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우 솔로몬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


1994년 더운 여름 걱정하던 일이 터졌다. 경찰이 서총련(서울지역대학생 총연합) 집행부 회의장을 덮쳤고 모든 간부들이 연행돼 갔다. 가장 큰 죄(?)가 씌워진 사람은 서총련 의장이던 막내 동생이었다.

그리고 닥친 엄청난 공안 정국. 북한이 핵 사찰단을 쫓아내자 영변을 폭격하니 마니 하는 얘기가 나왔고, 김일성 주석이 갑자기 사망하면서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돼 갔다. ‘한총련

뒤에 북한 사로청이 있고 사로청의 뒤에는 사노맹이 있다’는 어떤 신부의 얘기는 우리 가족 모두의 폐부를 후벼내는 것처럼 아팠다.

막내의 신병이 확보되고 경찰서에 처음 면회를 갔다 오던 날, 아버지는 눈물을 보이셨다. 형인 내가 봐도 구멍 뚫린 아크릴판 뒤에 있는 동생이 짠할 정도인데 부모 마음은 오죽했을까.

검찰에서 구치소로, 가족의 동선은 동생이 옮겨가는 곳을 따라 바뀌었다. 서울 북쪽 끝에서 경기도 의왕까지 지하철로 3시간이 걸리는 길을 아버지는 면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편찮으신 당신 대신 생계를 책임지고 있던 어머니 몫까지….
[아! 나의 아버지]1994년 더웠던 여름
반성문을 놓고 신경전이 오갔다. 진심을 담은 반성문을 제출하면 참고할 수 있다는 얘기가 간접적으로 전달돼 왔고 우리 가족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심으로는 반성문을 쓰고 조금이라도 빨리 나왔으면 했지만 누구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상황을 정리한 것은 아버지였다. ‘면회 가거든 내 말을 전해라. 남자가 뜻을 세웠으면, 그리고 그것이 옳다고 믿는다면 타협하지 말라고….’ 가족 중 누구도 그 말에 토를 달지 못했다.

그리고 재판. 아들의 재판은 물론 같이 있던 동료들의 재판까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니셨고 그들의 부모님과 유대를 형성해 나갔다. 그동안 의식화된 것은 절대 아니고 아들과 같이 있었던 사람들이고 같이 고생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유의 전부였다.

아버지는 많이 배우지 못하셨다. 한국의 공업화 과정에 맞춰 지리산 곁에 있는 고향에서 혈혈단신 서울에 올라오셨고 사업을 하면서 좋은 시절 이상으로 많은 고통을 가족에게 안겨 주셨다. 사업이 망한 것도 내가 인생에서 중요한 시기들, 예를 들면 고3 같은 때였는지 원망스럽기는 하지만….

당연히 운동권에서 얘기되던 많은 논리들은 아버지에게 다른 세상 얘기였다. 아버지의 마음은 자식에 대한 사랑이 전부였다. 매스컴에서 어떤 얘기를 하든, 경찰이 모든 친인척을 뒤지고 다닌다고 불평이 들어오든 아버지는 자식이 했던 일을 탓하지 않으셨다. 최소한 내 아들이 사회에 해가 되는 일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언제까지 아버지와 얘기해 봤을까. 대학을 선택할 때 아버지와 상의했던 기억이 없는 걸 보면 아마 그 이전 언젠가가 끝이 아니었을까 싶다. 불경한 얘기지만 어릴 때 가끔은 다른 모습의 아버지를 꿈꿔 봤던 것 같다. 돈도 더 많고 더 다정다감하고 교양 있는…. 그렇지만 아버지는 자식을 생긴 그대로 안아주셨다. 그 자식이 쫓기는 신세든, 교도소에서 영어의 몸이든 그건 그분의 관심이 아니었다.

나는 내 아들을 그 자체로 인정할 수 있을까. 나와 생각이 다르더라도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도록 허락할 수 있을까. 글을 쓰면서도 나는 아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다고 탓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