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은 모두 자매, 남매, 아무리 많아야 언니 둘, 오빠 하나 정도일 때 4녀 1남이라는 우리 남매의 숫자는 어린 나이에 드는 생각에도 참 많은 식구라는 것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더군다나 친구 부모나 동네 어른들께 인사하더라도 “아이고, 부모님이 많이 힘드시겠구나”라는 말씀들이 절로 나오던 터라 어린 나이에도 그야말로 막연한 생존 경쟁이 가족 간에도 필요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넷째 딸. 딸 중의 막내인 데다가 남동생을 선물했다는 이유로 유독 더 예쁨을 받고 자라던 어린 시절,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막연한 생존 경쟁이 피부로 와 닿는 사건이 있었다. 적어도 어린 나이에 내가 느끼던 무게감은 사건이라고 하기에 충분했다. 마냥 막내 짓을 하고 놀이터에서 언니들과 뛰어놀며 퇴근길 아버지를 먼저 발견하면 뜀박질 내기를 하듯 달려가 아버지의 오른손을 차지하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던 그 시절, 갑자기 아버지는 너희 중에 딱 두 명만 대학을 보낼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그때를 기억하실지 모르겠다. 농담처럼 느닷없이 던진 말씀이었지만 난 그 순간을 지금까지 떠올릴 만큼 생생히 기억한다. 그때부터 나 혼자 형제들도 모르게 언니들을 상대로 경쟁을 벌였던 것 같다. ‘진짜 대학도 못 가면 어쩌나’ 하고…. 지금 생각하면 웃음만 나온다.
그로부터 몇 년 뒤 아버지께서 겪으신 긴장감이 초등학교 어린 시절에도 고스란히 전해졌던, 우리 형제 모두 생생히 기억하는 잊지 못할 순간이 있었다.
![[아! 나의 아버지] 비즈니스 멘토가 되어 주시다](https://img.hankyung.com/photo/202102/AD.25519870.1.jpg)
그날 아버지는 몇 십 년 몸담았던 회사를 나와 독립하실 것이라고 선언하셨고 잘되면 더없이 좋겠지만 혹시나 더 힘들 수도 있으니 우리 모두 좀 더 긴장하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셨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한다는 것, 그것에 대한 두려움과 기대, 긴장감이 어떤 것인지 간접적이었지만 아버지의 모습 속에서 그 무게감을 느끼기엔 충분했다.
그 뒤 철없는 중·고등학교 시절과 입시 전쟁을 치르느라 속속들이 알지 못했지만 오늘날 직원 수십 명이 그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며 구슬땀을 흘리는 탄탄한 공장을 만드시기까지, 이따금 가족들과 함께 술 한잔 기울이실 때마다 꺼내 놓으시던 에피소드는 가끔 우리 가족 모두를 눈물짓게 한다.
이제 6개월이 된 새내기 사장인 나는 어떤 순간에도 확실한 품질과 빠른 납기로 접대할 필요 없이 사업하셨다는 아버지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긴다.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것이 직업인 터라 제품을 만들지는 않지만 브랜드의 진정성을 파는 일에 대한 신뢰는 아버지의 일과 다르지 않으리라.
홍영은 윌로이커뮤니케이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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