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의 양극단에 선 ‘바벨 소비자’ 부상, 소통과 공유 ‘주목’
한국트렌드연구소는 2014년의 다양한 트렌드를 전체적으로 평가하면서 기다란 봉의 양쪽 끝에만 무거운 원반을 단 바벨(barbell)처럼 가운데는 없고 양극단만 있는 바벨 소비가 지속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 양극단이 한 명의 소비자가 가진 두 개의 욕망이라는 것이다. 한쪽 끝은 극단적으로 개인화된 체험의 욕구, 다른 쪽 끝은 쉽고 간편한 테크놀로지를 활용한 극단적 편의성의 욕구가 자리 잡고 있는데, 이는 똑같은 사람들이 가진 반대의 성향이다. 소비자 심리라는 봉의 양쪽에 편의성과 체험의 원반이 있는데 문제는 어중간한 가운데는 둘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동안 이 양극단의 각각을 디지털 기술이나 체험 산업 등을 통해 소비자들이 충분히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양극단에서 공통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바로 공유다. 그 어느 때보다 소통하고 공유하고 싶어하는 소비자들의 심리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의 발전으로 더욱 확산되게 했다. 리얼 버라이어티와 ‘먹방’의 만남2013년 상반기 방송계에서 가장 화제가 됐던 것은 아빠들의 변화된 역할과 아이들의 동심을 잘 엮어낸 ‘아빠 어디가’라는 예능 프로그램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아빠와 아이들이 함께 먹고 자는 일상적 이야기 속에서 ‘짜파구리’라는 히트 상품을 만들어 냈다. ‘아빠 어디가’로 촉발된 짜파구리 열풍은 기존 제품에 또 다른 레시피를 추가해 새로운 맛을 내는 소비자를 일컫는 ‘모디슈머(Modify+Consumer)’를 주목하게 했다. 모디슈머의 창의력은 SNS의 파급력과 함께 다양한 레시피 공유를 가능하게 했고 이는 식품 업체로 하여금 식품 자체에 주안점을 두기보다 소비자들이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 레시피 정보나 먹는 즐거움을 강조해야 한다는 전략적 고민을 안겨줬다.
한국트렌드연구소는 2014년 핫 트렌드로 엔도르핀 디시(endorphin dishes)라는 식품 산업과 연계된 트렌드를 선정했는데 모디슈머나 ‘먹방’에 열광하는 소비자들의 욕망을 ‘심리적 허기’라는 단어로 해석한다. 직장인의 유일한 낙이 점심식사이듯이 요리가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일상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강력한 콘텐츠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무엇이든 공유할 수 있는 SNS의 시대에 가장 단순하면서도 손쉽게 공유할 수 있는 콘텐츠가 요리이며 가장 낮은 수준의 쾌락이었던 식욕이 어느새 인간의 정신과 감성적 문제를 해결하는 유용한 오락 수단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음식은 어느덧 영혼의 진통 효과를 가진 마약과도 같은 역할을 하게 되면서 우리 삶의 엔도르핀 지수를 올려주고 있다.
유쾌한 예능이 사회문제와 일상적 고민 해결
사회문화적 측면에서 본다면 ‘아빠 어디가’와 비슷한 유형의 프로그램인 ‘슈퍼맨이 돌아왔다’와 남자들의 군대 생활을 리얼리티로 보여준 ‘진짜 사나이’, 젊은 배우와 한국을 대표하는 중년 배우가 함께 여행하는 프로그램인 ‘꽃보다 할배’ 등의 인기도 무시할 수 없는 문화적 대세로 떠올랐다.
오디션 프로그램의 열풍이 식어가는 때에 새로운 리얼리티 예능이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되는 시기에 일상의 고민을 함께 나누며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시청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이 프로그램들에는 맞벌이 가족의 증가와 아빠의 새로운 역할, 사회적 강제와 기피의 대상인 군대 문제, 급속한 고령화에 따른 노인들의 제2의 인생에 대한 질문 등이 담겨 있다. 단기적으로 해소할 수 없는 구조적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시청자들에게 이 프로그램은 삶에 대한 긍정적 태도와 함께 여행·낭만·아웃도어·캠핑·먹방 등의 즐거운 콘텐츠로 화답하고 있는 것이다.
