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공룡’ 우체국의 힘
지난 7월 18일 서울 남대문에 있는 대한상공회의소에는 금융 중심지인 여의도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한국 자본 시장의 별’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날 우정사업본부가 연 투자 포럼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올해 첫 행사인 우정사업본부 포럼에는 삼성증권·현대증권·한국투자증권 등 13개 증권사 대표와 미래에셋자산운용·브레인투자자문 등 20개 자산운용·투자자문사 대표가 참석했다.
이 밖에 국민연금·공무원연금 운용 본부장은 물론 제조업·에너지 분야 기업 임직원까지 포함해 총 580여 명이 모였다. 이처럼 남대문이 ‘작은 여의도’로 바뀌게 된 계기는 우정사업본부, 즉 우체국이 자본시장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식경제부 산하 공기업인 우정사업본부의 사업 구조는 크게 우편과 금융 두 가지의 업무를 주축으로 한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13년 연속 흑자를 내고 있는 ‘우량 기업’ 우정사업본부의 주 수익원이 잘 알려진 우편 사업이 아니라 금융 사업이라는 점이다.
우정사업본부는 작년 우편 부문에서 528억 원의 수익을 냈다. 반면 금융 부문에서는 무려 4392억 원의 흑자를 냈다. 우정사업본부의 우편 부문 수익은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2007년 1443억 원, 2008년 339억 원, 2009년 848억 원, 2010년 528억 원을 기록했다. 올해 9월까지 우편사업 부문은 300억 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다만 지난 10월 2일 우편 요금이 20원 인상되면서 200억 원 수준의 흑자를 낼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반면 금융 부문은 탄탄대로다. 금융 부문은 2007년 1556억 원, 2008년 690억 원, 2009년 840억 원을 기록해 우편 부문의 수익을 앞지르는 추세다. 금융 부문이 꾸준한 상승세를 이어가는 이유는 우정사업본부가 운용하는 자금의 규모가 점점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정사업본부의 금융 사업은 예금과 보험을 주축으로 한다. 2000년 우정사업본부의 예금 자산은 20조 원, 보험 자산은 15조 원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올해 우정사업본부의 금융자산은 90조 원에 달한다. 예금 자산이 60조 원, 보험 자산이 30조 원 수준이다. 예금 자산 60조 원은 시중은행인 외환은행과 맞먹는 규모다. 점포 수, 국내 최대 국민은행의 2배 달해
우정사업본부의 강점은 무엇보다 일반 금융회사보다 훨씬 많은 금융 점포와 자동화기기 수에 있다. 전국의 우체국은 3700여 개 수준이다. 이 가운데 금융 업무를 담당하는 점포가 2763개, 자동화기기는 5671대나 된다. 더욱이 이들 점포는 읍·면 단위까지 진출해 고객 접근성이 뛰어나다. 점포 수만 보면 외환은행의 7배, 국내 최대 은행인 국민은행의 2배 이상이다.
여기에 금융 위기의 여파로 예금 자산이 최근 빠르게 불어나는 중이다. 업계에서는 저축은행 사태 등 금융 불안 상황에서 수신이 몰리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은행의 예금자 보호 한도가 5000만 원 이내인 것과 달리 우체국은 금액 한도 없이 국가가 지급을 책임지기 때문이다.
지난 9월 말 기준 우정사업본부 예금의 잔액 규모는 59조2588억 원이다. 이는 2010년 말 50조3650억 원에 비해 8조8900억 원(15%)이나 급증한 규모다. 같은 기간 국내 18개 은행의 평균 수신 증가 규모가 3조5000억 원인 것을 따져본다면 예금 증가세가 시중은행보다 2배 이상 가파른 셈이다. 지난 10월 12일 기준 예금 수신액은 60조1000억 원에 달했다. 보름도 안 돼 1조 원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또한 11월 중 우체국에서 발급하는 직불 기능의 체크카드를 선보일 예정이다. 그간 우체국은 민간과의 형평을 고려해 체크카드를 발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비씨카드와 우체국이 제휴하면서 보통예금 가입자를 대상으로 체크카드 발급을 시작한 것이다.
