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중앙은행 독립성, 외압에 ‘흔들’


“로렌조 비니 스마기 유럽중앙은행(ECB) 정책위원은 도대체 왜 여태까지 사임하지 않는 겁니까?”(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를 죽이기라도 합니까?”(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이탈리아 총리)

10월 23일 디폴트(채무 불이행) 위기에 처한 그리스를 구하기 위해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정상들이 브뤼셀에 모인 가운데 사르코지 대통령과 최근 물러난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 사이에 오간 대화다.

발단은 ECB 총재 교체였다. 지난 4월 프랑스는 프랑스 출신의 장 클로드 트리셰 ECB 총재의 후임으로 이탈리아 출신의 마리오 드라기 총재를 선임하는데 동의했다. 대신 이탈리아 출신의 스마기 위원 자리를 프랑스 몫으로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11월 초 트리셰 총재가 물러나고 드라기 총재가 취임하면 6명의 ECB 정책위원 가운데 프랑스 출신은 한 명도 없어지는 반면 이탈리아 출신은 드라기 총재와 스마기 위원 두 명이 되기 때문이었다.



‘정치에 굴복’ 비판 거세져

이 같은 정황이 알려지면서 스마기 위원은 10월 이탈리아 중앙은행 총재 인선 과정에서 가장 유력한 후보로 꼽혔다. 드라기 총재가 이탈리아 중앙은행 총재에서 ECB 총재로 자리를 옮기면서 생기는 공석을 스마기 위원이 채우고 스마기 위원의 자리를 자연스레 프랑스에 내주는 시나리오가 거론됐다.

그러나 이탈리아 중앙은행은 스마기 위원을 총재로 임명하려는 베를루스코니 총리에 반기를 들었다.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어쩔 수 없이 이그나치오 비스코 부총재를 총재로 승진시켰다. 기대했던 대로 스마기 위원의 ECB 정책위원 자리가 비워지지 않자 사르코지 대통령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된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스마기 위원의 조기 사퇴를 종용했다.

외압에 못 이긴 스마기 위원은 드라기 ECB 총재가 취임한 지 열흘째인 지난 11월 10일 결국 ECB 정책위원에서 물러나겠다고 발표했다. 2013년 5월까지인 임기를 채우지 못한 채 올해 말 퇴임하기로 한 것이다. ECB는 스마기 위원의 조기 퇴임 배경에 대해 밝히지 않았지만 프랑스에 ‘한 자리’ 내주기로 한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정치적 타협 때문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스마기 위원의 사퇴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ECB 안팎에서는 장 피에르 랑도 프랑스 은행 부총재, 브느와 쾨레 프랑스 경제재정산업부 부총국장, 암브로이 파욜 국제통화기금(IMF) 이사 등 프랑스 출신의 후보가 후임으로 거론됐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프랑스가 내세운 후보에 대해 나머지 유로존 국가들이 반대하지 못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로이터통신은 트리셰 총재와 몇몇 ECB 위원들이 “ECB의 독립성을 지켜야 한다”며 스마기 위원의 사퇴를 강하게 만류했다고 보도했다. 비판적인 시선을 의식한 드라기 ECB 총재는 스마기 위원의 퇴임 발표와 함께 성명을 통해 “스마기 위원은 ECB의 독립성을 지키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의 퇴임 발표는 곧바로 ECB의 독립성과 신뢰 훼손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ECB 안팎에서는 “ECB가 스스로 그토록 강조하는 ‘정치적 독립성’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FT는 “스마기 위원의 퇴임 발표를 계기로 ECB 정책위원 자리를 두고 벌어진 파리와 로마의 갈등은 끝났지만 독립성을 강조해 온 ECB는 정치적인 압박에 굴복했다는 비판을 피하지 못하게 됐다”고 분석했다.



전설리 한국경제 국제부 기자 slj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