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진·STX 이어 동양·LIG까지…세계 금융 위기 때 구조조정 미룬 게 화근

기업들의 수난이 이어지고 있다. 웅진과 STX에 이어 동양까지 올 들어 대기업집단 3곳이 법정 관리 체제에 들어가자 재계는 한보철강의 부도를 시작으로 30대 그룹 가운데 16개가 쓰러진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때의 쓰라린 기억이 떠오른다는 분위기다.

한때 잘나가던 중견그룹들이 최근 줄줄이 법정 관리에 들어가자 다음 타자가 누구일지에 대한 소문도 무성하다. 현대·두산·한진해운·동부 등은 유동성 위기설에 휩싸이고 있다. 재무 상태가 위험하다는 평가가 이어졌던 재계 17위 동부는 주력 계열사인 동부하이텍 매각 등을 통해 2015년까지 3조 원의 자금을 모으겠다는 고강도 자구 계획을 내놓으며 사태를 수습하는 중이다. 한진해운도 상황은 비슷하다. 대한항공으로부터 1500억 원을 긴급 수혈했고 자금난 돌파 카드였던 4000억 원 규모 영구채 발행이 쉽지 않자 여의도 사옥, 국내외 터미널 매각을 검토하는 등 현금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대한전선의 오너 3세 설윤석 사장은 창립자부터 60년간 지켜 온 경영권을 포기했다.

그런데 업계 전문가들 사이에선 2013년 대기업들이 처한 위기가 낯설지 않다는 얘기가 나온다. 시계추를 16년 전으로 돌려보면 알 수 있다. 거리마다 실업자가 쏟아졌고 천정부지로 치솟는 원·달러 환율에 해외 유학생들이 학업을 중단해야 했던 1997년으로 말이다.

외환 위기가 발생하기 직전인 1997년 초 한국의 30대 기업집단이었던 한보·진로·기아 등이 줄줄이 부도 처리됐다. 재계 서열 4위 대우그룹은 공중분해됐다. 대기업들의 부도 사태는 곧 금융 위기의 도화선이 됐다.


무리한 다각화·몸집 키우기 재연
정부의 지원 아래 성장해 온 대기업들이 무리한 사업 확장을 통해 잠재 부실이 누적된 상황에서 외환 위기가 발생했다. 1997년 외환 위기 당시에도 유동성이 문제였다. 단기 채무가 우리 경제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1990년대 중반 국내 기업들은 철강과 자동차 부문 등 일부 분야에 과잉투자했고 경기 하강기에 기업 이윤이 떨어진 점이 악재로 작용했다. 1996년 경상수지 적자만 230억 달러에 달했다. 이처럼 투자한 것에 대비해 실적이 나타나지 않자 전례없이 높은 부채비율을 기록하던 대기업들이 무너졌고 위기감을 느낀 해외 채권자들이 일시에 돈을 빼가면서 국내에는 달러 부족 사태가 벌어졌다. 기업의 방만 경영도 문제가 컸지만 환율 정책 등 정부의 거시경제 실패도 한몫을 차지했다. 급격한 시장 자유화 정책의 역효과라고 지적한 학자들도 다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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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소득 1만 달러에 진입하고 19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며 선진국 대열에 합류했다고 축배를 들던 우리 경제가 불과 1년 만에 벼랑 끝에 놓이게 된 것이다.

당시 IMF는 한국을 돕는 대가로 엄격한 개혁을 요구했다. 이를 통해 기업 경영의 투명성을 목표로 사외이사 제도 도입, 지배 구조를 개선하는 등 기업의 경영 체제를 국제 기준에 부합하는 체제로 바꾸게 됐다. 하지만 위기는 다시 찾아왔다. 대체 뭐가 잘못된 것일까.

이한구 수원대 경제금융학과 교수는 “큰 기업은 죽지 않는다는 대마불사의 망령이 되살아난 것”이라고 지적했다. 부채에 의존해 무리하게 확장하다 2008년 세계금융 위기를 맞자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 수준까지 가게 됐다는 것이다.

