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 Siri가 몰고 온 인공지능 혁명


“나랑 결혼할래?” “그냥 친구로 지내는 게 어때.” “인생이란 뭘까?” “여러 증거를 종합해 보면 초콜릿인 것 같아.”

이런 재치 있는 답변의 주인공은 놀랍게도 인간이 아니다. 애플 아이폰4S에 탑재된 똑똑한 가상 개인 비서 시리(Siri)가 많은 사람을 열광시키고 있다. 그동안 보아온 음성인식 기술과는 차원이 다르다. 답변이 마치 사람과 대화하듯이 자연스럽고 맛깔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시리에서 정말 주목할 것은 음성인식이 아니라 인공지능이라고 말한다. 애플 시리의 등장은 새로운 인공지능 혁명을 예고한다는 것이다.
[애플 Siri]말만 하면 ‘척척’…‘새로운 격전장’ 급부상
지난 10월 5일 아이폰4S가 처음 공개 됐을 때만 해도 분위기는 썰렁했다. 애플이 음성인식 개인 비서 서비스 시리(Siri)를 전면에 내세웠지만 아이폰5를 기대했던 소비자들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졸작’, ‘헛발질’이라는 전문가들의 비난도 쏟아졌다.

하지만 불과 한 달도 안 돼 상황은 반전됐다. 막상 아이폰4S 판매를 시작하자 예상보다 훨씬 많은 소비자들이 몰려든 것이다. 애플의 신제품 공개→언론과 전문가들의 부정적 분석→판매 시작→소비자들의 열광→모방 제품 등장이라는 애플의 마법이 다시 되풀이되는 느낌이다.

시리에 대한 평가도 극적으로 바뀌었다. 발표 초기에는 그럴싸해 보이긴 하지만 실제 활용도는 그리 높지 않을 것이라는 부정적인 평가가 주를 이뤘다. 하지만 실제 제품 판매 후 의구심은 찬사로 바뀌었다. 시리가 생각보다 ‘똑똑한’ 대답을 했기 때문이다. 아이폰4S 구매자들이 앞다퉈 시리 사용기를 인터넷에 올리고 있다. 미국에서는 시리의 재치 있는 답변을 모아 놓은 사이트가 인기를 끌고 ‘시리에게 말 걸기’가 새로운 유행이 되고 있다.
<YONHAP PHOTO-0281> Philip Schiller, Apple's senior vice president of Worldwide Product Marketing, speaks about Siri voice recognition and detection on the iPhone 4S at Apple headquarters in Cupertino, California October 4, 2011.    REUTERS/Robert Galbraith (UNITED STATES - Tags: SCIENCE TECHNOLOGY BUSINESS)/2011-10-05 05:47:59/
<저작권자 ⓒ 1980-2011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Philip Schiller, Apple's senior vice president of Worldwide Product Marketing, speaks about Siri voice recognition and detection on the iPhone 4S at Apple headquarters in Cupertino, California October 4, 2011. REUTERS/Robert Galbraith (UNITED STATES - Tags: SCIENCE TECHNOLOGY BUSINESS)/2011-10-05 05:47:59/ <저작권자 ⓒ 1980-2011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다시 시작된 애플의 마법

아이폰4S 사용자가 “피곤하다”고 말하면 시리는 “지금 당장 아이폰을 내려놓고 눈을 붙이세요. 기다리겠습니다”라고 충고한다. “농담을 해봐!”라고 요구하면 “농담을 할 수 없습니다. 언제나 끝을 잊어버립니다”, “사진을 찍어봐!”라는 말에는 “사진 촬영에 익숙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한다. “너의 보스는 누구?”라고 질문하면 “당신이에요. 업무로 돌아오지 않겠습니까?”라는 비서다운 대답을 들려준다.

