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제약 업계 돌파구 있나


제약 업계가 정부의 약가 인하 정책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국회 비준으로 휘청이고 있다. 지난 11월 18일 제약 업계 관계자 1만 명이 모여 정부를 성토한 데 이어 헌법 소원 등의 소송전까지 준비하고 있다. 제약 업계 종사자들은 “국내 제약 산업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며 강한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

시작은 지난 8월 보건복지부가 ‘약가 제도 개편 및 제약 산업 선진화 방안’을 들고나오면서부터다. 약값 산정 방식을 뜯어고쳐 모든 처방 의약품 가격을 평균 17% 낮추기로 했다. 기존의 약가 제도는 특허가 만료된 오리지널 약은 원래 가격에서 20%를 내린다. 1000원짜리가 800원이 되는 셈이다. 복제약은 68% 680원이 상한 가격이다. 이후 복제약 상한 가격은 점점 더 내려간다.

그런데 내년 4월 일괄 약가 인하로 특허 만료 시 오리지널과 복제약 둘 다 53.5%로 일괄 인하하게 된다. 다만 제도 시행 첫 해는 오리지널은 70%, 복제약은 59.5%를 적용한다. 지난 9월 보건복지부는 가격 인하 대상 의약품 수를 8700개에서 1200개를 줄여 7500여 개로 조정했다. 이에 따라 인하 폭은 14%로 조정됐다. 보건복지부가 약가 일괄 인하 정책을 실시하는 이유는 악화되고 있는 건강보험 재정을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다. 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지난해 건강보험 적자는 1조3000억여 원 수준이다.

하지만 제약 업계는 약가 일괄 인하가 제약사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있다고 울분을 토했다.

단계적으로 인하해야 할 약가를 한꺼번에 내리는 것은 무방비 상태의 제약사들에폭탄을 던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얘기다.

제약 업계는 지나친 약가 인하로 국내 제약 산업이 무너질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2010년 기준 건강보험 의약품 시장 규모는 12조8000억 원이다. 제약협회에 따르면 약가 일괄 인하로 이 가운데 2조1000억 원이 줄어드는데다 지난해부터 시행되고 있는 기등재 의약품(의약품 효능과 비용을 심사받고 건강보험 급여 목록에 이미 등재돼 있는 의약품) 약가 인하에 따른 감소분 8900억 원까지 포함하면 약 3조 원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는 제약 업계 전체의 1년 영업이익(지난해 기준 1조3000억 원)을 2배 이상 초과한다는 설명이다.

김선홍 제약협회 홍보실장은 “복제약 비중이 70~80%에 이르는 국내 제약사들이 도저히 버텨낼 수 없는 구조”라고 강조했다. 김 실장은 “제약 업계 종사자가 8만 명인데 강력한 구조조정으로 이 중 2만 명이 실직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라고 덧붙였다.
[비즈니스 포커스]구조조정 불가피…신약 개발로 ‘탈출’
제약협회, 연간 3조 원 손해 주장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의 분석도 크게 다르지 않다. 조윤정 하나대투증권 애널리스트는 “약가 일괄 인하로 2012년 제약 업체의 평균 영업 이익률은 4.8%로 “2011년(10.7% 추정)보다 대폭 낮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정인 한국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상위 제약사의 2012년 순이익은 20~30%, 중소형사들의 순이익은 50% 가깝게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개별 제약사들이 느끼는 위기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제약사 관계자들은 “생산비와 물류비 등 고정비용은 그대로인 채 판매가가 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피부로 느끼는 충격은 더 크다”고 하소연했다. 지난 3분기 누적 매출액 기준으로 동아제약·녹십자·대웅제약·유한양행·한미약품 등 상위 5개사를 조사했더니 대부분 내년도 사업 계획을 세우지 못할 정도로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업계 1위 제약사인 동아제약 관계자는 “내년 4월부터 12월까지 약 1000억 원의 매출이 줄어들 것”이라고 예상했다.

전문의약품이 전체 매출의 80%를 차지하고 있는 대웅제약 관계자는 “현재 시뮬레이션을 돌려보는 과정”이라며 “엄두가 나지 않는 상황”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유한양행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이 회사 관계자는 “피해액을 정확히 추산하기가 쉽지 않다”면서도 “특단의 대책이 필요할 것”이라고 에둘러 표현했다. 한미약품도 “매출 감소분이 400억~600억 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고 밝혔다. 지난해 매출 7910억 원 중 전문의약품 매출이 1104억 원(13%)에 불과한 녹십자는 상대적으로 타격이 덜할 전망이다.

