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섭 리더십센터 회장
아버지는 가난한 농촌에서 3형제의 차남으로 태어난 무학의 농사꾼이었지만 형제간의 우애와 가족 사랑이 대단하셨다. 내게는 큰아버지가 되는 아버지의 형님이 돌아가신 후 형수님이 재가했다가 돌아가시자 그쪽 가족을 설득해 홀로 묻힌 형님 묘소에 형수님을 합장시켰고 동생이 학업에 재능을 보이자 농사일은 자기가 하겠다며 동생을 공부시켰다. 동생이 성공하면 자신의 6남매 자식들의 교육을 맡기려는 꿈을 가졌었는데 그 영특한 동생이 폐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실망이 대단하셨다고 한다.건장한 체구의 아버지는 근면 성실해 농사만으로는 자녀들의 교육이 힘들다는 것을 깨닫고 돈이 되는 그 어느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시골 부자가 되었고 장남인 나는 자연스레 도시에 있는 중학교에 진학했다.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내가 50세가 될 때까지 나를 괴롭혔던 사건이 일어났다. 비록 무학이었지만 소박하고 당당하셨던 아버지가 허름한 한복을 입고 예고 없이 학교를 방문했다. 그런데 내게 용돈을 건네주고 가시는 걸 목격한 친구들의 질문에 하숙집 주인이 왔다고 답한 것이다. 나를 지나칠 정도로 사랑했고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아버지에게 그런 불효막심한 말을 한 것이 종종 악몽으로 나타났고 오랫동안 나를 엄청나게 괴롭힌 특급 비밀이 되었다.
이 문제는 내가 리더십을 강의하고 코칭을 하며 해결됐다. 꿈과 욕심이 컸던 고객들 중 상당수가 청소년기에 가족들에게 행했던 비슷한 행동으로 괴로워한 것을 도와주면서 내 문제도 자연스럽게 풀리게 됐다.
![[아! 나의 아버지]36년간 나를 괴롭혔던 ‘특급 비밀’](https://img.hankyung.com/photo/202102/AD.25520468.1.jpg)
근면 성실했던 아버지는 1980년대 초에 읍내의 땅 부자가 되셨다. 그 당시 장남이 벤처 사업인 컴퓨터 사업을 시작했다가 망하게 되자 빚을 갚으라며 금싸라기 땅을 모두 내놓으셨다. 헐값에 팔린 그 땅은 나중에 시외버스 터미널이 들어서는 요지가 됐고 고향에 갈 때마다 그 땅을 밟는 아들의 심정은 죄송한 마음, 그리고 성공으로 되갚아 드리겠다는 결심과 각오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게 효도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아버지는 내가 빚을 정리한 몇 년 후에 돌아가시고 말았다. 장남이 회사를 설립하고 성공적으로 운영하게 된 모습도, 배움이 있는 리조트를 준공한 것도 보지 못하셨다.
작년에 개최된 어머니 탄생 100주년 기념 모임에 오신 분들이 이구동성으로 한 말이 생각난다. 지금 내 모습을 아버지가 보면 ‘어허 우리 경섭이가 기어이 해 냈네’라며 좋아했을 것이라고. 자식 사랑은 일방적인 ‘내리사랑’이라고 하지만 참고 기다려 주면 자식의 성공으로 ‘치사랑’도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아쉽고 죄송하다. 나는 오늘도 못다 한 효를 하는 마음으로 사명을 따라 베풀며 살아간다. 아버지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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