정해진 답변을 앵무새처럼 반복하지 않는다는 점도 인기 비결이다. “인생의 의미는 뭐지?”라는 질문에 “그런 의문에 대해 생각하기 위한 것입니다”, “나는 모릅니다. 하지만 거기에 맞는 답을 줄 수 있는 앱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42”라는 알쏭달쏭한 대답도 나온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라는 책을 인용한 것이다.

이러한 재치 문답은 시리가 갖고 있는 강력한 기능의 일부일 뿐이다. 시리는 음성 명령으로 날씨나 주가를 확인하고 교통 상황을 체크해 볼 수 있게 해준다. 불러주는 내용을 받아 써 e메일이나 문자를 보낼 수도 있다.

일각에서는 회의적인 평가도 여전히 나온다. 음성인식 기술 자체만 보면 별로 새로울 게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시리는 미국 뉘앙스커뮤니케이션즈의 음성인식 기술을 그대로 쓰고 있다. 뉘앙스는 세계 음성인식 시장을 사실상 장악하고 있는 기업이다. 삼성전자·LG전자·현대자동차도 자사 수출용 제품에 이 회사의 음성인식 엔진을 탑재하고 있다. 음성인식만 보면 지난해 한국어 음성 검색 서비스를 시작한 구글이나 다음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시리의 똑똑한 답변 역시 사전에 데이터를 잘 가공해 놓은 결과라는 분석이다. 날씨나 일정 체크, 지역 정보 등 사용자들의 질문이 어느 정도 정형화돼 있고 애플이 집중적으로 정보를 구축한 분야에서는 잘 작동하지만 조만간 한계가 드러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다.

그러나 그 배후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든 시리가 사용자들에게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놀라운 체험을 주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멀티 터치를 통해 애플만의 독특한 감성을 만들어 냈던 것처럼 시리를 통해 아이폰을 하나의 ‘인격체’로 만들어 내는데 성공한 것이다.

현재 영어·프랑스어·독일어 등 3개 언어만 지원하지만 시리에 대한 뜨거운 관심은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조광수 성균관대 인터랙션사이언스학과 교수는 “아이폰4S 발표 때 처음 공개된 시리를 보고 전율을 느꼈다”고 말했다. 인공지능의 상업화가 예상보다 훨씬 빨라질 것을 예감했기 때문이다. 조 교수는 “그 상업화의 전면에 나선 주역이 애플이라는 점이 더 큰 충격이었다”고 말했다.

조 교수는 시리의 핵심은 인공지능 기술이라고 잘라 말한다. 음성인식 기술만으로는 시리와 같은 서비스를 결코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애플 홈페이지에 공개된 홍보 동영상을 보면 시리에 날씨를 묻는 장면이 나온다. “이번 주말 샌프란시스코 날씨가 쌀쌀할까?”, “아주 춥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화씨 61도까지 떨어질 거예요.” “그럼 나파밸리는 어때?” “거기는 다를 것 같아요. 나파밸리는 화씨 68도 밑으로 내려가지 않을 겁니다.” 대화의 맥락을 이어가면 네 번의 문답이 이어진다. 조 교수는 이를 “굉장히 놀라운 기술”이라고 말했다. 나파밸리 날씨는 조금 다를 것이라는 대답은 맥락 이해와 추론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애플 Siri]말만 하면 ‘척척’…‘새로운 격전장’ 급부상
상거래 결합하면 엄청난 산업으로 성장할 것

시리는 질문을 다양하게 변형시켜도 같은 의미로 이해한다. “오늘 일기예보가 어때?”와 “오늘 우산을 준비해야 할까?”를 날씨 정보에 대한 질문으로 똑같이 받아들인다. 또한 ‘아내’, ‘딸’, ‘집’을 한번 알려주면 이를 기억해 적용한다. 조 교수는 “시리는 인공지능의 잘 완성된 초기 형태”라고 평가했다. 정지훈 관동대 IT융합연구소 교수는 “시리의 등장은 인공지능의 부활을 의미한다”며 “인공지능 활성화의 엄청난 촉매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평가는 시리의 탄생 과정을 살펴보면 더 분명해진다. 시리의 역사는 미 국방부의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의 지원으로 2003년부터 2008년까지 진행된 초대형 인공지능 연구 프로젝트 CALO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탠퍼드대에서 분리된 SRI 인터내셔널이 주도한 CALO는 역사상 가장 큰 인공지능 연구 프로젝트로 꼽힌다.

