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사 기질은 있는 것 같다.” 언젠가 박병엽 팬택계열 부회장이 자신을 두고 했던 말이다. 최근 박 부회장이 ‘사퇴’라는 초강력 카드를 꺼낸 지 하루 만에 채권단이 팬택의 기업 개선 작업(워크아웃) 졸업안에 전격 합의한 것은 박 부회장의 ‘승부수’가 제대로 통한 결과다. 박 부회장이 잘 쓰는 또 다른 표현처럼 ‘박병엽다운’ 선택이고 행동이었다.
팬택이 워크아웃 개시 4년 8개월 만에 경영 정상화의 길에 들어섰다. 산업은행·우리은행·하나은행·농협 등 11개 금융회사로 이뤄진 팬택 채권단은 지난 12월 7일 2138억 원 규모의 워크아웃 채권을 신디케이트론으로 전환하는 내용의 워크아웃 졸업안에 합의하고 이를 팬택 측에 통보했다. 신디케이트론은 여러 은행이 같은 조건으로 한 채무자에게 돈을 빌려주는 중·장기 대출이다.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은 207억 원의 개별 담보를 신디케이트론에 필요한 공동 담보로 제공하기로 했다. 11개 은행이 갖고 있던 2138억 원을 제외하고 새마을금고·신협 등 중소 금융사가 갖고 있는 비협약 채권 2362억 원은 회사 보유 자금과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 발행 등을 통해 팬택이 자체적으로 조달해 갚기로 했다.
팬택 채권단은 2007년 팬택이 워크아웃에 들어설 때 5년 내에 채무액 4500억 원을 갚아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었다. 이러한 ‘조건’을 모두 만족시킨 팬택은 형식적인 절차를 거쳐 12월 말 예정대로 워크아웃을 졸업하게 된다. 워크아웃 졸업과 함께 채권단은 박 부회장의 경영 복귀도 강력히 요청할 방침이다. 표면적으로 건강 이유, 채권단에 ‘쓴소리’
지난 12월 6일과 7일, 팬택은 한 편의 반전 드라마를 썼다. 2007년 4월 무리한 해외 사업 확장으로 워크아웃에 돌입한 팬택이 17분기 연속 흑자를 기록하면서 연내 워크아웃 졸업이 기정사실화되자 박 부회장의 이후 거취 또한 초미의 관심사였다. 팬택의 창업자이자 최대 주주로 워크아웃 당시 4000억 원대에 달하는 자신의 모든 지분을 내놓고 월급쟁이 최고경영자(CEO)로 회사 살리기에 매진해 온 박 부회장이 워크아웃 졸업과 함께 잃어버린 지분을 회복할 것인지가 궁금했다.
박 부회장은 이미 팬택 지분 10%에 대한 우선매수청구권을 갖고 있다. 구사주가 부실 경영에 대한 책임이 있을 때 우선매수청구권을 부여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채권단이 그의 치열한 경영 개선 노력을 높이 사 2009년 우선매수청구권을 부여했다. 이뿐만 아니라 2010년 3월에는 팬택 전체 주식의 10%에 달하는 스톡옵션도 부여받았다.
그런 그가 12월 6일 오후 긴급 기자회견을 자청해 “올해 말을 끝으로 회사를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공개적으로 밝힌 사유는 건강상의 이유였다. 박 부회장은 “지난 5년 반 거의 휴일 없이 일하다 보니 개인적으로 많이 피로하고 체력적으로 감당이 불가능한 상태”라며 “개인적으로 사람이 이렇게 일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스트레스 강도가 심하다”고 말했다.
1000억 원에 달하는 스톡옵션도 포기하겠다고 했다. 스톡옵션은 내년 3월 말까지 근무해야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건강 외 다른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질문이 쏟아졌지만 그는 “채권단과의 갈등은 없었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뭔가 석연치 않았다. 기자회견 중 박 부회장의 발언들이 의미심장했다. 그는 “채권단이 대주주에 걸맞은 행동을 하고 의사결정을 하리라고 생각한다”, “은행은 기업을 경영하는 곳이 아니다”, “하루가 멀다고 워크아웃 기업들이 줄줄이 나오고 있는데 팬택이 이 정도 해왔다면 워크아웃을 졸업한 회사도 좀 나와 줘야 한다”는 등 채권단을 겨냥한 듯한 발언들을 쏟아냈다.
