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섭 리더십센터 회장

아버지는 가난한 농촌에서 3형제의 차남으로 태어난 무학의 농사꾼이었지만 형제간의 우애와 가족 사랑이 대단하셨다. 내게는 큰아버지가 되는 아버지의 형님이 돌아가신 후 형수님이 재가했다가 돌아가시자 그쪽 가족을 설득해 홀로 묻힌 형님 묘소에 형수님을 합장시켰고 동생이 학업에 재능을 보이자 농사일은 자기가 하겠다며 동생을 공부시켰다. 동생이 성공하면 자신의 6남매 자식들의 교육을 맡기려는 꿈을 가졌었는데 그 영특한 동생이 폐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실망이 대단하셨다고 한다.

건장한 체구의 아버지는 근면 성실해 농사만으로는 자녀들의 교육이 힘들다는 것을 깨닫고 돈이 되는 그 어느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시골 부자가 되었고 장남인 나는 자연스레 도시에 있는 중학교에 진학했다.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내가 50세가 될 때까지 나를 괴롭혔던 사건이 일어났다. 비록 무학이었지만 소박하고 당당하셨던 아버지가 허름한 한복을 입고 예고 없이 학교를 방문했다. 그런데 내게 용돈을 건네주고 가시는 걸 목격한 친구들의 질문에 하숙집 주인이 왔다고 답한 것이다. 나를 지나칠 정도로 사랑했고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아버지에게 그런 불효막심한 말을 한 것이 종종 악몽으로 나타났고 오랫동안 나를 엄청나게 괴롭힌 특급 비밀이 되었다.

이 문제는 내가 리더십을 강의하고 코칭을 하며 해결됐다. 꿈과 욕심이 컸던 고객들 중 상당수가 청소년기에 가족들에게 행했던 비슷한 행동으로 괴로워한 것을 도와주면서 내 문제도 자연스럽게 풀리게 됐다.
[아! 나의 아버지]36년간 나를 괴롭혔던 ‘특급 비밀’
아버지는 순수하고 정이 많으셨다. 우리 부부가 1970년대 초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마쳤으나 국내에 일자리가 없어 현지에서 아이들을 기르고 있을 때다. 아버지가 손자·손녀들을 돌본다며 어머니와 함께 3년 동안 미국에서 지내게 됐다. 영어를 한마디도 못했지만 멋진 웃음으로 이웃들을 사귀었고 아이들은 물론 며느리와도 사이가 좋았다. 할아버지의 사랑을 흠뻑 받고 자란 손자는 하버드대학을 나와 대학교수가 됐고 둘 다 여성 변호사가 된 손녀들은 지금도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니 온 가족이 함께 산 대가족제도의 장점도 경험했다.

근면 성실했던 아버지는 1980년대 초에 읍내의 땅 부자가 되셨다. 그 당시 장남이 벤처 사업인 컴퓨터 사업을 시작했다가 망하게 되자 빚을 갚으라며 금싸라기 땅을 모두 내놓으셨다. 헐값에 팔린 그 땅은 나중에 시외버스 터미널이 들어서는 요지가 됐고 고향에 갈 때마다 그 땅을 밟는 아들의 심정은 죄송한 마음, 그리고 성공으로 되갚아 드리겠다는 결심과 각오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게 효도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아버지는 내가 빚을 정리한 몇 년 후에 돌아가시고 말았다. 장남이 회사를 설립하고 성공적으로 운영하게 된 모습도, 배움이 있는 리조트를 준공한 것도 보지 못하셨다.

작년에 개최된 어머니 탄생 100주년 기념 모임에 오신 분들이 이구동성으로 한 말이 생각난다. 지금 내 모습을 아버지가 보면 ‘어허 우리 경섭이가 기어이 해 냈네’라며 좋아했을 것이라고. 자식 사랑은 일방적인 ‘내리사랑’이라고 하지만 참고 기다려 주면 자식의 성공으로 ‘치사랑’도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아쉽고 죄송하다. 나는 오늘도 못다 한 효를 하는 마음으로 사명을 따라 베풀며 살아간다. 아버지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