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유럽 vs 신평사…총성 없는 전쟁


직원 A: “그 등급은 말도 안 되는 것이었어.”
직원 B: “평가 모델이 실제 위험의 절반도 반영하지 않은 걸 나도 잘 알아.”
직원 A: “아예 등급을 부여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직원 B: “어쩔 수 없잖아. 우린 소가 만든 상품이라도 등급을 매겨야 돼.”


2007년 4월 신용 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직원들 사이에서 오간 e메일이다. 당시 신용평가사 내부에 만연한 도덕 불감증을 보여준다. 대화 내용은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대출)발 금융 위기가 한창이었던 2008년 10월 하원 청문회에서 공개됐다. 무디스의 한 직원은 임원에게 보낸 e메일에서 “(매출을 위해) 우리는 영혼을 악마에게 팔았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금융 위기 전 신평사들은 부실한 모기지 증권에 최고 등급을 부여했다. 고객 이탈을 막아 수익을 올리기 위해서였다. 위기가 터진 뒤 신평사들은 부랴부랴 모기지 증권의 신용 등급을 대거 낮췄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뒷북’이라는 비난이 빗발쳤고 의회 청문회에 불려 다니는 신세가 됐다. 글로벌 금융계를 호령했던 신평사들에 ‘위기를 잉태한 주범’이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모기지 증권의 부실 위험을 제때 경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근 신평사들은 2008년 금융 위기 때와는 다른 모습이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재정 위기가 확산되자 하루가 멀다고 유로존 국가와 금융회사들의 등급을 강등하거나 강등 경고를 내놓고 있다. S&P는 지난 8월 사상 처음으로 미국의 신용 등급을 최고인 ‘AAA’에서 ‘AA+’로 강등했다. 12월 7일에는 유로존 15개국의 등급 강등을 경고했다. ‘AAA’ 등급을 받고 있는 독일·프랑스 등 6개 국가들도 검토 대상에 포함됐다.
등급 하락 ‘경고’에 ‘영업정지’ 맞불
미국 강등 이어 유로존도 연일 경고

12월 8~9일 EU 정상회의 전후로 신평사들의 경고가 잇따르자 유럽 재정 위기 해결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독일·프랑스 등 유로존 국가들의 신용 등급이 한꺼번에 강등되면 유럽 재정 위기 해결이 더욱 힘들어질 것이란 지적도 나왔다. S&P는 정상회의 직전에 경고장을 날려 ‘정치적 압박’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신평사들이 이처럼 등급 강등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것은 2008년 금융 위기 때처럼 책임 추궁을 받지 않기 위해서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신평사들의 잇단 경고에 유럽은 발끈했다. 장 클로드 융커 유로존 재무장관회의 의장은 S&P의 유로존 등급 강등 경고가 나온 직후 “S&P의 유로존 등급 강등 경고는 매우 과장된 것”이라고 반발했다. 또 “S&P가 EU 정상회의를 앞두고 발표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라며 발표 시점이 정치적이라고 비판했다.

EU 금융시장 감독기구도 문제가 발견되면 영업정지 등 엄중한 제재를 각오하라고 경고했다. 유럽증권시장감독청(ESMA)은 “조사관들이 11월 초부터 S&P와 무디스·피치 등 신평사들을 방문해 조사를 벌이고 있다”며 “문제가 적발되면 벌금을 부과하거나 영업정지, 라이선스 박탈 등의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SMA는 신평사들에 대한 첫 현장 조사 결과를 담은 보고서를 늦어도 내년 4월까지 공개할 방침이다.

미국도 신평사 무력화 작업에 착수했다. 미국 중앙은행(Fed) 연방예금보험공사(FDIC) 통화감사국(OCC) 등은 지난 12월 7일 대형 은행들이 보유한 자산의 위험도를 평가할 때 신평사가 매기는 등급을 활용하는 규정을 폐지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미국 정부가 이 같은 규정을 폐지하면 신용 평가 서비스 수요가 감소하고 신평사들의 금융 시스템 장악력이 약화될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전설리 한국경제 국제부 기자 slj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