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B 상품의 대반격

‘이마트 TV’의 첫 물량 5000대가 이틀 만에 매진되는 대박을 치면서 화제를 모으고 있다. 다른 대형 마트들이 TV 가격을 내리는 것은 물론 대기업 TV 제조업체들도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마트 TV’가 시사하는 것은 두 가지다. 국내 제조업체들이 신기술을 앞세워 만든 고가 제품과 별개로 중저가를 원하는 수요의 존재를 확인한 것, 유통 파워와 제조 파워의 본격적인 헤게모니 전쟁이 시작되고 있다는 점이다.

아직은 서로 견제하는 모습이지만 시장 경쟁이 한계에 다다르면 유통업-제조업 전쟁이 본격화될 가능성도 점쳐볼 수 있다. 이마트 TV가 몰고 온 파장은 과연 무엇일까.
‘유통 vs 제조’ 대결 본격화되나
10월 27일 시장에 나온 이마트(Emart) TV 이전에도 대형 마트 브랜드의 저가 TV는 있었다. 지난 6월 23일 출시된 롯데마트의 ‘통큰 TV’가 그것. 그러나 이마트는 4개월 만에 통큰 TV를 뛰어넘는 제품을 출시해 그 이상의 대박을 터뜨렸다. 이유는 간단하다. 가격은 같은데 성능은 한 단계 더 뛰어났기 때문이다.

통큰 TV는 액정표시장치(LCD) TV다. 삼성전자·LG전자가 올해 초 ‘하늘과 땅’ 차이라며 3D TV의 화질 경쟁을 벌였던 것처럼 이미 대세는 발광다이오드(LED) TV로 넘어온 지 오래다. 소비자의 욕구가 한 단계 발전했는데, 단순히 가격만 싼 TV를 내놓아서는 먹히지 않았던 것이다.

이마트 TV는 LED TV다. 물론 백라이트만 LED를 사용하는 LCD TV이지만 시장에서는 이를 LED TV로 받아들이고 있다. LCD TV와 달리 LED TV는 얇기 때문에 세련된 디자인이 가능하다. 해상도도 통큰 TV가 HD급(1360×768)이었던데 비해 이마트 TV는 풀 HD급(1920×1080)이다.

이마트 TV도 단점은 있다. USB 드라이브를 지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USB 드라이브의 동영상을 구동하기 위해서는 CPU 칩을 포함한 ‘마이크로 컴퓨터’가 필요하다. 당연히 가격이 상승한다. 이마트 TV는 가격을 낮추기 위해 기능을 최소화한 대신 화질에 집중한 것이다. 이는 소비자의 성향을 잘 분석한 결과다.

USB 드라이브로 동영상을 담아 볼 정도로 정보기술(IT)에 밝은 얼리어답터형 소비자라면 굳이 저가형이 아닌 대기업의 고급형 제품을 살 것이기 때문이다. 성능보다 가격을 우선하는 소비자라면 USB 드라이브까지는 필요가 없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이는 병원과 숙박 업소들로부터 대량 구매 문의가 쏟아진 데서 확인할 수 있다. 이른바 마케팅의 승리다.

이마트 TV에 놀란 롯데마트는 즉시 기존 통큰 TV의 가격을 5만 원 인하하고 11월 출시 예정으로 LED TV를 준비 중이다. 1차 물량이 이틀 만에 동이 난 이마트 TV의 2차 물량은 내년 1월에나 가능하기 때문에 지금부터는 ‘얼마나 빨리, 얼마나 많이’ 물량을 확보하느냐의 스피드전으로 넘어가게 됐다.
‘유통 vs 제조’ 대결 본격화되나
이마트 TV, 기술 아닌 마케팅의 승리

이마트 TV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내놓지 않던 TV 제조업체들도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LG전자에서 TV 사업을 총괄하는 홈엔터테인먼트 사업본부장인 권희원 부사장은 고려대 특강에서 “질이 많이 떨어진다. 사고 나면 후회할 것”이라며 “싼 제품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혹평했다.
학생의 질문에 나온 대답으로, 회사의 공식적인 반응은 아니었지만 대기업으로서도 긴장할 만한 여지는 있다. 저가 제품에 대한 수요를 확인한 것이다. 품질만 보장된다면 기능을 줄이고 화질 하나에 집중한 저가 TV도 얼마든지 먹힐 수 있다는 것이다. 고가의 3D TV는 기존 TV의 교체 수요를 예상만큼 대체하지 못해 가전 업체는 올해 악화된 수익성으로 고전하는 상황이다.

이는 일본 가전 업체들이 과거의 영광을 뒤로하고 하락세로 돌아선 상황과 비슷한 점이 많다. 삼성전자·LG전자 관계자들조차 “화질은 소니가 세계 최고”라고 인정한다. 다만 “그러나 소비자들이 원하는 제품은 삼성전자·LG전자의 제품”이라고 말한다. 소니는 ‘세계 최고’ 화질을 포기하지 못하다 보니 개발비와 생산비가 높아지는 제품을 내놓게 되고 소비자들과 멀어지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 것이다.

지금 국내 가전 업체의 전략은 뛰어난 화질과 다양한 기능을 가진 TV를 내놓고 대규모 광고를 통해 소비자들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필요 이상의 사이즈와 가격대의 TV를 사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작은 사이즈와 저가의 실용적인 제품을 찾는 소비자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대기업의 가격 정책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구도에 균열이 가고 있는 것이다.

