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자의 도심 탈출


노인 천국답게 일본인 4명 중 1명은 고령자다. 2055년이면 거의 2명 중 1명(40.5%)이 노인 인구다. 노인 증가와 맞물린 인생 2막은 한숨 소리로 시작된다. 스포츠카와 요트로 광고되는 유유자적한 은퇴 생활자보다 빈곤과 건강 문제로 신음하는 빈곤 노인이 훨씬 많다. 물론 연금 수혜는 상당한 수준이다. 1층(국민연금)뿐인 한국에 비하면 천양지차다.

1~2층의 공적연금에 3층(기업연금)까지 갖춘 중산층 고령 가구가 적지 않다. 이를 반영하듯 노후 자금 항목 중 연금 소득은 압도적인 1위에 랭크된다. 노인 중 80%가 연금 생활자다. 문제는 연금 수입이 넉넉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때 효자 노릇을 하는 게 저축(금융자산)이다. 다만 언제까지 꺼내 쓸 수 있을지 불안감은 여전하다. 일본의 고령 부부와 무직 가구의 월 가계부를 보자. 세후 수입(19만 엔)은 생활비(24만 엔)보다 적다. 40년 근속 남편(아내 가사)이 받는 모델 연금(23만 엔)자라고 하더라도 매월 4만~5만 엔이 부족하다. 정년 연장 조치로 65세까지 재고용된다면 사정은 낫다. 60세에 일자리를 잃는다면 연금 수급 개시 연령(65세)까지 ‘마의 5년’을 저축으로 살 수밖에 없다. 이럴 때 생존력을 유지할 선택 카드는 별로 없다. ‘더 벌거나 덜 쓰거나’뿐이다. 다만 더 버는 건 어렵다. 손쉬운 건 지출 감소다. 절약 지향의 축소 생활이다.

사실 덜 쓰는 건 한계가 있다. 의식주의 기초 생활비는 물론 고령 특유의 의료·간병 등 지출은 줄이기 힘들다. 비탄력적인 고령 지출이다. 그래서 등장한 대안이 ‘도심 탈출’이다. 지방(농촌) 혹은 해외로의 이주 카드다. 살인적인 고비용 구조의 도심 생활을 정리하고 지출 대비 부가 혜택이 많은 저비용·고효율 지역으로의 전입 러시가 일고 있다. 물론 새로운 트렌드는 아니다. 은퇴 이슈가 부각된 1990년대부터 꾸준히 있었다. 다만 시간이 흐르면서 인식 확산과 함께 환경 개선 및 취사선택의 기반 정비로 인기가 한층 높아졌다. 지역 재생(귀농), 외화 획득(해외) 차원에서 은퇴 생활자를 흡수하려는 홍보·마케팅이 늘고 있다. 관련 정보를 취합·제공하는 사업체는 셀 수 없이 많다.
[일본] 농촌으로, 해외로…저비용·고효율 노려
빈곤·건강문제 직면한 노인 많아

귀농 등 시골 지방으로의 이주부터 보자. 무엇보다 시골 생활은 연금만으로 살 수 있다는 점이 최대 장점이다. 고도성장기 때 일자리를 찾아 도심에 몰려든 취업 상경과는 정반대로 고령 진입 후 생활 안락을 위해 시골 낙향을 결심하는 경우다. 도시를 떠난 시골 정착은 대개 현역 시절의 연장선처럼 생활하는 스타일을 거부한다.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형태다. 정년 이후엔 일하지 않겠다는 의지 표명이다. 따라서 초미의 관심사인 정년 이후의 재고용은 가시권 밖이다. 재고용돼도 수입 급감, 업무 압박 등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골 카드는 왕왕 귀농으로 연결된다. 자급자족을 넘어선 농사 플랜으로 적지만 안정적인 소득원을 확보하려는 경우가 적지 않다.

시골 이전의 메리트는 많다. 인간다운 인생 2막을 위한 다양한 우호 환경을 두루 갖췄다. 농사 경험이 없어도 이웃의 도움으로 농작물의 자급자족이 가능한 건 덤이다. 건강을 챙기는 건 당연지사다. 비용절감은 상상 초월이다. 집값이 비싸봐야 1000만 엔을 넘지 않으니 큰 장애물이 아니다. 반면 식비와 오락비·의복비 등을 합해 부부 생활비는 월 20만 엔 이하로 넉넉히 해결된다. 쇼핑 등 생활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시골 생활로 알려졌지만 요즘 은퇴 세대에겐 해당 사항이 없다. 인터넷 쇼핑을 활용하면 필요한 모든 물품을 주문·배달받아 생활할 수 있기 때문이다. 50대 조기 퇴직 후 시골 빈집을 구입해 고친 다음 거주하는 이도 많다. 개중엔 도쿄 토박이도 상당하다.
[일본] 농촌으로, 해외로…저비용·고효율 노려
다만 골칫거리가 없는 건 아니다. 당장 신경 쓰이는 게 살던 집의 처분 문제다. 여유 자금이 넉넉지 않다면 기존 주택을 처분·임대해야 한다. 그런데 토지 신화가 꺾여버린 후 물건 수요가 급격히 줄었다. 이를 위해 최근엔 기존 주택 처리 문제를 돕는 전담 기구도 생겨났다. 이주·이사 지원 기구가 그렇다. 도심 빈집의 임차 주선을 통해 현금·자산화를 거들어주는 게 목적이다. 가령 50세 이상 고령자의 소유 주택을 여기에 등록하면 통상보다 10~20% 저렴한 임대료로 젊은 가족 가구에 제공하는 식이다. ‘마이 홈 임차제도’를 활용하면 3년마다 계약 갱신이 이뤄지는데 특히 사례·보증금이 없어 인기다. 임대인은 입주자 유무와 무관하게 임대료의 85%를 수입으로 챙긴다. 연금이 적다면 보유 임대로 추가 소득을 얻을 수 있어 제격이다.

