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포커스

지난 11월 26일 오후 광장동 아카디아 연수원. 재계 3위인 SK그룹의 계열사 최고경영자(CEO)와 사외이사 50여 명이 한자리에 모여 앉았다. 회의를 주재하는 최태원 회장의 목소리는 긴장됐다. 최 회장은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을 인용하며 입을 열었다.

“가지 못한 길은 가 봐야만 길이 됩니다. 변화를 두려워하면 영원히 변화할 수 없어요.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이라 쉽지 않겠지만 자신감과 믿음을 갖고 추진해야 합니다.”

SK그룹은 이날 지주회사 역할 축소와 위원회 중심 경영을 골자로 하는 그룹 운영 체제 혁신안을 내놓았다. 2002년 최 회장이 ‘브랜드를 공유하는 느슨한 연합’을 주창하며 시작된 SK그룹의 지배 구조 대안 찾기가 또 한 단계 진전된 형태로 모습을 보인 것이다.

SK그룹은 2007년 지주회사 체제로의 전환을 완료했다. 이번 혁신안은 여기서 한 발짝 더 나갔다. 지주회사 체제에서 지주사는 과거 기획조정실이나 구조조정본부처럼 회장의 대리인으로 그룹 전체를 컨트롤한다. 겉으로는 계열사 독립 경영을 내세워도 결국엔 지주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재계 놀라게 한 SK그룹의 ‘위원회 경영’ 실험, 지주사 축소…그룹 인사권도 위원회로
이번에 SK그룹은 지주회사인 SK주식회사에서 계열사를 ‘리드·헬프·체크하는 기능’을 떼어내 아예 새로 만들어지는 위원회에 넘기기로 했다. 앞으로 지주사는 신성장 동력 발굴, 투자 포트폴리오 관리 등 본연의 역할에 집중한다. 이렇게 되면 계열사들이 더 이상 지주사의 눈치를 볼 일이 없어진다. 최 회장은 “앞으로 자기 회사 일을 지주회사에 물어보지도 가져오지도 말라”고 선언했다.

그렇다고 계열사들이 각기 자사 이익만 보고 움직이면 ‘그룹’ 체제는 깨지고 만다. 그룹 전체의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한 것이다. 새로운 그룹 운영체제의 핵심으로 등장한 6개 위원회는 이런 고민의 산물이다. 사실 위원회가 경영의 전면에 등장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윤진수 한국기업지배구조연구원 연구위원은 “해외에도 비슷한 사례가 없는 시도”라고 말했다.



위원회 참여 계열사 자율

SK그룹의 위원회 경영은 내년 1월부터 가동된다. 계열사 CEO들은 전략위원회·글로벌성장위원회·동반성장위원회·인재육성위원회·윤리경영위원회·커뮤니케이션위원회 등 6개 위원회 가운데 자사에 필요한 곳을 골라 참여하게 된다. SK그룹 관계자는 “위원회 참여는 철저하게 계열사 자율”이라며 “6개 위원회에 모두 참여하지 않는 곳도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주요 계열사 중 한 곳은 자체 결정에 따라 계열사 감사 역할을 하는 윤리경영위원회에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6개 위원회 중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이 인재육성위원회다. 계열사 CEO 인사를 담당한다. 그룹 회장의 가장 큰 권한으로 인식돼 온 계열사 CEO 인사권을 스스로 포기하고 위원회에 위임하겠다는 선언이다. 계열사 CEO 인사는 지주회사 인사팀에서 안을 미리 짜는 게 보통이었지만 앞으로 이런 일이 사라진다. 인재육성위원회에서 후보군을 선정해 각 계열사 이사회에 넘기면 거기서 검토해 최종 결정한다.

위원회는 어디까지나 결정 기구가 아니라 협의 기구다. 위원회에서 협의한 안건들도 각 계열사 이사회를 통과해야만 시행된다. 계열사별 참여 위원회와 각 위원회 위원장은 내년 1월 확정된다. SK그룹 관계자는 “위원회마다 사무국을 두지만 규모는 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6개 위원회는 SK그룹의 최상위 의사결정 기구인 수펙스추구협의회 산하에 설치된다. 위원회에서 조율이 안 되면 수펙스추구협의회에서 조정 기능을 맡는다.

일각에서는 이번 혁신안을 ‘보여 주기식 개혁’이라며 의구심을 나타낸다. 최 회장의 확정 판결에 대비한 대응책의 일환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2007년 지주회사 전환으로 최 회장의 그룹 지배력은 안정 단계에 들어섰다”며 “소유 지배 구조를 확보한 이상 핵심적인 의사결정은 결국 최 회장이 좌우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반면 윤 연구위원은 SK그룹의 새로운 시도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는 “기업이 스스로 개혁안을 만들고 시장에 적극적으로 알리는 것은 그 자체로 큰 의미가 있다”며 “실제로 어떻게 운영될지는 나중에 결과를 보고 평가해도 늦지 않다”고 말했다.

