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사’자 신화
판사·검사·변호사·의사 등 소위 ‘사자(士字)’ 직업은 모두가 부러워하는 꿈의 직업이다. 진입 장벽이 워낙 높아 아무나 쉽게 발을 들여놓을 수 없지만 일단 이 대열에 합류하면 고소득과 안정적인 삶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결혼 정보 업체들이 조사하는 배우자 직업 선호도에서 이들은 변함없이 선두 자리를 독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자 신화’는 빠르게 퇴색하고 있다. 무엇보다 신규 진입자들이 크게 늘면서 생존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법률 시장의 달라진 분위기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지표가 사법연수원 미취업률이다. 이 수치는 이미 40%를 훌쩍 넘어선 지 오래다. 선망의 대상인 사법연수원생도 10명 가운데 4명이 수료와 동시에 실업자 신세가 되는 셈이다. 올 초 수료한 40기 사법연수원생 970명 중 군입대 예정자를 제외한 취업 대상 연수생은 모두 781명이었다. 이 중 43.9%인 343명이 수료식이 열릴 때까지 일자리를 찾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기 침체 등으로 대형 법무법인이 채용 인원을 줄인데다 정부 기관과 기업들도 채용 확대를 미룬 결과라는 분석이다. 변호사·변리사·법무사 인기 하락
물론 이들은 임금 등 근무 조건만 낮춘다면 아직은 어렵지 않게 일자리를 찾을 수 있는 인력들이다. 통상 수료 후 6개월 이내에 대부분의 연수생이 취업을 끝내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지난해에는 9~10개월이 돼서야 취업이 완료되는 등 구직 기간이 점점 길어지고 있다. 사법연수원의 문을 나서기만 하면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일자리와 고액 연봉이 기다리던 시절은 이제 먼 나라 얘기로만 느껴질 뿐이다.
내년 초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1기생들이 졸업과 함께 법률 시장에 대거 쏟아져 나오면 사정이 더욱 악화될 것은 뻔하다. 전국 25개 로스쿨에서 내년 사회로 진출하는 졸업생들은 모두 2000명에 달한다. 이 중 1월에 있을 변호사 시험(합격률 75% 전망)에서 500명이 자동으로 떨어져 나간다고 하더라도 1500명이 당장 구직 대열에 나서야 하지만 이들을 받아 줄 곳이 넉넉지 않은 상황이다. 더구나 이들은 내년 초 배출되는 사법연수원생들과도 같은 시장을 놓고 경쟁을 벌여야 한다. 법조계에서는 법원·검찰·로펌 등에서 채용할 수 있는 인원이 500명 안팎에 불과할 것으로 전망한다.
당장 졸업을 앞둔 로스쿨 재학생들의 사정은 더욱 절박하다. 지난 11월 9일 서울 마포구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11 대한민국 로스쿨 취업 박람회’에는 1000여 명의 예비 졸업생들이 몰려 ‘로스쿨 취업대란’을 실감나게 했다. 서울과 수도권에 비해 취업문이 더욱 좁은 지방 로스쿨생들이 대거 몰렸다. 이날 같은 장소에서 열린 ‘대한민국 로스쿨 제도 개선을 위한 정책 토론회’에서는 로스쿨생 10명 중 8명이 졸업 후 진로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는 설문 조사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
일단 취업이 된다고 해도 과거와 같은 고액 연봉은 기대하기 어렵다. 대부분의 로펌은 로스쿨생들의 임금을 사법연수원 출신보다 낮춰 잡고 있다. 올 초 법무법인 바른은 로스쿨 출신 변호사 24명과 연수원 출신 4명을 신규 채용했다. 로스쿨 출신 임금이 연수원 출신의 50~60% 수준이라는 점이 알려졌지만 이공계 박사, 변리사, 대기업 경력자 등 쟁쟁한 인력들이 몰려 10 대 1이 넘는 경쟁률을 보였다. 로스쿨 출신을 적은 임금에 많이 뽑은 다음 1~2년 동안 데리고 있으면서 능력을 검증해야 한다는 것이 로펌 업계의 전반적인 분위기다. 취업이 안 되면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변호사 개업이다. 하지만 로스쿨 졸업생들은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더라도 개업 전에 의무적으로 6개월 동안 로펌 등에서 ‘알아서’ 수습 교육을 받도록 돼 있어 이마저 쉬운 일이 아니다. 현재 법무부는 변호사협회가 수습 교육을 일괄적으로 맡아 하는 방안을 협의 중이지만 견해차가 커 진통을 겪고 있다. 최악의 경우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고도 6개월 수습 교육을 받지 못해 개업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현재 법률 관련 직업 선호도는 상대적으로 보수가 높은 변호사가 판검사를 앞지른다. 하지만 10년 후에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판검사가 훨씬 매력적인 직업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변리사와 법무사도 전망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다. 변리사 시험 합격자 수가 늘어나고 변리사 영역에 진출하는 변호사들이 증가하고 있는 게 주요 원인이다. 인터넷을 통한 등기 처리가 확대되고 법원과 검찰에 제출하는 서류가 간소화되면서 법무사 역시 직업 매력도가 낮아지는 추세다.
