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만 잘해서는 승자가 될 수 없는 글로벌 IT 경쟁에서 우리가 먼저 고쳐야만 하는 것은 우리끼리만, 그것도 소비자 쪽이 아니라 공급자 쪽에서 만들어진 아날로그 시장의 낡은 유물들이다.

스티브 잡스는 ‘애플컴퓨터’라는 회사명에서 컴퓨터라는 단어를 지워버리겠다고 말한 2007년에 디지털 TV로의 진출을 선언했다. 당시 시장은 아이팟(iPod)이 히트를 치면서 디지털 음악 유통이 유행병처럼 번졌고, 한편으로는 불법 복제도 극성을 부렸다. 잡스는 불법 복제를 막는 기술을 쓰지 말고 시장을 오픈하자는 획기적인 제안을 했고, 더 나아가 디지털 TV 시장에 진출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일견 음악 파일과 TV 영상물은 전혀 상관없어 보이지만 잡스의 눈에는 아이튠즈(iTunes)를 통해 유통되는 똑같은 디지털 콘텐츠였다. 결국 MP3 파일을 통한 디지털 음악 유통이 대세가 됐고, 아이팟은 소니 등을 밀어내고 단말기 시장을 석권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2009년에 세상을 놀라게 한 아이폰(iPhone)이 등장하면서 애플리케이션(응용 프로그램, 앱)이라는 디지털 콘텐츠를 우리 앞에 선보였고, 2010년에는 셋톱박스 형태의 99달러짜리 애플TV가 출시된 지 3개월 만에 100만 대가 팔려 나갔다. 잡스는 아이튠즈를 매개로 아이팟·아이폰·아이패드, 그리고 TV로 이어지는 디지털 콘텐츠 유통 왕국 구상을 ‘아이클라우드(iClo ud)’라는 이름으로 죽기 전에 정리, 발표했다.

애플은 ‘개인 TV’ 시대를 열겠다고 선언했지만 아직까지는 ‘TV=가족 오락 채널’이라는 등식을 완전히 깨지는 못했다. 하지만 디지털 유통의 흐름을 일찍이 파악하고 소비자의 취향을 이끌어 온 애플이 디지털 시장의 중심에 서게 될 가능성은 여전히 높다.

더 나아가 아이폰으로 자동차 시동을 걸고 아이폰 화면을 터치하듯이 계기판을 만지면서 음악도 다운받고 애플 소프트웨어와 연동되는 자동차 운전을 하게 될 수 있다. 애플 제품과 콘텐츠 유통 체인에 익숙해진 소비자를 대상으로 금융·운송·여행·의료·지식 등의 서비스 시장을 묶어 판매하는 것은 가입자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더 수월해진다.
아날로그 시장의 낡은 유물들
그러나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포인트는 ‘애플의 거침없는 행진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정작 자신만의 단말기·콘텐츠·운영체제를 고집하고 있는 폐쇄적 비즈니스 모델의 애플이 ‘정보기술(IT) 강국’인 대한민국을 계속 흔들 수 있는 이유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그동안 글로벌 흐름에 뒤처져 더 폐쇄적이고 단순한 시장 구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비스 쪽의 예로 IPTV를 생각해 보자. KT 등 통신사의 방송 사업 진출을 둘러싼 갈등 때문에 시간을 허비하고 2008년에야 비로소 서비스를 시작했다. 그러나 정부 허가를 받아 제한된 콘텐츠 제공자만 제한된 채널로 보내는 폐쇄적 비즈니스 모델만 법으로 허용함으로써 애플이나 구글보다 먼저 오픈 TV앱 시장을 열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날려 버렸고 우리는 그 뒤 불어 닥친 스마트 TV 열풍을 뒤쫓아 가는 처지가 됐다.

잡스 사망 이후 너도나도 소프트웨어 육성의 중요성을 얘기하지만 글로벌화한 시장에서 소비자가 결국 선택하는 것은 하드웨어-소프트웨어-콘텐츠의 최종 패키지이지 어느 하나가 아니다.


방석호 홍익대 법과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