장기 불황의 여파가 작은 사치 이끌어 내
무엇보다 2013년 히트 상품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장기 불황’의 그림자였다. 기존 통신사의 통신망을 활용해 제3의 사업자가 저렴한 통신 서비스를 제공하는 ‘알뜰폰’은 올해 편의점 업계의 최대 화두였다. 편의점 CU에서는 2개월 만에 초기 물량 1500대 중 1472대를 판매할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 이 밖에 편의점 자체에서 출시한 다양한 프라이빗 브랜드(PB) 상품 매출의 증가는 가격이 저렴하고 구매하게 간편한 것을 찾는 소비자의 심리를 입증하고 있다.
하반기 히트 상품 중 하나였던 필립스의 에어프라이어는 집에서 만들어 먹기 쉽지 않은 튀김·구이·베이킹 등의 음식을 손쉽게 만들 수 있도록 편리성을 강화한 제품이었다. 외식보다 집 밥을 선호하게 되는 불경기지만 여전히 가족들을 위해 맛있는 음식을 차려 주고 싶은 주부의 욕망을 잘 건드린 제품이다.
일상적으로 쓰는 물품은 저렴한 것으로 사면서도 자신이 가치를 두는 특정 제품에는 큰돈을 쓰는 ‘작은 사치’가 뷰티와 식품 업계 전반의 호황을 가져다줬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일상적으로 쓰는 물품은 저렴한 것으로 사면서도 자신이 가치를 두는 특정 제품에는 큰돈을 쓰는 ‘작은 사치’가 뷰티와 식품 업계 전반의 호황을 가져다줬다. 지난해부터 본격화된 고급 향수 시장은 수입 화장품의 매출이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한 병에 10만 원이 훌쩍 넘는 프리미엄 향수 시장을 성장하게 만들었다. 입 속의 작은 사치도 빼놓을 수 없다. 대형 유통 기업들이 내세운 프리미엄 식품관의 고급 식자재 그리고 브릭팝(Brick pop)·슈니발렌·고디바·네스프레소 등의 고급 디저트가 불황에 지친 소비자에게 감각적 쾌락을 가져다줬다. 소비자들의 ‘작은 사치’ 경향이 확장되고 있는 것은 일정한 소득수준을 통해 과시적 소비를 하며 만족을 추구했던 과거와 달리 삶의 미시적 경험을 확장하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투자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엄마의 책무에서 벗어난 4050 중년층 소비
중년층의 다운에이징 소비는 올해뿐만 아니라 내년에도 주목해야 할 트렌드로 보인다. 홈&쇼핑 패션 프로그램 ‘스타일 애비뉴 시즌2’에서 선보였던 아이지엔 컬러매직 제깅스는 스키니진을 레깅스와 접목한 제품으로, 본래는 20, 30대를 겨냥한 제품이었지만 젊은층보다 4050 중·장년층의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실제로 장년층 전문 브랜드들은 올해 매출이 전반적으로 급감해 쓴맛을 맛봤지만 20대 전용 편집 숍이나 SPA 브랜드(기획·생산·유통을 직접 맡아 판매하는 브랜드)를 찾는 4050대 연령층은 보다 더 확대됐다. 이제 4050 여성들은 엄마·아내로서의 사회적 책무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의 가치를 중시하고 본인의 만족에 과감히 투자하는 중년 여성으로 거듭나고 있다. 자기 투자를 강화하는 중년 여성들의 욕망을 발 빠르게 사로잡기 위한 기업들의 고군분투가 2014년에 더욱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계속되는 경기 불황과 날이 갈수록 더해가는 복잡성 속에서 소비자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경제 전문 기관들이 한결같이 저성장을 예측하고 있지만 시장과 소비자의 삶의 다양성은 더욱 확대될 것이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바벨 소비자들은 서로 다른 영역에서 차원이 다른 욕구를 까다롭게 요구하고 있다. 이 세분화된 영역들에서 새로운 가치 추구 방향과 방식이 나타나면 모험적이면서 생각이 유연한 기업가나 창업자들이 재빠르게 비즈니스화를 시도할 것으로 예측된다. 2014년은 그 어느 때보다 시장점유율이 아닌 시간점유율이 저성장 시대의 승자와 패자를 나누는 잣대가 될 것이다.
김경훈 한국트렌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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