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간의 미국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지도 벌써 6개월이 지났다. 고국에 계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져 ‘아, 한국에 돌아가면 자주 만나 뵙고 보살펴 드려야지’라고 다짐했지만 막상 이런저런 세사의 핑계로 그렇지 못한 자신이 부끄럽다.

아버지는 1970년대의 여느 가장이 그러하셨듯이 말보다 마음과 행동으로 자식을 향한 사랑을 표현하셨던 분이다. 엄하고 무서운 아버지 대회에 나가면 아마도 최소한 장려상은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당신.

그런 아버지가 이 큰아들을 군대에 보내신 날, 집에 돌아와 섭섭함을 이기지 못해 펑펑 우셨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난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로 믿지 못할 깊은 감동의 그 순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큰며느리가 감히 양말도 신지 않고 시아버지를 대한다고 불호령 하시던 분. 아무리 세상이 그리 변해도 자신의 며느리가 바지 차림으로 나타나는 걸 용서하지 못하시던 분. 그런 아버지가 정년퇴임 후 함께 나들이 간 바닷가에서 어린애 같이 너무나 순진한 표정으로 한참을 웃더니 눈가에 눈물이 고였었다. 감정의 폭이 심해지신 건가.

그로부터 서서히 찾아온 치매 증세. 어른 섬기기를 어려서부터 자연스레 보아온 나는 당연히 그런 아버지의 무너지는 모습을 이해할 수도, 받아들이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저렇게 힘없이 무너질 수 없는 일인데….
가끔 소리 지르는 기력이 있음에 감사하며
심한 증세는 아니지만 아버지는 점점 말을 잃어가고 있고 위생 관념도 희박해지신다. 그래서 1주일에 한 번이나마 아버지를 찾아 뵙고 목욕과 면도를 해드리지만 집에 돌아와 보면 내 팔뚝과 가슴팍에 선물로 남겨진 아버지의 할퀸 자국들.

“어떻게 아빠는 할아버지 몸을 아무렇지도 않게 씻겨 드리냐”는 아들 녀석의 질문에 “인마, 내가 태어났었을 때 할아버지가 아빠 대소변까지도 예쁘다며 얼마나 신기해하셨는데?”라며 이젠 아빠가 할아버지를 보살필 때라고 너스레를 떨어본다.

1주일에 한 번씩이라도 문안드리겠다는 결심이 흔들릴 때면 아들딸 녀석들은 “그래, 그래 보시지? 나중에 나는 안 그러나”라며 은근히 협박하는 장성한 자식들.

자식이 떡을 달라는데 돌덩이를 줄 아비가 어디 있겠냐는 말이 있지만 이젠 그 말도 ‘아비가 돌덩이를 달라고 해도 맛난 떡을 드려야죠’라고 낮아지는 모습들이 자연스러운 우리 가족.

이 풍성한 우리 집은 아버지의 말없는 헌신과 손해 보는 수고, 의리를 중히 여기며 여러 사람을 섬기셨던 아버지로부터 눈으로 배워 온 작은 유산이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아버지가 가끔씩 소리 지를 수 있는 기력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그 든든함이 내 생활의 힘든 일들을 떠받쳐주고 있어서 고맙다.

어젯밤에도 꿈을 꾸었다. 아버지가 나타나셨다. “홍덕아, 너 내가 치매 걸렸다고 내게 서운한 말 한 것. 내가 다 들었다 이놈.” 이렇게 내게 다가와 내게 말씀하신 것 같다. “아버지. 죄송해요. 제 새끼를 아버지보다 더 중한 것처럼 여겼던 것 용서해 주세요.” 이렇게 싹싹 빌다가 잠에서 깨었다. 그런데, 그래도 무섭지 않은 꿈이었다.

김홍덕 세미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