아직 결함 등 품질 문제에 대한 검증이 남아 있지만 그런대로 쓸만하다는 인식이 확산되면 소비자들이 굳이 대기업 제품을 고집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TV뿐만이 아니다. 독과점적 대기업이 가격을 주도하는 시장에서는 얼마든지 균열이 가능하다. 이미 저가 항공사가 우려를 뚫고 성공 궤도에 올라 있고 의류 시장에서는 유니클로 같은 사례도 있다. 자동차 시장이라고 해서 기능을 단순화한 저가형 자동차가 나오지 말란 법이 없다.

이런 소비 트렌드는 대형 마트의 자체 브랜드(PB) 상품 매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마트의 PB 상품 매출 비중은 2006년 7%에서 9%(2007년)→19%(2008년)→23%(2009년)→24%(2010년)→25%(2011년 상반기)로 급성장했다. 이마트 전체 매출의 4분의 1이 PB 상품이다. 롯데마트도 13%(2007년)→17%(2008년)→20%(2009년)→22.6%(2010년)→24%(2011년 상반기)로 PB 상품이 전체 매출의 4분의 1이다. 홈플러스도 18%(2006년)→20%(2007년)→25%(2008년)→26%(2009년)→26%(2010년)→27%(2011년 상반기)로 경쟁사와 비슷한 비중으로 성장했다.

상품 구성도 기존의 식품·주방용품에서 벗어나 아동복을 비롯한 패션 잡화로 증가했고 최근에는 애완 용품, 웰빙 식품 등 영역을 확장하고 있고 올해에는 자전거·골프세트·TV로까지 확대되는 추세다. 이마트는 2007년 5개 브랜드, 3000여 개 품목에서 2008년 18개 브랜드, 1만5000여 개 품목, 2011년 19개 브랜드 1만8000여 개 품목으로 크게 확대했다.
‘유통 vs 제조’ 대결 본격화되나
대형 마트 매출의 25%가 PB 상품

유통 업체의 이런 움직임에 대해 일부에서는 매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자구책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한 대형 마트 관계자는 “대형 마트는 이미 출점 경쟁이 마무리된 상태다. SSM(슈퍼슈퍼마켓:슈퍼마켓보다 크고 대형 마트보다 작은 중간 사이즈 마트) 진출도 여론에 밀려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못하고 해외 진출도 만만하지 않다 보니 제조업의 영역까지 손을 대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출점 경쟁의 포화 상태로 매출 증가의 한계에 부딪친 것은 편의점 업계도 마찬가지다. 대형 마트보다 먼저 시장 성숙기를 맞은 편의점의 PB 상품 비중은 훨씬 높은 편이다. GS25는 PB 상품의 매출 비중이 25.6%(2008년)→29.4%(2009년)→31.2% (20 10년)→ 31.9%(2011년 상반기)로 전체 매출의 3분의 1까지 성장했다.

PB 상품의 연이은 히트는 유통 업체의 파워를 확인해 주기에 충분하다. 이마트 TV, 통큰 TV(롯데마트), 착한 골프 풀세트(홈플러스)는 제품 자체의 브랜드는 무명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대형 마트의 브랜드로 포장하면서 소비자들의 거부감을 없앨 수 있었다. 이마트가 최근 판매하고 있는 베스타드의 고어텍스 등산화 가격은 8만9000원이다.

시중의 유명 브랜드 매장에서 고어텍스 등산화를 사려면 대개 20만 원 이상을 들여야 한다. 몸값 비싼 연예인을 광고 모델로 쓰고 유통 단계가 복잡해지면서 거품이 낀 결과다. 스페인 브랜드라고 해도 베스타드가 직접 국내시장을 뚫기는 쉽지 않았겠지만 이마트를 통해 양호한 판매 실적을 보이고 있다. 이마트는 7000족의 물량을 준비해 10월 13일부터 판매를 시작했는데, 10월에만 2000족 이상이 팔려 나간 상태다.

그러나 이런 해석에 대해 이마트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마트 TV만 잘 팔린 것이 아니다. 소비자들이 이마트 TV를 보러 왔다가 삼성전자·LG전자의 제품을 사는 경우도 많았다”며 “이마트 TV가 이슈가 되면서 소비자들의 32인치 LED TV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이마트 TV가 출시된 이틀 동안 삼성전자와 LG전자의 32인치 LED TV도 전년 동기 대비 5배나 팔렸다.” 이마트 TV가 기존 프리미엄 TV 시장에 끼어드는 것이 아니라 전체 TV 시장의 파이를 키운다는 논리다.
‘유통 vs 제조’ 대결 본격화되나
이는 아직까지 유통 파워가 제조 파워를 넘어설 정도가 아니기 때문에 나오는 얘기다. 예를 들어 가전제품만 판매하는 하이마트에서 똑같은 전략을 썼다가는 제조업체들이 물량을 빼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 이마트는 가전이 주력이 아니고 생필품 위주이고 생필품 제조업체들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 1등 업체가 발을 뺀다고 해도 대체할 수 있는 것이 많으므로 유통 업체의 파워가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가전이나 IT 제품은 아직 제조업체의 파워가 크기 때문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제조업체 또한 대형 마트의 PB 상품에 대해 언급했다가는 노이즈 마케팅에 활용될 수 있기 때문에 노코멘트로 일관하고 있다. LG전자 권희원 부사장의 언급도 공식적인 것이 아니라 학생들과의 질의응답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유통 업체의 새로운 성장 엔진이라고 할 수 있는 PB 상품 전략이 한계에 부딪치게 된다면 제조업체들과의 본격적인 승부가 이뤄지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다. 향후 대형 마트들의 PB 전략에 귀추가 모아지는 이유다.
‘유통 vs 제조’ 대결 본격화되나
우종국 기자 xyz@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