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과 도전, 탐욕과 좌절의 연대기

올해 화제를 모은 영화 ‘머니볼’은 돈이 곧 성적으로 통하는 메이저리그에서 비주류 외인부대로 부자 구단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든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의 기적 같은 실화를 그린 작품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야구가 아니라 경제에 대한 영화다.

시장의 비효율성과 기회, 데이터 분석의 위력에 대한 이야기가 실감나게 그려진다. 비단 머니볼뿐만이 아니다.

최근 복잡한 경제 현상과 비즈니스의 이면을 그린 영화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영화는 세계를 보는 또 다른 창이다.

올해가 가기 전에 놓치지 않고 봐야 할 비즈니스 영화 6편을 엄선했다.
Brad Pitt, left, and Jonah Hill star in Columbia Pictures'  drama "Moneyball."
Brad Pitt, left, and Jonah Hill star in Columbia Pictures' drama "Moneyball."
‘머니볼’의 주인공인 빌리 빈(브래드 피트 분) 오클랜드 어슬레틱스 단장은 ‘감’보다 과학과 통계를 신봉하는 야구계의 이단아다. 모든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이 탐내던 초특급 유망주였지만 결국 실전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 불명예 은퇴를 선택해야 했던 자신의 경험에서 기존 야구에 대한 불신을 갖게 됐다.

오클랜드 어슬레틱스는 메이저리그 30개 구단 가운데 가장 가난한 팀 중 하나다. 빈 단장이 부임하면서 좋은 성적을 내던 오클랜드는 2002년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제이슨 지암비, 자니 데이먼, 제이슨 이슬링하우젠 등 팀의 주력 선수 3명이 한꺼번에 팀을 떠나가게 된 것이다. 이들의 실력에 걸맞은 연봉을 줄 형편이 안됐기 때문이다. 빈 단장은 부자 구단에 견주면 ‘푼돈’에 불과한 돈으로 1번과 4번 타자, 그리고 마무리 투수라는 기둥이 빠져버린 팀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
올해가 가기 전에 꼭 봐야 할 비즈니스 영화 6선
나이 많은 구단 고참 스카우터들은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선수 영입 문제를 놓고 관행과 주관적 판단만을 고집하는 그들을 보며 빈 단장은 절망한다. 부자 구단들과 똑같은 방식으로는 결코 그들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그때 예일대 경제학과를 나온 피터 브랜드(조니 힐 분)라는 젊은이가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 준다. 빈 단장은 야구를 통계학적·수학적으로 분석하는 세이버매트릭스를 선수 분석에 적용하는 그를 단장 보좌역으로 전격 기용했다.
올해가 가기 전에 꼭 봐야 할 비즈니스 영화 6선
이때부터 팀을 재탄생시키는 험난한 싸움이 시작된다. 감독과 스카우터들은 “야구는 컴퓨터 숫자풀이가 아니다”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전통적 관점에서는 체격 좋고 잘 때리고 수비 잘하는 선수들이 최고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빈 단장과 브랜드는 출루율을 가장 중시했다. 안타를 친 선수나 볼넷을 고른 선수나 1루로 나갔다는 점에서는 같은 성과를 올린 것이라는 논리다. 오클랜드는 투구 폼이 이상하거나 나이가 많다는 등 이런저런 편견으로 소외받던 선수들을 차례차례 발탁했다.

개혁은 순탄치 않았다. 2002년 시즌 초반 오클랜드의 성적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빈 단장이 위기에 몰렸다. 하지만 뚝심 있게 밀고 나가자 놀라운 일어 벌어졌다. 시즌 초반 최하위권에 머무르던 오클랜드는 정규 시즌 20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2002년 메이저리그 최고 부자 구단인 뉴욕 양키스는 팀 총 연봉으로 1억2600만 달러를 쏟아 부었다. 가난한 오클랜드는 3분의 1에도 못 미치는 4000만 달러에 불과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오클랜드가 양키스를 밀어내고 1위를 거머쥔 것이다.

