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협업 패러다임’이 각광받나
요즘 이성훈 도두람컨설팅 대표는 거의 매일 중소기업을 방문한다. 대·중소기업협력재단에서 위촉한 ‘협업 관리자(PM)’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표는 5개 협업체의 11개 중소기업을 관리한다. 매월 1회씩 해당 기업을 방문해 협업 진행 상황을 모니터링하고 조언해 주는 것이 주된 임무다. 협업 파트너 찾기와 신규 협업 사업 참여 기업 발굴, 협업 관련 교육도 빼놓을 수 없다. 현재 전국적으로 이 대표 같은 협업 관리자가 수도권에 6명, 지방에 4명이 활동 중이다.이 대표는 “중소기업도 대부분 협업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며 “기업 간 신뢰 구축이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말했다. 상당수 중소기업 경영자들이 섣부르게 협업에 참여했다가 영업 비밀만 빼앗기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대다수 기업들이 웬만해선 회사 속사정을 잘 보여주지 않는다. 특히 재무 수치와 관련해서는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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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들 간의 협력은 예전에도 다양한 형태로 이뤄졌다. 대개 같은 산업 단지 내에서 최고경영자(CEO)끼리 10년 이상 ‘술 마시고 밥 먹으며’ 쌓아 온 끈끈한 관계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갈수록 경영 환경이 급변하고 있다. 시장과 기술은 더 이상 기업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과거처럼 수십 년간 신뢰를 차곡차곡 쌓아 나갈 여유가 없다. 이 대표는 “이 부분에 정부의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부에서 협업 파트너 후보 기업들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신뢰성 높은 정보를 제공하면 협업 확산 속도가 훨씬 빨라질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협업이 필요한 가장 큰 이유로 융합화라는 새로운 경영 환경을 꼽았다. 이 대표는 “빌 게이츠 전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이 한국을 방문해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을 만난 것은 융합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라며 “앞으로는 융합을 못하면 글로벌 경영 환경에서 경쟁 우위를 확보하는 것이 불가능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중소기업도 마찬가지다. 중소기업들은 융합에 필요한 다른 기술을 사들이거나 따로 전문 인력을 채용할 여력이 없다. 이 대표는 “협업은 융합의 전제 조건이자 기초 인프라”라고 말했다.
한창희 한양대 경상대 교수는 기존의 기업 간 협력 관계와 본격적인 협업의 차이를 ‘위험 공유’라는 측면에서 설명한다. 전통적인 하청 관계인 A, B 회사가 있다고 하자. A 기업이 새로운 제품을 연구·개발(R&D)을 시작하면 그에 맞춰 B 기업도 미리 준비해 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제품을 제때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B 기업이 A로부터 주문을 받고 나서 준비에 들어가면 이미 늦다. B 기업 쪽에서 보면 사전 준비에 적지않은 자금과 인력의 투입이 필요하다. 또 B 기업은 A가 미리 R&D 정보를 내 줘야만 준비 작업에 들어갈 수 있다. 이는 두 기업의 위험 공유와 신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한 교수는 “협업은 새로운 아이디어 제품 개발을 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공정 개선과 생산원가 절감, 품질 향상에도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 교수는 협업은 창업 활성화와도 직결되는 문제라고 지적한다. 일단 창업하고 나면 초기 단계에서 다른 기업과의 네트워크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한 교수는 “창업 기업이 히든 챔피언으로 성장하기 위해 꼭 필요한 중간 단계가 바로 협업”이라고 말했다. 무조건 창업만 하게 하고 나서 무책임하게 방치할 게 아니라 다음 단계로 협업에 대한 정책적 지원이 따라야 한다는 설명이다.
한 교수는 한양대 창업보육센터에 입주한 1인 벤처기업 조인크로스를 대표적인 사례도 들었다. 이 회사는 샤프심 같은 미세 물건을 쉽게 집을 수 있는 특수 목적용 장갑을 생산한다. 장갑 업체에서 물건을 대량으로 가져와 여기에 특수 기술로 만든 ‘핑거 팁’을 씌우는 방식이다. 창업자는 이 기업을 강소기업으로 끝까지 키우겠다는 꿈을 갖고 있지만 최근 계속되는 인수·합병(M&A) 제안에 고심하고 있다. 장갑 업체에서 아예 특허 기술과 기업을 매각하라고 제안한 것이다.
한 교수는 “협업 환경만 갖춰 주면 이 업체는 회사를 팔지 않고도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다”고 말했다. 협업을 통해 기존 장갑 업체의 생산 라인에 핑거 팁 공정을 집어넣는 방식이다. 이렇게 하면 물류비용 등 원가도 대폭 낮출 수 있다. 한 교수는 “이제는 ‘적과의 동침’도 주저하지 않을 만큼 경영 환경이 급변하고 있다”며 “협업에 대한 국내 기업들의 인식이 달라져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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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업의 효과는 대·중소기업협력재단의 중소기업 협업 지원 사업 참여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장영순 명지대 경영학과 교수가 작년 말 119개 협업 사업 참여 기업에 물은 결과 전체의 85%가 협업 결과물의 기술 수준에 만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많은 기업이 제품 개발과 개선(58.8%)을 목적으로 협업에 참여한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또한 대다수 기업이 생산성 향상(75.8%)과 인지도 향상(70.9%), 신시장 진출 향상(60.0%)에 만족을 나타냈다. 또한 협업 사업 참여 후 33.3%가 연구·개발 부서나 연구소를 신설했으며 고용 인력도 업체당 2.3명 증가했다.
대·중소기업협력재단에서 협업 사업 승인을 받으면 자금 지원 등 각종 혜택을 누릴 수 있다. 2007년 이후 84개 협업체, 119개 중소기업(올해 4월 말 기준)이 협업 승인을 받았다. 직원 수 10명 이하의 소기업이 전체의 45.6%로 가장 많았다. 100명 이상 기업은 7.2%에 불과했다. 매출액 30억 원 미만이 65.5%를 차지했으며 전체의 62.9%가 수도권 기업이었다. 협업 참여 형태는 다양하다. ‘생산+판매’ 결합도 있고 ‘연구·개발+연구·개발’이나 ‘연구·개발+생산+판매’도 눈에 띈다. 참여 기업 수는 2개사 협업이 69%로 가장 많고 3개사 협업 26%, 4개사 이상 5%순이다.
국내에서 중소기업 협업은 아직 초기 단계다. 많은 경영자들이 다른 기업들과 수평적 네트워크를 형성해야만 밀려오는 경쟁의 파고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하지만 선뜻 나서는 데는 주저한다. 이성훈 대표는 “그동안 중소기업은 자기 것만 보고 자기 일만 잘하면 그만이었지만 이제는 다른 기업과 함께 갈 수 있는 유연성과 개방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물론 협업 파트너는 국내 기업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이항구 산업연구원 주력산업팀장은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기업과의 국제적 협업이 새로운 기회를 줄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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