한 시중은행 프라이빗뱅커(PB)는 “우체국 예금의 금리가 시중은행 금리에 비해 낮은 편이지만 ‘나라가 망하지 않는 한’ 예금을 보호해 주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돈을 항상 우체국에 맡겨 놓는 자산가들이 꽤 많다”고 귀띔했다. 그는 “예금 고객이 겹치는 저축은행·새마을·금고·신협 등에서 인출된 돈들이 우체국 예금으로 많이 몰린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또 다른 투자처인 주식시장의 예탁금은 같은 기간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우정사업본부는 ‘단타의 달인?’
이 때문에 금융회사는 물론 기업들까지 우정사업본부에 구애의 손을 내밀고 있다. 10월 말 현재 우정사업본부는 시중은행·증권사·카드사·통신사·신용평가사 등 166개 기관과 ▷창구 망 공동 이용 ▷카드 업무 대행 ▷증권 계좌 개설 대행 서비스 등 18개 업무에서 제휴 관계를 맺고 있다. 우정사업본부 관계자는 “우체국 네트워크를 활용해 농어촌 구석구석까지 연결되기 때문에 다른 금융회사와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제휴를 원하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앞서 남대문을 ‘작은 여의도’로 바꿔 놓은 사례처럼 우정사업본부는 자본시장 플레이어들에게는 국민연금과 함께 ‘슈퍼 갑’ 중 하나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우정사업본부 예금 자금을 위탁받는 것을 ‘행정고시’, 보험 자금을 따내는 것을 ‘외무고시’로 부르기도 한다.
지난 6월 기준 우정사업본부는 운용 기금의 직접 주식 투자 비중은 4.69% 수준이다. 운용 계획을 보수적으로 잡아 우정사업본부가 4.5% 수준의 직접 주식 투자만 하더라도 단순 계산 시 4조500억 원의 주식 투자를 하는 셈이다. 쉽게 말해 우정사업본부의 주식 투자 금액 전체를 한 번만 사고 팔아도 주문을 받는 증권사들은 600억 원 정도의 수익을 내게 된다(매매 수수료는 개인 최저치인 0.015%로 계산).
이와 함께 우정사업본부는 4분기부터 예금 부문과 보험 부문이 따로 거래 증권사를 선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4분기 주식 거래 증권사로 15개사, 채권 거래 증권사 12개사(주식과 채권 중복 가능)를 선정했다. 보험사업단도 12개 주식 거래 증권사와 12개 채권 거래 증권사를 선정했다. 즉 웬만한 증권사들은 여기에 모두 포함되는 셈이다. 많은 운용 자금과 넓은 거래 풀은 증권사들이 우정사업본부에 끊임없는 ‘러브콜’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하지만 우정사업본부는 증권사들에 국민연금보다 더 ‘알짜 고객’으로 평가 받는다. 자금의 회전율이 높기 때문이다. 이유는 국내 주식 차익 거래를 외국인과 함께 우정사업본부가 주도해서다. 차익 거래는 현물 가격과 선물 가격이 일시적 또는 순간적으로 정상적인 가격 구조가 왜곡돼 비정상적인 상태로 괴리될 때 그 가격 차이를 이용해 무위험 이익을 얻는 거래다.
차익 거래는 대부분 여러 종목을 한 번에 사고파는 프로그램 매매를 통해 이뤄지며 절대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반면 이익은 크지 않다. 여기에 거래세까지 내고 나면 노력에 비해 얻는 게 없는 수준이다. 하지만 우정사업본부는 다르다. 국가 지자체로 분류되는 우정사업본부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차익 거래세를 내지 않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즉 많은 자금을 일거에 빨리 자주 사고파는 거래원이 바로 우정사업본부다.
증권사뿐만 아니라 자산운용사 및 자문사 등도 우정사업본부에 한 수 접을 수밖에 없다. 이유는 상당액을 직접 운용하는 국민연금과 달리 우정사업본부는 주식 운용을 운용사나 자문사에 100% 위탁 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시장이 냉각된 사모 펀드나 벤처 캐피털 등에서 우정사업본부에 바라는 기대는 매우 크다. 우정사업본부가 올해부터 포트폴리오 관리 차원에서 대안 투자를 늘리기로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10월 말 우정사업본부가 최대 4600억 원을 출자하는 사모 펀드(PEF) 및 벤처 펀드(VC) 위탁 운용사 선정에 총 29곳의 운용사 컨소시엄이 지원하기도 했다.
이홍표 기자 hawli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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