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타계

수술을 맡았던 병원 측은 “폐를 열었더니 모래먼지인지, 쇳가루인지 모를 꺼먼 물질이 나왔다”고 밝혔다. 한국의 철강 산업, 나아가 산업 근대화에 그가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증언이다.
고(故) 박 명예회장은 1927년 경남 양산에서 태어난 후 광복을 맞기 전까지 일본에서 생활했다. 일본 와세다대 기계공학과에 다니던 그는 조국이 광복을 맞은 1945년 귀국해 남조선경비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지금의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으로, 이곳에서 박 명예회장은 생도로, 박정희 대통령은 중대장으로 첫 인연을 맺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당시 대령이었던 박 회장은 육사에서의 인연으로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비서실장에 임명됐다. 이후 1963년 소장으로 예편한 그는 역시 박 대통령의 지시로 텅스텐 수출 업체인 대한중석 사장을 맡았다. 5·16 군사정변 이후 군부 요인들이 정치에 나선 것과 대조적으로, 박 회장은 이때부터 기업인의 길을 걸었다.
1968년에는 창설 요원 39명과 함께 포항제철(지금의 포스코)을 창립했다. 제철소 건설 현장인 포항의 숙소와 사택에서 줄곧 숙식을 해결하고 군화를 신고 다니며 현장 직원들을 독려한 건 지금도 유명한 일화다. 특히 ‘우향우 정신’으로 표현되는 고인의 의지는 지금도 후배 경영인들에게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다.

박 회장은 제철소 건설 자금이 모자라자 대일 청구권 자금을 전용하기로 결정했다. “조상들의 피와 땀을 대가로 짓는 제철소 건설에 실패한다면 모두 우향후해 영일만에 빠져 죽자”는 게 박 회장의 각오였다.
포항제철은 창립 5년 만인 1973년 6월 제1용광로에서 첫 쇳물을 생산하는데 성공했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시작한 포항제철은 현재 세계 철강 업계 3위인 포스코로 성장했다. 박 회장이 ‘한국 철강 산업의 아버지’이자 카네기를 뛰어넘는 ‘세계의 철강왕’으로 불리는 이유다. 창립 당시 16억 원이던 포스코의 자산 규모는 지난해 69조4000억 원을 기록했다.

문민정부 출범 후에는 탈세와 뇌물 수수 혐의 등으로 4년간 일본에서 유랑 생활을 하기도 했다. 1997년 들어 자민련 총재를 맡으며 정계 복귀에 성공했고 국민의 정부 시절 국무총리까지 올랐으나 이마저도 부동산 투기 의혹이 불거지며 물러나야 했다. 이후 2001년 들어 포스코 명예회장에 재추대됐고 2008년에는 자신의 호를 딴 사회 공헌 재단인 청암재단의 이사장을 맡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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