1997년 당시 위기에 빠진 기업들은 두 가지 특징이 있었다. 부채비율이 매우 높았고 그렇게 조달한 자금을 지나치게 많이 시설·설비투자에 사용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한라그룹은 해외 건설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위험에 빠졌고 해태는 중장비와 소비 가전 산업에 진출하는 과정에서 여러 문제에 직면했다. 대우 역시 세계 각국에 자동차 공장을 무리하게 세우다가 부도가 났다. 전통적으로 한국 정부가 부도 위기에 직면한 대기업들을 구제해 줬기 때문에 기업들 사이에서도 ‘대마불사’ 신화가 지배하게 된 점도 컸다. 어차피 정부가 도와줄 테니 일단 과감하게 질러서 판을 키우자는 주의가 팽배했던 것이다.

2013년 또한 이와 비슷한 상황이 반복됐다. 삼성경제연구소장을 지낸 정구현 카이스트경영대학원 교수는 이를 “비관련 다각화 정책의 실패”라고 정리했다. 정 교수는 “이번 위기의 핵심은 기업들이 자신이 현재 하고 있는 업종이나 노하우와 관계없이 단순히 덩치 키우기에 빠져 잘 알지도 못하는 업종에 뛰어든 결과”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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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지와 생활가전에서 성공을 거둔 웅진은 2005년까지 건실한 재무구조를 보였지만 건설업과 태양광 사업에 손을 뻗다가 위기를 만났고 STX는 2005년까지 STX조선해양·STX에너지·STX팬오션 등을 거침없이 인수하면서 자신감이 넘쳤으나 최근 5년 넘게 3개 불황으로 꼽히는 업종 중 조선·해운 등을 동시에 갖고 있는 사업 포트폴리오 때문에 좌초됐다. 동양도 그룹의 캐시카우였던 시멘트 사업이 성숙기에 접어들면서 차기 비즈니스 모델이 뚜렷하지 않은 상황 속에서 골프장 사업 등 문어발식으로 사업을 확장했고 은행권에서 돈을 빌리는 게 쉽지 않자 회사채나 기업어음(CP)을 마구잡이로 발행하면서 재무구조가 상당히 취약해졌다.

이에 대해 류승협 한국신용평가 기업그룹평가본부실장은 “웅진·STX·동양그룹은 단순히 수익성 악화나 재무구조 개선 지연에 따른 부도가 아니다. 지배 구조의 문제, 사업 포트폴리오의 편중, 무리한 사업 확장 등의 요인이 그룹을 무너뜨린 핵심 요소들”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16년 전과 차이점도 상당히 많다. 우선 과거에 비해 대외 환경이 더욱 나빠졌다. 물론 1997년에도 아시아의 여러 국가들은 위기에 처해 있었다. 외환 위기는 태국 바트화의 폭락으로 시작돼 2주 만에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홍콩 등으로 빠르게 점염됐다.


대외 환경은 16년 전보다 더 악화
안타깝게도 현재는 미국·유럽 등이 부채에 허덕이고 있다. 그 규모가 과거와는 다르다. 김창배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전 세계의 경제 상황이 좋지 않고 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회복이 더딘 상태”라며 “솔직히 우리나라보다 대외적 환경이 더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에 우리 경제가 나아질 수 있는 여건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세계경제가 리먼브러더스 사태 이후 5년 동안 ‘완쾌’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앓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수출 위주의 사업 포트포리오를 구성하고 있는 국내 대기업들의 상황이 크게 개선되지 못할 것이라는 얘기다.

내년의 상황 또한 특별히 나아지지 않는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LG경제연구원은 2014년 전망 보고서를 통해 “세계경기가 회복되는 속도는 빠르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출구전략이 본격화되는 과정에서 충격이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라고 예상했다.

무엇보다 전문가들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우리 경제의 ‘체력 저하’에 있다. 과거에는 기업들이 과식(과잉투자)으로 탈이 났다면 현재는 너무 허약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기영 삼성경제연구소장도 지난 10월 삼성그룹 사장단을 대상으로 한 특강에서 “기업과 정부·사회의 위기의식으로 극복했던 외환 위기와 달리 글로벌 금융 위기 5년 차 이후 한국 기업의 체력 소진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며 우리 경제의 이상 징후를 경고하기도 했다.

실제 한국개발연구원(KDI)은 2011∼2020년 잠재성장률을 3.6%로 예측했고 2021∼2030년에는 2.7% 수준일 것으로 내다봤다.

