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온 지 어느덧 25년, 이제 고향 사투리도 모두 잊을 정도로 완전히 서울 사람이 다 됐다.

그러나 이렇게 한 집안의 가장으로 바쁘게 정신없이 살아오면서 가끔 생각하곤 하는 것이 아버지에 대한 생각인데, 그것은 바로 아버지에 대한 고마움과 애틋함이다. 고마움은 20년 가까이 아버지 곁에서 성장하면서 느꼈던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의 아버지의 책임감과 근면함이요, 애틋함은 대한민국 많은 아버지들의 표상이었던 무정과 무뚝뚝한 모습에서 어린 시절 느꼈던 아버지에 대한 서운함과 안타까움이다.
[아! 나의 아버지]고마움과 애틋함에 대한 단상
아버지는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 평생 농사일을 하시며 4남 3녀를 낳으시고 기르셨고 지금도 당신이 일궈 놓은 논과 밭을 거닐면서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하신다. 아버지는 사람은 농사를 지을 줄 알아야 굶어 죽지 않는다는 굳은 신념으로 휴일이면 가족들을 논과 밭으로 이끌면서 농사일을 돕도록 하셨다.

아버지는 논농사를 지으면서도 가을철이 되면 그 많은 논의 벼를 혼자 베고 추수하셨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농기계가 발달해 며칠이면 손쉽게 추수를 할 수 있지만 아버지는 그 많은 논의 벼를 혼자 베셨고 휴일이면 가족들을 동원해 거들도록 하셨다. 또 여름이면 벼 병충해 예방을 위해 분무기를 이용해 농약을 뿌리곤 했는데, 아버지는 침투력이 강한 농약에 중독돼 3번이나 위급한 상황을 겪으셨고 또 그때마다 가족의 걱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기적처럼 회복하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이 농사일을 계속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평생 농사일이 전부인 분이셨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산으로 들로 돌아다니며 농사일에만 전념하셨던 기억밖에 없다. 또한 자식들에게 따뜻한 마음 한 번 안 주셨고 매번 부드러운 말보다 거칠게 말씀하셨으며 다독거리기보다 빗자루를 들고 혼내셨다.

하지만 그렇게 일만 하시고 무섭기만 하셨던 아버지는 내가 서울로 대학에 진학한 후에는 그 어려운 살림에도 서울에서 유학하는 아들을 위해 등록금을 한 번도 미루지 않고 꼬박 보내 주셨다. 나는 아르바이트를 한 번도 하지 않고 여느 부유한 부농의 아들처럼 공부에만 열중하며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 지금 부모가 되어 생각하곤 하는데 학업에 열중할 수 있게 해 주신 아버지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간절하기만 하다.

오늘 이 시간에도 나는 새벽에 출근해 밤늦은 시간까지 내가 선택한 일에 집중하며 내일을 준비하고 있다. 생각해 보니 20년의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 이러한 생활을 반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가장으로서 가족의 행복의 위해 한눈팔지 않고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그 옛날 내가 무서워하고 미워했던 아버지처럼 말이다. 어린 시절 농사일만 하시는 아버지가 그토록 싫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도 그때 아버지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 그때 아버지의 모습은 가장으로서의 책임감과 평생 근면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없는 가르침이 아니었나 생각이 된다.

무정했던 아버지의 대한 애틋함도 이제는 아이들에게 다정스러운 아버지가 되기 위한 동기가 되었다. 이제 나도 아버지가 되니 그때의 가족들을 위한 헌신적인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아이들도 나중에 아버지가 됐을 때 지금의 나처럼 아버지가가 멋진 아버지였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만 간절할 뿐이다.

신동성 KB투자증권 여의도지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