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생생 토크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 처리가 불발된 11월 3일 오후 국회의장실에 70~80대 노신사 10여 명이 들어섰다. 이날 오전에 결성된 ‘재야구국원로회의’ 소속 인사들이다.

이 모임의 대표 격인 장경순 의장은 박희태 국회의장에게 “내일모레면 죽을 일밖에 남겨두지 않은 우리들이 한미 FTA 비준안 처리가 안 돼서 나라 걱정을 하고 있다”며 “소모적인 논란을 그치고 국민과 역사 앞에 당당하고 자랑스러운 의정 활동의 진수를 보이며 최단시간 안에 한미 FTA 비준안을 통과시킬 것을 촉구한다”고 적힌 결의문을 읽었다.

같은 시각 서울 여의도에선 경찰차가 시위 중인 시민들을 향해 물대포를 쐈다. 한미 FTA 비준안 처리를 반대하는 시민들이 국회가 있는 여의도로 몰려들자 아침부터 미리 자리한 경찰들이 대응에 나선 것이다. 한 대학생은 “우리나라 이익보다 미국의 이익에 더 맞춰진 한미 FTA 비준안을 처리한다면 국민과 역사를 배반하는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경찰은 하루 종일 국회를 둘러쌌다. 한미 FTA 비준안 처리를 두고 온 나라가 난리다.
한나라당 최고위원인 남경필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장이 31일 저녁 외통위 회의실에서 질서유지권을 발동한 채 회의실 문을 걸어잠그고 한-미 자유무역협정 비준동의안을 처리하려다 민주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 야당 의원들에 막혀 무산된 뒤 회의실 앞에서 야당을 비판하고 있다. 야당 의원들은 '재협상'이라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111031강은구 기자 egkang@....
한나라당 최고위원인 남경필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장이 31일 저녁 외통위 회의실에서 질서유지권을 발동한 채 회의실 문을 걸어잠그고 한-미 자유무역협정 비준동의안을 처리하려다 민주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 야당 의원들에 막혀 무산된 뒤 회의실 앞에서 야당을 비판하고 있다. 야당 의원들은 '재협상'이라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111031강은구 기자 egkang@....
박근혜 전 대표 ‘서둘러야 한다’ 공식 입장

한미 FTA 비준안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첨예하게 대립하는 부분은 ISD라는 조항이다. 투자자-국가소송제를 뜻하는 ISD(Investor-State Dispute Settlement)는 기업이나 투자자가 투자한 국가의 정부가 정책을 바꿔 손해를 볼 경우 해당 국가를 세계은행 산하 국제투자분쟁중재센터(ICSID)나 유엔 국제상거래법위원회 등 국제 중재 기관에 제소할 수 있는 제도다.

야당과 FTA 반대론자들은 자국의 사법제도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정부와 여당은 81개 국가와의 FTA 체결 시 문제없이 해오던 것이라고 반박한다. 이 밖에 래칫(역진방지: 톱니바퀴의 역진을 막기 위한 장치로 개방을 확대하는 방향으로만 법률을 개정할 수 있도록 한 조항) 등도 논란이다.

문제는 이에 대한 문제가 불거지자 국회에서 토론을 1500분 이상 했고, 협정을 체결한 지 4년 8개월이 지났지만 양쪽의 견해 차이가 좁혀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청와대와 정부는 빨리 통과돼야 한다는 생각이다. 국회 299석 중 168석을 점유하고 있는 한나라당도 공식적으로는 마찬가지 입장이다.

하지만 키를 쥐고 있는 한나라당 의원들은 어쩐 일인지 적극적인 모습이 아니다. 국회 외교통상위원회에 이미 상정된 만큼 언제든지 직권 상정하면 처리는 떼어 놓은 당상인 데도 말이다.

복합적인 원인이 있다. 외통위원장인 남경필 한나라당 의원은 한미 FTA 비준안 처리가 정치 생명의 시험대 격이 됐다. 4선의 소장파로 이미지를 굳혀 온 남 의원에 대해 한 한나라당 의원은 “여야가 극한 대치를 대화와 합의로 풀어 국민들에게 합리적인 정치인이라고 각인시킬 수 있는 기회”라며 “남 의원도 이를 놓치고 싶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여기에 외통위 소속인 홍정욱 의원을 포함한 22명의 한나라당 의원들은 작년 12월 “앞으로 국회에서 몸싸움을 하면 19대 총선에 나오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야당이 몸으로 저지하면 적극 대처할 수 없다는 얘기다. 쇄신의 기치를 걸고 지난 5월 원내 지도부에 당선된 황우여 원내대표도 합리적인 성격의 수도권(인천 연수구) 출신으로 분류된다.

박희태 국회의장도 한미 FTA 처리를 위해선 넘어야 할 산이다. 한미 FTA 비준안 처리가 장기 표류하면 내년 예산안 심의·의결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이때 박 의장은 예산안을 다른 여느 해와 같이 직권 상정해야 한다. 단기간 직권 상정을 두 번이나 하게 되면 정치력에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다만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가 이날 한미 FTA 비준안 처리를 서둘러야 한다고 공식 입장을 밝힌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김재후 한국경제 정치부 기자 h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