가족 반발도 피하기 힘든 장벽이다. 불편하고 생소한 시골 생활에 대한 거부감이다. 정년 남편이 시골을 선택해도 못 떠나는 큰 이유는 도시 생활에 익숙한 아내의 반대 때문이다. 이를 반영해 최근 도심 여성의 눈높이에 맞춘 시골 스타일이 확산 추세다. 편리함과 가사 해방을 거드는 새로운 거주 제안이다.

가령 수도권 유명 휴양지인 아타미의 ‘라이프케어 미나구치(水口)’는 1개월 식비로 4만2000엔(1일 3식)을 내면 영양을 감안한 식사가 제공된다. 고령자 생활 압박 중 하나인 음식 재료와 메뉴 선택 등으로부터의 자유다. 마작·당구 등 취미 시설까지 구비했다. 집값은 시세보다 싸다. 조망 좋은 층의 27㎡짜리 원룸 분양가는 300만 엔에 불과하다. 건축 연수가 오래된 아파트를 리모델링한 게 저가 배경이다. 50대 여심을 잡기 위해 호텔 못지않은 편의 시설을 갖춘 것도 700만 엔이면 살 수 있다. 생활비는 저렴하다. 관리비와 식비·수선 적립금을 합해 월 10만 엔이면 된다.
[일본] 농촌으로, 해외로…저비용·고효율 노려
국내 이주를 넘어 탈(脫)일본을 실천하는 은퇴 생활자도 많다. 사시사철 온화한 기후 조건을 갖춘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가 주요 타깃이다. 저렴한 물가가 가장 매력적이다. 일례로 말레이시아의 물가는 일본의 3분의 1에 불과해 빠듯한 연금이라도 얼마든지 거주할 수 있다. 3~4개 방에 전체 넓이가 100㎡를 가뿐히 넘는 가구 딸린 대형 평형도 월 6만 엔대면 빌릴 수 있다. 골프 등 취미 생활은 환상적이다.

마사지 등 다소간의 사치 취미조차 저가로 즐길 수 있다. 그래봐야 50대 부부 기준 월 생활비는 25만 엔이면 충분하다. 생활수준에 비해 행복 정도는 아주 높다. 연금 수령 연령대가 아니더라도 큰 문제는 없다. 본국의 소유 주택을 매각한 후 이를 외화 예금으로 운용해 이자 수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예금 금리가 3.7~3.8%여서 주택 매각 후 매각 대금을 맡기기만 해도 생활비의 상당 부분을 벌충할 수 있다. 신흥국답게 물가수준이 우려되지만 아직은 괜찮다. 목돈이 없다면 굳이 현지 주택을 구입하지 않고 콘도 임대로 거주할 수도 있다.



말레이시아 물가 일본의 3분의 1

해외 생활을 꿈꾸는 수요는 증가세다. 60세를 전후해 노후 생활지로 해외 카드를 선택하는 이들이 꾸준하다. 물론 음식 재료와 의료 시설 등 생활 변화가 염려된다. 이 때문에 관련 업계는 예비 여행을 주선해 불안감을 줄여준다. 일본인이 많은 지역엔 일본계 슈퍼마켓·병원 등도 과거에 비해 대폭적으로 구비됐다. 일본인 통역자도 많아져 생활 불편을 줄여준다.

일본 은퇴자를 잡으려는 해외 정부의 지원 의지도 높다. 외화 획득 차원에서 이주 세미나 등을 적극적으로 후원한다. 말레이시아는 50세 이상이면 10년짜리 장기 비자까지 내준다. 현지 정기예금에 375만 엔 이상 맡기면 비자가 나온다. 희망지로는 말레이시아가 1위, 하와이·태국·호주·캐나다 등이 톱 5에 든다(롱스테이재단). 이주가 부담스러우면 장기 체재(Long Stay)가 유력한 선택지다. 이는 이주·영주와 다르다. 생활 기반은 일본에 두고 세컨드 라이프로 장기간 머무르는 타입이다. 1년에 3~6개월씩 원할 때 원하는 곳에 원하는 만큼 머무른다.



전영수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겸임교수(전 게이오대 방문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