또 다른 ‘사자 직업’인 의사는 특정 분야로 지원자가 몰리는 것이 문제다. 성형외과·치과·한의대 같은 인기 전공에만 의대생들이 몰리다 보니 개업 후 경쟁이 과열돼 도산하는 경우가 속출하고 있다. 지난해에만 의원 8704개, 치과의원 3541개, 한의원 4011개가 폐업 신고를 했다.
보약 수요 줄어 한의원 찬바람
정년이 따로 없다는 것이 의사의 매력 중 하나로 꼽혔지만 이마저 옛이야기가 되고 있다. 한창 인기를 누리고 있는 미용 성형 의사의 전성기는 40대 7~8년에 불과하다. 의대에 진학해 예과와 본과를 거쳐 의사고시를 치른 다음 인턴과 레지던트를 끝마치고 나면 보통 31세 안팎이 된다. 여기에다 군복무를 추가하고 당장 개업하기 부담스러워 종합병원에서 수년간 경험을 쌓는다고 가정하면 30대 후반~40대 초반에 개업하게 된다. 결국 개업하고 7~10년 안에 단단한 기반을 구축해 놓아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40대를 넘어가면 최신 기술을 모를 것이라는 선입관으로 등을 돌리는 환자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의사들도 젊게 보이기 위해 이미지 관리에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인기 직종으로 꼽히던 치과에서도 경영난을 호소하는 의사들이 늘어나고 있다. 치과 업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임플란트다. 고령화와 웰빙 바람을 타고 지난 수년간 임플란트가 업계의 블루오션으로 자리 잡아 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 성장세가 한풀 꺾였다. 현재 국내 치과의사의 80% 이상이 임플란트 시술을 할 수 있다. 치과의사 수는 매년 점점 늘어 전국 11개 치과대학에서 매년 800여 명의 졸업생이 쏟아져 나온다.
한의사는 부침이 더욱 도드라진다. 한의사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고소득이 보장되는 전문직으로 큰 인기를 누렸다. 1990년대 말 나온 드라마 ‘허준’도 한의사 열풍을 거들었다. 뒤늦게 한의대에 입학하는 30대 직장인들이 줄을 이었다. 그 결과 이제는 매년 800여 명의 신입 한의사들이 배출되고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조사에 따르면 2000년 8845명이던 한의사는 2010년 1만6038명으로 10년 만에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 반면 한의원을 찾는 환자 수는 계속 뒷걸음질치고 있다. 홍삼·복분자·구기자·산수유 등 건강 기능 식품이 보약 시장을 잠식한데다 수입산 한약재에 대한 불신, 이상기온에 따른 약재 값 상승 등도 악재로 작용하고 있다. 40대 이하 젊은층이 한의원을 찾지 않는다는 것도 걱정스러운 대목이다. 젊은 한의사들을 중심으로 약재를 직접 생산·유통하는 회사를 설립하는 등 자구책 마련에 나섰지만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장승규 기자 skj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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