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 무역 상사’로 개편해 독자 생존 복안…그룹 되찾기는 ‘글쎄’
“해가 뜨기 직전이 가장 어두운 법이다. 지금의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해 나가면 재도약의 기회가 찾아올 것이다.” 지난 11월 16일 오랜만에 모습을 보인 강덕수(63) (주)STX 회장의 말이다. 이날 임직원들과 함께 청계산을 등반한 강 회장은 지난 9월 STX조선해양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난 후 처음으로 대중 앞에 모습을 보였다.이를 두고 강 회장이 채권단과 재계에 자신의 건재와 재기 의지를 밝힌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더욱이 강 회장이 자신의 유일한 희망인 주식회사 STX(이하 STX)를 ‘독립적 전문 무역 상사’로 성장시키겠다는 복안을 내놓아 강 회장의 재기설이 나오고 있다.

강덕수호가 이끌던 STX그룹은 현재 해체된 상태다. 유동성 위기 이후 STX조선해양·STX중공업·STX팬오션 등 주요 계열사들은 대부분이 채권단 관리나 법정 관리 상태에 들어갔다. 그룹 회장이었던 강 회장은 STX 회장직과 STX엔진 이사회 의장직을 제외한 옛 계열사 관련 직함을 대부분 잃었다. 한때 재계 13위를 호령하던 STX그룹은 결국 이렇게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나 STX는 강 회장이 재도약할 수 있는 유일한 날개다. 강 회장은 STX의 지분 6.65%를 보유하고 있다. STX그룹의 지주사 겸 종합상사인 STX는 지주사로서 그룹 관리를 담당하는 ‘관리 부문’과 상사 업무를 중심으로 하는 ‘상사 부문’을 양축으로 해왔다. 기존에는 강 회장이 STX를 통해 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STX조선해양을 지배한 만큼 사업 부문보다 지주사로서의 역할이 컸다.
하지만 이제 STX가 단독 계열사로 성장해야 하는 만큼 사업 구조의 재정비가 시급한 상황이다. 이에 따라 상사 부문의 사업 활성화 방안과 상사 부문으로의 조직 개편이 불가피해졌다. 채권단이 “STX 사업의 수익성이 분명하지 않다”고 지적한 것도 사업 구조를 재정비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강 회장이 내놓은 STX의 새로운 사업 모델은 다음과 같다. ▷에너지 사업(석탄·석유) ▷원자재 수출입(철강·비철) ▷기계 엔진(기계플랜트·엔진) ▷해운 물류 서비스(물류·선박) 등으로, 이 4대 사업 모델을 중심으로 독자 생존을 위한 경쟁력을 갖춘다는 전략이다.
종합 무역상사로 거듭나는 길은 순탄치만은 않다. 상사 부문으로 회사 조직을 개편하는 과정에서 인력 구조조정을 해야 했다. STX는 지난 10월 뼈를 깎는 구조조정에 돌입했다. 임원부터 사원까지 전 직원을 대상으로 인력 감축을 단행해 전체 직원의 약 10%를 명예퇴직 형태로 퇴사 조치했다. 현재 STX의 재직 인원수는 200여 명 수준으로, 명예퇴직한 직원들은 20~30여 명인 것으로 알려졌다. 임원뿐만 아니라 과장 및 입사 1~2년 차 평사원들도 포함됐다.
STX 관계자는 “관리 부서 직원들 중 상사 부문으로의 보직 이동을 원하지 않는 직원들을 대상으로 명예퇴직 신청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어 “올 초부터 구조조정을 통해 인원을 감축하기도 했고 임원들의 임금을 대폭 인하하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직원들의 월급을 밀린 적이 없고 한 푼도 깎지 않았다”며 회사의 재무 안전성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채권단 자율 협약 체결이 1차 관문
그렇다면 STX가 재기 발판이 가능한 회사인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지주사 역할을 해 온 STX의 그간 경영 성적은 나쁘지 않다. 올해 종합상사가 전반적으로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2013년 3분기까지 총 2조 원(연결 기준)의 매출을 올렸다. 물론 지난해 연매출 4조 원에 비하면 한참 모자란 수치다. 하지만 올해 성적은 STX에너지 매각 대금 반영, 계열사 주가 상승, 계열사에 대한 대손 처리 축소 등으로 영업이익과 당기손익이 흑자 전환됐다는 데 의미가 있다.
STX 관계자는 “매출 규모가 많이 줄었지만 업황이 좋지 않았던 올해(3분까지) 매출 2조 원을 달성했다는 것은 희망적이다. STX만으로 충분히 ‘먹고살 수 있다’”고 했다. 또 다른 STX의 한 임원은 “그래도 내년쯤이면 STX가 중소기업 뉴스에 나오지 않겠느냐”며 허탈함을 보이기도 했다.
‘먹고 살만하다’고 해서 낙관할 수만은 없다. 이들의 문제는 눈덩이처럼 불어난 이자 값 치르기다. STX 관계자는 “STX 영업이익만으로는 괜찮은데 이자 비용을 내야 하는 부담이 있다. 영업이익에서 이자로 나가는 비용이 거의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문제는 이러한 안건을 비협약 채권자들이 만족스러워하지 않는데다 자율 협약 체결 후 추가 출자 전환 등의 우려로 참여를 주저하고 있다. STX는 또다시 위기에 놓일지 모를 처지가 됐다.
자율 협약은 채권 금융회사와 회사가 유동성 지원 및 구조조정 계획에 대해 포괄적 협약을 맺어 경영 정상화를 추진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기업마다 영업, 재무 등 경영 상황이 상이함에 따라 협약채권단의 범위과 기간, 지원 규모 등 자율 협약의 형태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STX는 투자 자산 감액 손실에 따른 대규모 자본 잠식과 과다한 차입 규모로 협약채권단만의 자율 협약으로는 경영 정상화를 담보할 수 없어 지난 7월 비협약 채권자의 참여를 요구했다. 자율 협약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비협약 채권자가 입게 될 손실 폭이 훨씬 커질 것이라는 판단에 근거해 부득이하게 비협약 채권자에게 채권 조정을 부탁하게 된 것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자율 협약 체결이 무산되면 STX도 법정 관리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되면 강 회장의 재기는 어려워진다”고 말했다.
사채권자 집회를 앞둔 추성엽 STX 대표는 “전문 무역 상사로서 4대 비즈니스 모델을 안정적으로 정착시키고 사채권자 집회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며 독자 생존력을 확대하고 재무적 안정성을 강화해 기업 정상화 조기 달성을 반드시 실현할 것”이라고 밝혔다.
STX는 올 상반기까지 950억 원의 영업이익 적자를 기록했지만 3분기에는 345억 원의 흑자로 돌아섰다. 9월 말 기준 계열사 담보 제공 자산은 STX조선해양 1164억 원, STX중공업 등 총 1826억 원이다.
‘이익은 지혜를 어둡게 만든다(利令智昏)’는 말이 있다. 이익에 눈이 가리면 사리분별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 욕심의 대가는 고스란히 강 회장을 비롯한 STX그룹 전사에 퍼져나갔다. 재기가 어려울 것이란 재계의 시각도 존재하지만 백의종군의 자세로 마지막 남은 STX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경영진의 모습에서 작은 희망의 불씨를 엿볼 수 있다.
김보람 기자 boram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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