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훈 지식경제부 전력위기대응체계개선 TF 단장


“전력대란은 시간문제다.” 이승훈(66) 서울대 명예교수는 지난 7월 말 한국경제신문 기고에서 이렇게 예견했다. 정확히 한 달 반 만인 9월 15일 전국 656만 호의 전기가 갑자기 끊기면서 그의 경고는 거짓말처럼 현실이 됐다. 초가을 이상고온으로 촉발된 미증유의 순환 정전 사태는 전력 산업의 총체적 문제점들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정부는 민간 전문가를 중심으로 부랴부랴 ‘전력위기대응체계개선 태스크포스(TF)’를 만들어 대대적인 점검에 들어갔다. 2000년대 초반 전력 산업 구조 개편의 밑그림을 그렸던 이 교수가 TF 단장을 맡았다. 그는 “올겨울 전력 사정이 최악”이라며 “뚜렷한 대책이 없는 ‘퍼펙트 스톰’을 향해 가고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원가에도 못 미치는 전기 요금이 문제의 핵심”이라며 “광역 정전이 벌어지면 최소 4일 동안 경제가 마비돼 국내총생산(GDP)의 1.1% 이상이 날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10월 31일 이 교수를 만났다.



전문가들은 정전 가능성을 알고 있었습니까.

이러다 뭔가 터질 것이라는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 설마 정전 사태가 벌어지겠느냐는 낙관론도 일부 있었죠. 실제 위기가 닥치고 보니 다 알고 있었는데, ‘어~ 어~’ 하다가 속수무책으로 당한 거죠.

전력거래소와 한전의 위기 대응 체계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많은데요.

뭐든 일이 터지고 나야 문제가 드러납니다. 도상연습을 많이 했지만 처음 겪는 일이라 막상 실전에서는 연습대로 되지 않아요. 위기 대응이 부실했던 건 맞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어요. 아무리 대응을 잘했더라도 정전을 피할 수 없었다는 거죠.

전력 사정이 그렇게 심각합니까.

지난번 같은 정전 사태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이제 겨울이 시작됐어요. 이상 한파라도 오면 전기 사용이 폭증합니다. 현재 발전기로는 감당할 여력이 없어요. 엄청난 고생을 하지 않으면 이번 겨울을 무사히 넘기기 어려울 거예요. 역사상 가장 위험한 겨울이에요. 더 큰 문제는 이미 어쩔 수 없는 단계에 들어섰다는 거죠. 당장 발전소를 짓기 시작하면 아무리 빨라도 가동까지 2년이 걸리거든요. 어쨌든 지금 설비로 겨울을 날 수밖에 없어요. 9월 같은 정전 사태가 최소 2번은 일어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오죠.

대안은 없습니까.

당장 공급을 늘릴 수 없다면 방법은 수요를 줄이는 것뿐이죠. 한전에서 전기를 많이 쓰는 공장 같은 곳을 대상으로 수요가 몰리는 시간대를 피하도록 하고 그에 대한 보상을 해 줍니다. 바로 수요 관리죠. 하지만 이것도 한계가 있어요. 모든 공장을 동시에 세울 수 없는 일이죠. 가장 좋은 것은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불필요한 전기 스위치를 내려주는 겁니다.

일본은 지난여름 전력 수요를 25%나 줄였어요. 우리라고 못할 이유가 없죠. 외환위기 때 금 모으기로 위기를 극복한 경험도 있지 않습니까. 지금 상황에서는 난방 온도를 섭씨 영상 19도 이하로 낮추고 집 안에서 외투를 걸친 채 생활하는 정도의 강력한 절전 운동이 필요해요. 이것으로도 충분하지 않다면 강제 단전밖에는 방법이 없어요. 지난번 순환 정전 같은 것이죠. 이번에는 기업들이 자가 발전기를 가동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주면서 계획적으로 해야죠.

광역 정전이 벌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전국의 모든 발전기가 주저앉는 거죠. 4~5일 동안 전기 없이 지내야 해요. 경제활동이 완전히 멈추기 때문에 GDP의 1.1%가 한꺼번에 날아갑니다. 보통 일이 아니죠. 전체 전력 계통을 복구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거예요. 멈춘 발전기를 다시 가동하는 블랙스타트에 전기가 필요한데, 그 전기를 마련하는데 4~5일이 걸립니다. 뉴욕은 정전 사태가 1주일 동안 이어지기도 했어요. 생산 라인이 갑자기 멈춰 못 쓰게 된 물자도 엄청날 거예요. 광역 정전은 마이너스 성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수요 증가를 예상해 발전소를 미리 지었어야 하지 않습니까.