우선매수청구권의 행사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할 부분”이라고 하고 경영 복귀에 대한 질문에도 “놀다가 심심하면 다시 돌아올 수도 있지 않겠나”라고 말하는 등 ‘복귀’ 가능성을 열어둔 것도 ‘다른 이유’를 짐작케 했다. 실제로 이날 밤 박 부회장은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워크아웃 졸업하려고 6개월 전부터 준비했는데 (채권단이) 회수할 돈의 가치만 생각한다”며 회사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팬택 내부는 평온…“돌아올 것으로 믿는다”
내막을 들여다보면 이랬다. 박 부회장과 채권단은 올해 말 워크아웃 졸업에 공감대를 형성하고 방법을 논의해 왔다. 박 부회장은 비협약 채권을 자체적으로 해결할 테니 협약 채권은 채권단에서 리파이낸싱을 통해 만기를 연장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일부 은행이 대출금 회수 의사를 밝히고 리파이낸싱을 위한 신디케이트론 구성 시 담보 제공 여부 등에서도 이견이 속출했다.
날짜는 다가오고 결국 박 부회장은 회사를 떠나겠다고 선전포고를 하기에 이르렀다. 박 부회장의 사퇴 소식은 채권단에 ‘강력한’ 압박이 되기에 충분했다. 채권단뿐만 아니라 팬택의 모든 임직원들까지 ‘박병엽 없는 팬택은 있을 수 없다’는 데 뜻을 같이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워크아웃 기간 동안 강력한 리더십을 보여주며 매출과 실적으로 다시 한 번 경영능력을 입증해 보인 그였다.
팬택의 경영 정상화로 박 부회장의 경영 복귀가 조심스레 점쳐지는 가운데 정작 가장 충격이 컸어야 할 팬택 내부 분위기는 평온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기자회견이 끝난 후 팬택 관계자는 “기자회견에서 박 부회장이 사퇴 카드를 꺼내들지는 전혀 몰랐다”면서도 “누구보다 회사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내린 결정이라는 것을 모든 임직원들이 알기 때문에 동요하는 직원들은 없었다”고 말했다. 팬택의 한 직원은 “(박 부회장의 사퇴 소식에) 신경 쓰지 말고 일하라는 지침이 내려진 것으로 안다”며 “대부분의 직원들이 박 부회장이 다시 경영에 복귀할 것으로 믿고 있다”고 전했다.
박 부회장은 벤처 업계에 신화적인 인물로 통한다. 1991년 직원 6명, 자본금 4000만 원으로 시작한 팬택은 2011년 3분기 기준으로 누적 매출 23조5000억 원, 누적 수출액 114억 달러를 달성한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다. 무선 호출기(일명 삐삐)를 생산하다 1997년 휴대전화로 ‘업종’을 바꾼 팬택은 지난해 ‘과감히’ 스마트폰에 올인했다.
국내 최초의 안드로이드 스마트폰 ‘시리우스’를 출시한 것을 시작으로 2010년 국내 제조업체 중 삼성전자에 이어 스마트폰 2위를 차지하고 해외시장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는 등 확실하게 자리매김하고 있다. 한편 경영 정상화 소식을 접한 팬택 임직원들은 지난 12월 7일 결의대회를 갖고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으로의 새로운 도약을 선언했다. 2015년까지 연간 매출액 10조 원, 판매 4000만 대 이상을 달성해 세계에서 손꼽히는 모바일 디바이스 제조사로 성장한다는 목표도 세웠다. 이제 팬택은 박 부회장이 돌아오는 일만 남았다.
박진영 기자 bluepjy@hankyung.com│사진 서범세 기자 joycin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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