그렇다면 왜 저성장의 늪에 빠지는 것일까.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자본시장실장은 “우리 경제의 체력이 떨어진 것은 2008년 금융 위기 당시에 제대로 구조조정을 하지 않고 어물쩍 넘어갔던 데에 원인이 크다”고 지적했다. 황 실장은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위기의 진원지였던 미국은 엄청나게 구조조정을 시행해 부채를 많이 털어냈고 재무구조를 탄탄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구조조정다운 조정이 없었다. 그게 한계 상황까지 도달하자 쓰러지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2008년 당시 돈이 안 될 사업들은 과감히 정리하고 잘 굴릴 수 있는 주력 산업을 찾아간 기업들은 현재의 위기를 극복한 반면 그렇지 않은 기업들에서 심각한 문제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삼성·현대차도 안심할 수 없어
장세진 카이스트 경영대학원 교수는 “삼성과 현대 등 일부 대기업들은 수출로 버티고 있다. 지난 3~4년간 잘 버텼던 이유는 환율이 평가절하돼 수출 경쟁력이 높았던 것인데, 요즘 환율이 다시 절상돼 중소기업 등 한계 산업들부터 타격을 입고 있다”며 “삼성전자도 내년에는 스마트폰의 수익이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고 예상했다. 그간 우리 기업들에 돈을 벌어준 스마트폰과 자동차도 이미 포화 상태라 앞으로의 성장도 기대하긴 어렵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또다시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해야 하는 사태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1997년과 2008년 금융 위기를 해결했던 경험에서 비롯된 학습 효과 덕이다. 정 교수는 “미국과 통화 스와프도 체결했고 외화보유액도 그 어느 때보다 넉넉한 편이며 단기 자본도 세심하게 관리하고 있어 단기성 외채 비중도 과거에 비해 낮은 편이다. 이처럼 한국의 거시경제는 꽤 안정적”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금융권의 건전성이 높아져 경제 전반적인 파급효과는 외환 위기 때만큼 심각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현재의 저성장 기조는 분명 타개책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기업들이 투자를 꺼리게 되면 임금이 오르지 않고, 소비 부진으로 이어져 회복세를 떨어뜨리는 악순환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류 실장은 “수익성이 보이는 사업은 살리고 아닌 것은 과감히 정리할 필요가 있다. 시늉만 하지 말고 진짜 위기가 오기 전에 실효성이 있는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웅진이나 STX도 자산 매각을 통해 몇 번이나 회생의 가능성이 있었지만 가격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알짜를 놓치기 싫다는 이유로 미적거리다가 결국 그룹 전체를 잃었기 때문이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회복세로 돌아서고 있는 미국 시장을 목표로 제조업에서 수출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내수 시장을 살려야 한다는 목소리도 많다. 정 교수는 “제조업보다 고용 창출 효과가 높은 서비스업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문가들은 국민들의 반기업 정서와 지나친 규제 등 기업 활동을 저해하는 시각에서도 벗어나야 한다고 지적했다.


맥킨지의 경고
“韓 경제, 뜨거운 물속 개구리 안 되려면”
글로벌 컨설팅 회사인 맥킨지는 박근혜 정부 초기인 지난 4월 ‘제2차 한국 보고서: 신성장 공식’을 통해 “한국 경제는 뜨거워지는 물속의 개구리와 같다. 북핵보다 경제성장이 멈춰 버린 게 한국의 진짜 위기”라고 경고했다.

‘뜨거운 물속의 개구리’는 재빨리 냄비를 탈출하지만 서서히 온도가 높아지는 물속 개구리는 위기를 감지하지 못하고 결국은 죽게 된다는 의미다. 보고서는 한국 경제가 IMF 외환 위기나 글로벌 경제 위기 등 갑작스러운 위기에 대한 대응력은 신속하지만 서서히 스며드는 위기에는 둔감하다고 지적했다.

리처드 돕스 맥킨지 글로벌연구소 소장은 “신성장 동력을 찾지 못하면 한국 경제는 추락하고 말 것”이라고 쓴소리를 했다.

그가 꼽은 위험 요소들로는 중산층의 가계 부채, 고용 없는 성장, 저출산·고령화 등이다. 맥킨지가 제시한 해결책은 어찌 보면 평범하다. 앞선 위험 요소들을 해결하라는 것이다. 일단 신성장 동력을 발굴하고 과도한 주택비와 교육비로 경제난에 허덕이는 중산층을 복원시키고 규제 완화와 서비스업 육성을 통해 질 좋은 일자리를 만들라는 것이다.


김민주 기자 vita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