전력 수요가 에너지 수급 계획상의 예상치를 훨씬 웃도는 일이 반복됐어요. 문제는 턱없이 낮은 전기 요금이죠. 한전이 2008년부터 적자 행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경영 성과도 좋지 않은데 성과급 잔치를 한다고 비난하는데 사실 그건 얼마 안 돼요. 국제 유가 급등으로 발전 원가가 치솟는데 그에 맞춰 전기 요금을 올리지 못한 것이 더 큰 문제죠. 우리처럼 원가를 밑도는 전기 요금을 2~3년 계속 유지하는 나라는 없어요. 에너지 수급 계획을 짤 때 이걸 그대로 넣을 수 없어요. 전기 요금이 정상화된다고 보고 예측치를 뽑은 거죠. 거기에 맞춰 발전소도 지었고요.

전력 수요가 급증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전기 요금이 원가에도 못 미치다 보니 그런 거죠. 기름 보일러로 난방하는 것보다 전기 난방이 훨씬 싸게 들어요. 냉방과 난방을 함께하는 시스템 에어컨이 인기 상품이 됐어요. 많은 사람이 난방을 전기로 바꾼 거예요. 대학이나 기업들도 이미 전기 난방으로 다 바꿨어요. 이들을 비난할 수 없어요. 그렇게 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행동이 됐거든요. 전기 요금을 올려야 하는데 갈수록 올리기가 더 어려워지고 있어요. 이미 많은 사람이 기름 난방을 전기 난방으로 바꿨기 때문이죠. 그걸 다시 바꾸라고 하면 저항이 생길 수밖에 없어요.

전체 수요의 50% 이상을 차지하는 산업용 전력 요금 인상이 시급하다는 주장이 많습니다.

모든 요금을 올려야 하지만 기업이 내는 전기 요금을 더 많이 인상해야죠. 물론 기업들은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지금 올리지 않으면 4~5일 동안 전기 없이 지내는 광역 정전이 닥칠 수 있어요. 당장 조금 덜 내려다 더 큰 대가를 치를 수 있는 거죠. 최소한 발전 원가는 내야죠. 원가도 못 내겠다고 버틸 시점이 아니에요. 전경련에서 우리나라 산업용 전력 요금이 국제적으로 낮은 수준이 아니라고 하지만 어쨌든 원가는 내라는 겁니다.

9·15 정전 사태를 계기로 전력거래소가 갖고 있는 계통망 운영 기능을 한전으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데요.

그런 식의 접근으로는 정전 사태가 또 날 수밖에 없어요. 문제의 핵심이 그게 아니거든요. 한전은 전력거래소가 과거 한전에서 떨어져 나간 것이기 때문에 다시 합치기를 원하죠. 정전 사태를 틈타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려고 해서는 안 돼요. 발전 자회사를 다시 통합하자는 주장도 마찬가지죠. 현재 발전기 출력이 100이고 소비자들이 그걸 초과해 110을 쓰기 때문에 정전 사태가 벌어지는 거예요. 발전기를 자회사가 가졌든 한전이 가졌든 큰 차이가 없어요.

과연 올겨울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요.

순환 단전을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가 없어요. 그러면 순환 단전을 못합니다. 스위치를 강제로라도 내려야 하는데 못하게 되는 거죠. 그대로 광역 정전으로 가는 거죠. 우리는 지금 퍼펙트 스톰을 향해가고 있어요. 순환 단전이 있더라도 이해할 부분을 이해해 줘야 합니다. 지난번처럼 무조건 문책하는 방식은 바람직하지 않아요.
서울대 이승훈 교수 20081009 임대철 인턴기자 photo@...
서울대 이승훈 교수 20081009 임대철 인턴기자 photo@...
약력:1945년 서울 출생. 1970년 서울대 전자공학과 졸업. 1976년 미국 노스웨스턴대 경제학 박사. 1977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2001년 산업자원부 전기위원회 위원장. 2011년 서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현). 2011년 지식경제부 전력위기대응체계개선 태스크포스(TF) 단장(현).

장승규 기자 sk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