이 영화는 ‘뉴욕타임스 매거진’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인 마이클 루이스의 2003년 저서를 바탕으로 했다. 한때 살로먼브러더스에서 일한 그는 채권 딜러의 세계를 그린 ‘라이어스 포커’로 이미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경제 저술가다. 영화에서는 실제와 일부 달라진 부분도 있다. 극중 브랜드는 예일대 경제학과 출신으로 나오지만 그의 모델이 된 폴 디포데스타는 하버드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영화는 빌리 빈이라는 한 인물의 삶과 집념, 도전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간다. 이 때문에 영화만으로 그들이 어떻게 ‘기적’을 만들어 낼 수 있었는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영화에서 빈 단장과 브랜드가 추구한 ‘새로운 야구’는 간략하게만 그려질 뿐이다. 마이클 루이스의 책 ‘머니볼-불공평한 게임에서 승리하는 법’을 함께 봐야 하는 이유다.


빅 데이터의 시대 예고하는 ‘머니볼’

이야기는 두 갈래로 거슬러 올라간다. 첫째는 1977년 ‘야구 개요’를 처음 펴낸 빌 제임스다. 식품 공장 야간 경비원 출신인 그는 ‘야구의 모든 것은 통계에 있다’는 혁신적인 주장을 펼치며 세이버매트릭스 이론을 정립했다. 빌 제임스는 많은 야구팬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지만 1990년대 후반까지도 메이저리그에서는 이단적인 주장으로 취급됐다. 바로 빈 단장이 ‘야구 개요’의 애독자 중 한 명이었다.

또 하나는 금융권에서 시작된 흐름이다. 1980년대 초반 하버드·스탠퍼드·매사추세츠공과대(MIT) 연구실에서 수학자·통계학자·과학자들이 대거 월스트리트로 이동했다. 이들은 직감에 의존하는 대신 정량적 통계 분석을 통해 거액을 벌어들였다. 파생 상품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시장의 비효율성을 잘 활용하면 누구나 억만장자가 될 수 있다는 걸 증명한 것이다. 이 중 일부가 야구 선수 시장에도 이와 유사한 비효율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인 선발과 선수 트레이드는 성공 확률이 터무니없이 낮은 게임이다. 정형화된 가치 평가 모델도 없었다. 오직 감과 경험에만 의존했다.

1994년 파생 상품을 분석하던 두 젊은이가 AVM 시스템이라는 야구 선수 전문 분석 회사를 설립했다. 이들은 과거 10년 동안 메이저리그에서 벌어졌던 모든 경기의 세부 사항을 완벽하게 데이터화했다. AVM 등장을 눈여겨본 폴 디포데스타는 빈 단장에게 스카우트되자마자 이 시스템을 구단에 도입하도록 설득했다. 이후 디포데스타는 AVM 방식을 모방해 자신만의 모델을 만들어 냈다.

야구 경기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은 이미 과거 수천 번 이상 반복된 것이다. 디포데스타는 경기 상황을 작은 단위로 쪼개 이를 모두 점수화한다. 경기 도중에 벌어지는 모든 플레이들이 아주 미묘하게 팀의 득점 기회를 변화시킨다고 본 것이다. 이를테면 노아웃에 주자가 없는 상황에서 타자가 초구를 맞을 경우 ‘기대 점수’는 0.55점이다. 이와 똑같은 상황에서 야구팀의 평균 득점이 그렇게 나왔기 때문이다. 타자가 2루타를 치면 그는 노아웃에 주자가 2루로 나간 새로운 경기 ‘상황’을 만들어 기대 점수는 1.1점이 된다. 2루타를 치고 나간 선수는 팀의 득점에 0.55점(1.1점-0.55점)을 기여한 것이다. 점수화 방식은 수비도 마찬가지다.

이는 선수의 기량을 수치로 환산해 비교할 수 있게 해준다. 이를테면 중견수 A가 자신의 수비 범위로 타구가 날아왔을 때 기록한 기대 점수를 과거 10년간 똑같은 상황의 평균치와 비교하면 그가 얼마나 많은 실점을 막아 줬는지 계산할 수 있다. 또한 만약 B가 그 자리를 대체하면 팀의 실점이 얼마나 늘어날지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이는 2002년 오클랜드가 팀의 주력 선수 3명을 내보내고도 경기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을 잘 보여준다. 빈 단장의 목표는 특정 개인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집합체, 즉 팀 전체의 완성도를 재현해 내는데 맞춰졌다. 그는 ‘제2의 지암비’를 찾을 수도 없고 찾을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지암비를 구성하는 여러 부분 중 한 부분을 갖춘 선수를 찾아 지암비보다 훨씬 저렴한 값에 사오는 게 가능했다.