제약 업계가 분노하는 것은 ‘약가 인하’가 아니라 ‘일괄 약가 인하’다.

약가 인하가 필요하다면 제약사들이 변화된 상황을 준비할 수 있도록 단계적으로 인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름을 밝히기 꺼리는 제약사 관계자는 “보험 재정의 적자 폭이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약가 인하는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한다”면서도 “보험료 인상에는 손을 대지 않고 약가 인하만 추진하는 것은 유권자들의 표심을 고려한 정치적인 행위”라고 정부 측을 몰아세웠다.

더구나 대형 제약사를 중심으로 신약 개발에 적극 나서는 등 글로벌 경쟁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시점에 갑자기 약가를 일괄 인하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국은행이 확인한 제약 업종의 생산원가는 54% 수준인데, 인하된 53.5%대의 가격으로는 연구·개발(R&D)은 물론 정상적인 기업 경영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이다. 국내 제약사들이 본격적인 신약 개발에 나선 것은 2000년대 들어서다. 일반적으로 신약 개발은 10~15년 정도 걸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정부의 일괄 약가 인하로 국내 제약사들의 신약 개발 투자가 위축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김지현 키움증권 애널리스트는 “(일괄 약가 인하는) 최근 활발해지고 있는 R&D 역량을 크게 떨어뜨릴 것”이라고 진단했다.
18일 서울 장충체육관에 보건복지부의 일방적인 약사인하정책 강행에 반대하는 의사표명을 하기 위해 전국 200여 제약사 1만명이 모였다. 114년 제약 역사상 국내 제약사 직원이 한자리에 모인건 이번이 처음이다./김영우 기자youngwoo@hankyung.com20111118....
18일 서울 장충체육관에 보건복지부의 일방적인 약사인하정책 강행에 반대하는 의사표명을 하기 위해 전국 200여 제약사 1만명이 모였다. 114년 제약 역사상 국내 제약사 직원이 한자리에 모인건 이번이 처음이다./김영우 기자youngwoo@hankyung.com20111118....
인원 감축 등 구조조정 불가피

제약 업계는 대응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일부 중소형사는 이미 인원 감축 등의 구조조정안을 마련해 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아제약·녹십자·대웅제약·유한양행·한미약품 등 상위 5개사는 2012년 사업 계획을 수립하지 못한 상태다. 당장에 인원 감축 등의 구조조정 계획은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 좀 더 상황을 지켜보면서 다각도로 타개책 마련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다만 5개사 모두 신약 개발과 R&D 투자 등으로 현 상황을 극복하겠다는 전략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대다수 제약사들이 약품 및 각종 비용 구조조정에 적극 나설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실제로 적정 마진이 사라진 저가 의약품의 시장 퇴출이 속출할 것으로 예상된다. 제약협회는 “고가 의약품이 저가 시장을 대체해 보험 재정의 절감 효과가 반감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괄 약가 인하로 공포에 빠져 있는 제약 업계에 한미 FTA 체결은 설상가상이다. 무엇보다 ‘허가·특허 연계’가 핵심 쟁점이다. ‘허가·특허 연계’는 다국적 제약사가 특허 관련 소송을 제기하면 자동으로 복제약의 판매가 중단되는 조항으로 3년간 유예되지만 국내 의약품 피해는 불가피한 상황이다. 보건산업진흥원에 따르면 한미 FTA 체결로 국내 의약품 생산이 연평균 686억~1197억 원 감소할 것으로 예측했다. 배기달 신한금융투자 애널리스트는 “복제약에 의존하는 영세 업체의 입지가 더욱 좁아질 것으로 보여 한미 FTA는 정부가 추진 중인 약가 인하와 맞물려 국내 제약업의 구조조정을 앞당길 것”이라고 전망했다.

사상 유례 없는 위기에 처한 제약 업계는 헌법 소원 등의 소송전, 인원 감축을 포함한 구조조정, 신약 개발·R&D 강화를 통해 글로벌 경쟁력을 높이는 데 힘을 쏟으면서 향후 활로를 모색할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약가 일괄 인하’라는 대형 폭탄을 맞은 후유증부터 치료해야 한다. 따라서 다가오는 2012년을 잘 넘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졌다.





권오준 기자 j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