2000~2006년 SK텔레콤 사외이사를 역임한 남상구 전 고려대 교수는 지배 구조 혁신에 대한 최 회장의 열정에 높은 점수를 준다. 남 전 교수는 “손길승 전 회장만 해도 전시대 창업 때부터 내려온 어려움을 잘 알아 무리하게 지키려는 입장이었지만 최 회장은 달랐다”며 “2005년 베트남에서 열린 이사회에서 최 회장이 앞으로 SK는 ‘따로 또 같이’ 간다고 선언했다”고 말했다.

현재 SK네트웍스 사외이사로 있는 장병주 대우세계경영연구회 회장은 “최 회장은 이사회 중심 경영, 지주회사 전환, 위원회 경영 등 자신의 경영 철학을 꾸준히 레벨 업해 왔다”고 말했다. 그는 “내년 세계경제가 어려워질 것으로 예상되면서 대부분의 대기업이 총수의 권한을 강화하는 쪽으로 가는데 SK만 거꾸로 가는 것”이라며 “실시 타이밍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최 회장이 ‘오히려 지금이 기회가 될 수 있다’고 강한 의지를 보였다”고 말했다.

SK그룹은 지주회사 전환 5년째인 작년부터 ‘위원회 경영’ 모델을 준비해 왔다. 지주회사 체제가 어느 정도 정착됐다고 보고 지주사와 계열사 역할에 대한 재검토가 이뤄졌다. SK그룹 관계자는 “스웨덴 발렌베리를 포함해 해외 지주사 모델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가 SK경영경제연구소를 중심으로 진행됐다”며 “이를 토대로 SK그룹에 맞는 경영 방식을 만들어 낸 것”이라고 말했다. 최 회장이 주재한 지난 11월 26일 회의는 사내 방송을 통해 그룹 전 계열사에 실시간으로 생중계됐다. 이번 혁신안이 일회성 선언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의지의 표현이다.
재계 놀라게 한 SK그룹의 ‘위원회 경영’ 실험, 지주사 축소…그룹 인사권도 위원회로
한국형 하이브리드 모델

SK그룹의 새로운 실험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 남 전 교수는 “독립 경영은 아무리 강조해도 그룹 체제에서는 독특한 어려움이 생긴다”고 말했다. 경기 흐름과 시대 상황에 따라 실적이 좋은 계열사와 그렇지 못한 계열사가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남 전 교수는 “SK그룹만 해도 한때는 SK텔레콤의 비중이 절대적이었지만 이제는 다른 쪽 비중이 커졌다”며 “여기서 서로 기대고 지원하는 관계가 어느 정도 생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그룹 총수가 사익을 위해 이를 이용하면 안 되지만 회사 이익을 위해 서로 돕는 자체는 큰 문제가 안 된다”고 말했다.

SK그룹 계열사의 한 사외이사는 “이번 혁신안은 완전한 소유 경영의 분리는 아니지만 그룹 회장 1인 지배 체제의 대안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이제 그룹 회장 한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하기에는 기업의 규모가 너무 커졌다는 설명이다.

그는 “위원회가 6개로 다소 많은 감이 있어 집단 지도 체제에 대한 우려가 나오지만 위원회 구성원들이 충분한 경영 노하우를 지닌 ‘프로’들이기 때문에 잘 해결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장 회장도 “문제는 결국 사람”이라며 “위원회가 애초 구상대로 운영되려면 거기에 맞는 능력 있는 인재들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SK그룹은 2010년부터 부회장단을 운영하며 나름대로 변화를 준비해 왔다고 설명한다.

황인학 한국경제연구원 기업정책연구실장은 SK그룹의 혁신안을 오너 경영과 전문 경영인 체제의 장점을 결합한 ‘하이브리드 모델’로 규정한다. 황 실장은 “과거 오너 경영이 지배적이었지만 외환위기 이후 오너 경영과 서구식 전문 경영인 체제를 절충한 방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며 “SK그룹은 이런 하이브리드 모델의 가장 진화된 형태”라고 말했다.

지난 10년 SK그룹의 지배 구조 개선 성과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리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최 회장이 비교적 일관된 목표를 추구하며 꾸준히 노력해 왔다는 점에는 대부분 높은 점수를 준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걷는 최 회장의 이번 실험이 주목받는 또 다른 이유다.


장승규 기자 sk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