장영재 한국과학기술원 산업·시스템공학과 교수는 “머니볼은 미국 MBA생들의 필독서”라며 “최근 경영 화두인 빅 데이터 시대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잘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는 머니볼에서 말하는 ‘통계’는 빅 데이터를 의미한다고 강조한다. 통계는 기본적으로 전체 데이터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소수 표본을 통해 전체를 유추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빅 데이터는 모든 데이터를 확보하고 활용하는 데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이 밖에 2009년 이후 나온 영화 가운데 볼만한 비즈니스 영화들을 정리했다.
올해가 가기 전에 꼭 봐야 할 비즈니스 영화 6선
●마진콜

2008년 9월 세계 금융 위기가 터지기 바로 전날 한 월스트리트 금융회사의 긴박했던 24시간을 그린 영화다. 갑작스러운 해고 통보를 받은 리스크관리부장이 신참 펀드매니저에게 한번 들여다보라며 작업 중이던 파일을 건네고 떠난다. 이를 살펴보던 펀드매니저는 회사가 당장 내일이라도 파산할 수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한다. 그날 밤부터 새벽까지 전 임원진이 출동하고 급기야 회장이 헬기를 타고 날아온다. 경영진은 다른 회사들이 눈치 채기 전에 모든 포지션을 하루 만에 팔아치우라는 은밀한 지시를 내린다.
올해가 가기 전에 꼭 봐야 할 비즈니스 영화 6선
●컴퍼니맨

모든 삶을 회사에 바쳤지만 기업 구조조정으로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은 세 남자의 이야기다. 미국판 ‘IMF 스토리’인 셈이다. 벤 애플렉은 집과 자동차까지 팔아치우고 쪼들리는 생활을 하지만 자존심 때문에 연봉 12만 달러를 포기하지 못한다. 크리스 쿠퍼는 밤늦게까지 서류 가방을 들고 술집을 전전하면 멀리서 회사에 돌멩이만 던지다가 결국 자살을 선택한다. GTX 창업 멤버이자 사장의 평생 친구였던 토미리 존스는 ‘주주 이익’이 아니라 ‘직원과의 공생’을 추구하는 새로운 기업을 세운다.
올해가 가기 전에 꼭 봐야 할 비즈니스 영화 6선
●인사이드잡

2008년 세계 금융 위기에 대한 탐사 보고서다. 당시 주역들을 하나하나 찾아가 카메라를 들이대고 정공법으로 질문을 던진다. 소위 전문가와 정책 담당자 가운데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규제 완화 논리를 개발해 주고 거액의 지원금을 받거나 파산한 금융회사에 퇴직금을 두둑하게 챙긴 부끄러운 행적을 파고들 때 그들이 당황하고 화를 내며 동문서답하는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다. 마이클 무어처럼 흥분하지 않고도 인터뷰와 통계, 팩트만으로 누가 진짜 책임을 져야 하는지 보여준다. 올해 아카데미 다큐멘터리 작품상을 받았다.
올해가 가기 전에 꼭 봐야 할 비즈니스 영화 6선
●하게타카

2007년 방영돼 인기를 모은 NHK의 6부작 드라마를 영화화했다. 주요 등장인물은 그대로지만 2008년 터진 금융 위기로 달라진 상황을 스토리에 반영했다. 일본의 대형 자동차 회사가 외국계 펀드의 공격을 받으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놀랍게도 이 펀드의 배후에는 중국의 국부 펀드가 있다. 일본 자동차 업체를 사들여 고급 기술을 빼가려는 것이다. 한때 벌처 펀드로 이름을 날리다 변하지 않는 일본 기업에 절망해 은둔 생활을 하던 천재 펀드매니저 오모리 나오가 백기사로 나서며 자존심을 건 정면 승부가 펼쳐진다.
올해가 가기 전에 꼭 봐야 할 비즈니스 영화 6선
●작전

국내에서 주가 조작을 소재로 한 최초의 영화다. 백수 청년 강현수(박용하 분)는 ‘찌질한’ 인생을 한 방에 갈아타기 위해 주식에 도전한다. 수년간의 독학을 거쳐 주식 그래프를 자유자재로 읽어낼 수 있는 프로 개미가 되어 수천만 원을 손에 쥔다. 하지만 그가 건드린 것은 전직 조폭 출신과 특급 펀드 매니저가 작업 중인 작전주였다. 강현수는 이들에게 엮여 600억 원짜리 초대형 주식 작전에 투입된다.
올해가 가기 전에 꼭 봐야 할 비즈니스 영화 6선
취재=장승규 기자 sk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