀더멘털을 감안하더라도 적정 가치보다 더 많이 하락해 있었기 때문이다.


채권·단기 상품으로만 자금 몰리는 이유
신흥국 주식과 통화가치는 모두 2011년 이후 장기 저항선에 바짝 다가섰다. 변하지 않는 펀더멘털을 고려한 선진국과 신흥국 간 적정 가치의 갭 채우기는 8부 능선을 넘어서고 있다. 이 수준을 딛고 올라서기 위해서는 신흥국의 펀더멘털 개선이 필요한데 아직 조짐은 별로 없다.

그래서 두 가지를 확인해야 한다. 미국 등 선진국 주식이 고평가 논란을 넘어 계속 상승할 수 있을지, 그렇다면 이번에도 신흥국과 국내 자산이 소외될 것인지 여부다. 미국은 경기 우려가 완화되며 기업 이익 증가에 대한 기대가 다시 형성되고 있다. 최근 고용에 이어 소매 판매 등 주요 지표들이 예상치를 웃돌면서 펀더멘털 개선이 소비와 판매, 기업 실적으로 연결될 것이라는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확인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리겠지만 긍정적인 흐름이 예상된다. 재닛 옐런 Fed 의장은 기준금리를 오랫동안 균형 수준보다 낮게 유지할 것이라고 거듭 밝히고 있다.

신흥국의 동반 상승 여건이 조성되고 있다. 신흥국 경기 선행 지수는 아직 바닥을 확인하지 않았지만 이에 선행하는 선진국 대비 신흥국의 상대 선행 지수는 소폭 반등했다. 신흥국 기업의 이익 전망치 하향 추세도 올 들어 완화되는 중이다. 미국의 소비나 투자에 대한 기대가 형성되는 국면인 만큼 최근 몇 년간에 비해서는 선진국과 신흥국의 동반 상승이 진행될 것으로 기대된다. 신흥국의 수익률 갭 채우기가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된 만큼 이제부터 선진국과 신흥국의 동반 상승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균형 잡힌 포트폴리오를 짜야 한다.

둘째는 국내 요인이다. 자금 수요 부진과 낮아진 정기예금 금리는 투자 자금의 기대 수익률을 낮추고 자금의 흐름을 채권과 단기형 상품으로 움직이도록 만들고 있다.

자금 수요 부진의 원인은 무엇일까. 2년 전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2012년 5월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 우려로 글로벌 경제의 극단적 위험이 부각되면서 6월 초 당시 금융위원장 등 한국의 고위 당국자들은 유럽 재정 위기가 대공황 이후 최대의 충격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연일 경고했다. 한국은행 총재와 기획재정부 장관 출신의 산은지주 회장 역시 “1920년대는 대공황이며 지금 상황은 대불황”이라면서 이에 동참했다.

그로부터 2년이 흘렀다. 그전까지만 해도 한국은 세계에서 회복이 가장 빨랐고 모범적으로 금융 위기를 빠져나온 국가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위기를 경고하는 멘트들이 며칠 동안 언론의 1면을 장식하고 난 뒤 대부분의 기업 활동이 멈췄다. 하반기 계획돼 있던 고용·투자·구매 계획들이 모두 취소되고 비상 플랜이 발동됐다. 가계도 마찬가지다. 모든 경제 주체들의 경제활동이 멈췄는데 성장이 될 리도, 자금 수요가 생길 리도 없다. 그러나 고위 당국자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균형재정을 고집했다. 2012년 상반기까지 한국 경제는 상대적으로 양호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같은 시기에 주요국들은 공격적인 정책 대응으로 한국을 추월했다. 미국·유럽·중국·일본 모두 대규모 양적 완화와 경기 부양을 결정했다.


한국만 엉뚱하게 ‘역전환’ 진행 중
산업 구조조정도 성과가 눈에 띄지 않는다. 중국에 의존해 키워 온 한국의 산업재·소재 산업의 비중은 여타국들에 비해 여전히 높다. 미국의 비농업 부문 신규 고용은 금융 위기 이전 고점을 약 95% 회복했다. 그 과정에서 미국 경제를 주도적으로 이끌며 약 300%가 넘는 고용 회복률을 보인 업종은 교육과 헬스 케어, 레저, 사업 서비스 등이다. 미국도 전통적인 제조업·금융업·건설업은 금융 위기 전 신규 고용률의 4분의 1도 안 된다. 신흥국의 대표 선수 중국 역시 구조조정과 함께 신산업으로의 성장 동력 전환이 한창이다.

2008년 저점 대비 상승률이 컸던 업종은 신산업들인 헬스 케어·내구소비재·정보기술(IT)이다. 종합주가지수 상승률은 저점 대비 30% 내외에 불과하지만 이들 업종은 약 80%나 상승했다. 두 나라의 산업 포트폴리오 변화는 새 정부 들어 경제부총리직을 부활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본격적인 구조조정에 나서지 못하고 있는 한국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의 자금은 대부분이 대기업과 거액 자산가들에게 쏠려 있다. 그러나 대기업은 법인세를 피하기 위해 사내 유보금을 쌓아 놓고 있고 거액 자산가들은 종합소득 과세를 피하기 위해 현금을 쌓고 있다. 자금 수요가 거의 없다 보니 정기예금 금리는 사상 최저치까지 내려갔다. 2009년 이후 처음으로 통안채 1년 금리가 정기예금보다 높아졌다. 이젠 그 자금들이 꾸역꾸역 단기 채권으로 유입되고 있는 상황이다. 금리가 올라가기 어려운 구조다. 전 세계가 채권에서 주식으로의 대전환(great rotation)이 화두였던 지난 1년여 동안 한국은 거꾸로 주식형 펀드에서 10%가 빠졌고 채권형 펀드에는 무려 23%가 들어왔다. 엉뚱한 ‘역전환(reverse rotation)’이 한창이다.

반면 중소기업, 소호(SOHO), 가계 및 신용 등급 A급 이하 기업들은 여전히 어렵다. AA급 이상 우량 기업들의 회사채는 물건을 구하지 못해 가격이 폭등하고 있지만 A급의 주요 산업재·소재 기업들은 여전히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향후 이들을 위한 자금 조달이 자산유동화증권(ABS)이나 채권담보부증권(CBO) 형태의 지원으로 나오든, 은행의 자금이 투입되든, 혹은 구조조정과 인수·합병(M&A) 등을 위한 대출 혹은 자금 조달이 발생하든, 어떤 형태로든 자금이 그쪽으로 빨려 들어가야 금리가 오를 환경이 조성될 수 있을 듯하다.


신동준 하나대투증권 자산분석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