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하자고 집안에서 공식적으로 결정한 적은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우리 집안에는 어쩌다 보니까 전 세계에서 공부한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들은 독일·미국·일본·영국·프랑스 등에서 대학 이상을 졸업했다.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런 집안의 기운이 현재 필자의 활동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사업을 하신 할아버지는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않으셨다고 한다. 그러나 학술이라는 것이 세상에 도움을 준다는 것을 일찍이 깨닫고 고향 후배가 세운 대학교에 일제강점기에 1만 환이라는 장학금을 기꺼이 내셨다고 들었다.

필자의 아버지도 해외 유학을 다녀와 모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가 정년퇴직하셨다. 대학교수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대부분의 가족들이 교수의 길에 들어섰다.

필자는 남 앞에 나서는 것을 극히 꺼린다. 조직을 관리해 본 적도 없다. 초등학교 때 줄반장도 못 해 봤고 대부분이 돌아가면서 하는 중·고등학교 동기회장도 아직 못 해 봤다. 친구들끼리 하는 바둑 모임 회장도 못 해 봤다. 또한 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외환위기의 찬바람이 우리나라에 ‘부자 되세요’라는 유행어를 만들었을 때 필자는 그동안 해왔던 VIP 마케팅을 토대로 ‘부자학’을 만들었다.

아버지는 40대 소장 교수 때 학회를 창립했고 필자가 유학 시절 아버지는 유럽에서 태동한 세계학회의 회장이 됐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아! 나의 아버지] 집안에서 배운 학술 조직화의 의미
‘부자학을 세상에 알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일까’하고 오랫동안 궁리하다가 학회를 만들자고 결심하게 됐다. 그러나 막상 조직을 리드해 본 적이 없는 필자는 3년 동안 숙고를 거듭하다가 서울여대 학생들 수십여 명의 헌신적인 노력에 힘입어 나이 50세에 부자학연구학회를 만들었다. 학회 창립 후 논문집 4권, 총서 10권을 발간했다. 그리고 학회는 기부를 받지 않고 경주 최부잣집, 간송 전형필 선생 등 23분의 훌륭한 우리나라 부자들에게 ‘봉사부자상’을 시상했다.

그러자 필자에게 욕심이 생겼다. 나이 60이 되는 2017년에 세계부자학연구학회를 만들겠다는 포부가 그것이다. 필자는 시력이 나빠 군대에 가지 못했다. 1978년에 100여 명이 함께 받은 징집 신체검사에서 필자만 면제를 받았다. 피땀 흘리면서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친구들에게 미안해 그때 맹세한 것이 언젠가는 대한민국을 위해 좋은 일을 해야겠다는 것이었다. 세계부자학연구학회를 만드는 것이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이는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면 3년간 국방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죄를 갚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인간이 만든 가장 정교한 것이 학술이고, 대학에서 논의된 학술이 세상을 위해 가장 크게 할 수 있는 것이 책의 집필과 강연이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필자도 인간의 새로운 지식 결정체인 부자학의 이론 서적들을 만들고 강연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쏟고 있다.

필자가 유학 시절 미국에서 태어나 자동적으로 미국 시민권을 가진 필자의 유일한 아들은 군 입대를 자원해 맹호부대를 만기 제대했다. 그리고 우리 집안에서 아무도 가본 적이 없는 새로운 나라로 유학을 가겠다고 준비를 하고 있다. 필자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2050년에 또 다른 세계학회를 스스로 만들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한동철 서울여대 교수·부자학연구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