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무게를 버텨 온 성실과 믿음
나이가 쉰에 가까워지고 아들이 성장하면서 아들과 나 사이의 모습과 나와 아버지 사이의 모습을 비교해 보는 시간이 적지 않다. 아버지는 시골 촌부의 장남으로 태어나 아주 어렵게 사범대학을 마치고 대전과 충남 지역의 고등학교 교사로 대부분의 직장 생활을 보내셨다. 진급에 관심이 없으셨는지, 능력이 없으셨는지 모르겠지만 평교사로 정년퇴임하셨다. 넉넉지 않은 종갓집 장손으로 박봉에 시달리면서도 동생들뿐만 아니라 친척들까지 보살펴야 했고 매달 한 번꼴로 제사를 지내야 하는 책임까지 져야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을 마치 천직인 양 성실하게 감당해 내셨다.

버스에서 내려 논두렁을 따라 걸어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보따리를 양손에 들고 걸어가는 아버지의 축 처진 어깨. 얄밉게 그 모습을 비추는 석양. 당시에는 몰랐지만 자라면서 나는 그 모습에서 아버지의 삶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변변치 않은 월급으로 가족과 친척들까지 책임져야 했던 장남으로서의 인생. 그러나 누구에게도 하소연하기 어려운 가장으로서의 자존심. 모든 것들이 석양에 비친 그 모습에 고스란히 투영되었다.
아버지는 자식들에 대한 믿음이 컸다. 학창 시절 시험을 못 봤느니, 성적이 떨어졌느니, 학점이 왜 이 모양이니 하는 얘기는 일절 하지 않으셨다. 요즘의 수능시험과 같은 당시 대입 예비고사에서 기대하지 않은 점수가 나와 어느 대학을 갈지 고민할 때에도 “네 생각이 옳다고 생각되면 그렇게 해라”, 미국 유학 계획을 어렵게 꺼냈을 때에도 “그렇게 해 보자”라는 말씀이 전부였다.
다만 가끔씩 당신 생각을 절제해 짧은 말씀을 던지시곤 하셨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첫 직장에 들어갔을 때 “사람은 예의 바르고 성실함을 기본으로 해야 한다”, “우리 정씨 집안사람들은 맡은 일을 소처럼 잘하는데 창의적이지 못하고 리더십이 없다”는 말씀으로 자식의 미래를 당부하셨다.
그래서인지 나는 요즘 취업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성실’이란 단어를 자주 이야기하곤 한다. 사회생활의 첫 출발점에서 개인의 능력은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많은 부분이 성실함과 노력을 통해 충분히 보완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성실함은 어려운 삶도 든든하게 버틸 수 있는 중요한 자산이라는 것을 아버지가 삶으로서 보이셨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암 수술을 받고 투병 생활을 하다 운명을 달리하셨다. 그러나 삶의 무게에 힘겨워 하시면서도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 내시고 자식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으셨던 아버지의 모습은 여전히 내 가슴속에 소중히 간직돼 있다.
아버지는 본인 인생의 교훈이 자식을 통해 내 아들과 학생들에게 은은한 향기처럼 전달되기를 바라실 것이다. 그래서 내 스스로 자문해 보게 된다. 나는 지금 내 아들과 제자들에게 아버지와 선생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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