25개 미국 톱 대학과 민간 연구 기관에서 300명이 넘는 연구자들이 여기에 참여했다. 추론과 학습, 대화 능력을 갖춘 지능형 어시스턴트를 개발하는 것이 목표였다. 시리는 2007년 CALO에서 분사돼 설립됐다. 이들이 개발한 스마트폰 앱 ‘시리 어시스턴트’에 주목한 스티브 잡스가 지난해 4월 이 회사를 2억 달러에 사들였다.

시리는 사용자들의 지시를 실행하고 응답하는데 파트너 생태계를 적극 활용한다. 사용자들의 지시를 분석해 적절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서비스를 판단하는 것이 시리의 핵심 기술 중 하나다.
[애플 Siri]말만 하면 ‘척척’…‘새로운 격전장’ 급부상
애플이 아직 시리의 기능을 모두 보여주지 않았다는 분석도 나온다. 일단 재미 위주로 검색과 대화 기능 등을 선보였지만 진짜 애플의 속내는 따로 있다는 것이다. 바로 시리의 인공지능과 상거래를 연결하는 것이다. 시리의 초기 투자자 중 한 명인 게리 모르겐탈러 모르겐탈러 벤처캐피털 대표는 한 인터뷰에서 시리에 대해 “엔터테인먼트적인 가치를 제쳐 두고서라도 엄청난 사업”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시리를 통해 항공권과 호텔을 예약하기 시작하면 아이폰은 그야말로 돈을 쓸어 모으는 도구가 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모르겐탈러 대표는 애플이 시리의 애플리케이션 프로그램 인터페이스(API)를 공개하면 또 한 번 큰 태풍이 몰아칠 것이라고 예고했다. 수많은 개발자들이 이를 활용한 앱 개발에 뛰어들 것이라는 전망이다. 직격탄을 맞는 것은 구글이다. 그는 “구글이 이를 따라잡으려면 수년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공지능이 정보기술(IT) 산업의 새로운 격전장으로 부상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구글은 인터넷을 거대한 인공지능으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도 인공지능 연구에 오래전부터 투자해 왔다. 조 교수는 “자연어 처리 분야에서는 마이크로소프트가 가장 많은 연구원을 확보하고 있다”고 말했다. 슈퍼컴퓨터 왓슨을 만든 IBM 역시 강력한 경쟁자다. 지난 2월 왓슨은 미국 인기 퀴즈쇼 제퍼디에 출전해 역대 최고 성적을 거둔 우승자 2명을 상대로 압승을 거뒀다. 정 교수는 “엄청난 컴퓨팅 파워가 필요해 당장 왓슨을 시리처럼 클라우드화하는 것이 어렵지만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말했다.

반면 국내 업체들은 속수무책이다. 조 교수는 “인공지능은 하루아침에 따라잡을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고 말했다. 그동안 국내에서 인공지능은 컴퓨터 사이언스 중에서도 가장 소외받는 전공에 속했다. 언어학·심리학 등 인문사회과학과 연계되다 보니 별다른 지원도 받지 못했다. 정 교수는 “그나마 특정 업체가 세계시장을 독점하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고 말했다. 구글 안드로이드 등 복수의 글로벌 플랫폼을 적절히 활용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라는 지적이다. 정 교수는 “장기적으로 원천 기술에 투자해야 한다”며 “음성인식에서 한발 더 나가 뇌파나 기억, 영상 인식 같은 분야도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애플 Siri]말만 하면 ‘척척’…‘새로운 격전장’ 급부상
취재=장승규 기자 sj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