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깔로 보는 리더의 3단계 이행 과정


우리 시대에 ‘창조적 즐거움’을 한껏 안겨 줬던 스티브 잡스가 갔다. 이제 전 세계인은 일명 ‘잡스 룩’을 입고 프레젠테이션하는 그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다. ‘잡스 룩’은 프레젠테이션 때마다 항상 같은 옷, 같은 스타일을 고집해 붙여진 말이다. 그는 검은색 터틀넥 셔츠에 물이 빠진 리바이스 청바지, 뉴발란스 운동화만 고집했다.

그의 터틀넥 패션에 대한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잡스가 자신이 즐겨 입는 ‘이세이 미야케’의 검정 셔츠를 수백 벌 추가로 구입하기 위해 뉴욕의 이세이 미야케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그 제품은 이미 재고도 없을뿐더러 더 이상 제작되지 않았다.

결국 잡스는 이세이 미야케 직원들을 자신이 있는 실리콘 밸리까지 불렀고 셔츠와 동일한 패턴과 실로 만들어진 셔츠를 추가 주문하는데 성공했다. 월터 아이작슨이 집필한 스티브 잡스 전기에 따르면, 생전에 스티브 잡스가 입었던 터틀넥은 일본인 패션 디자이너인 이세이 미야케가 직접 잡스를 위해 디자인한 세인트크로이(St. Croix) 제품이라고 한다. 그의 집에는 미야케가 만들어준 터틀넥이 수백 벌 있었다고 한다.

잡스는 1980년대 이전만 해도 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조끼까지 갖춰 입었다. 그런 잡스가 왜 검은색 터틀넥만을 고집하게 됐는지는 그간 알려지지 않았는데 아이작슨의 자서전을 통해 그 이유가 공개됐다. 잡스는 1980년대 초 일본 소니를 방문했는데 소니의 유니폼이 바로 터틀넥이었다. 잡스는 이 터틀넥을 애플의 유니폼으로 삼으려고 했는데 직원들의 반대가 완강해 무산됐다. 결국 잡스는 1985년 애플에서 쫓겨났다. 잡스는 1997년 애플에 복귀하면서 터틀넥을 입고 프레젠테이션을 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터틀넥은 애플의 유니폼은 되지 못했지만 잡스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YONHAP PHOTO-0615> SAN FRANCISCO, CA - JUNE 06: Apple CEO Steve Jobs delivers the keynote address at the 2011 Apple World Wide Developers Conference at the Moscone Center on June 6, 2011 in San Francisco, California. Apple CEO Steve Jobs returned from sick leave to introduce Apple's new iCloud storage system and the next versions of Apple's iOS and Mac OSX.   Justin Sullivan/Getty Images/AFP== FOR NEWSPAPERS, INTERNET, TELCOS & TELEVISION USE ONLY ==
/2011-06-07 05:48:22/
<저작권자 ⓒ 1980-2011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SAN FRANCISCO, CA - JUNE 06: Apple CEO Steve Jobs delivers the keynote address at the 2011 Apple World Wide Developers Conference at the Moscone Center on June 6, 2011 in San Francisco, California. Apple CEO Steve Jobs returned from sick leave to introduce Apple's new iCloud storage system and the next versions of Apple's iOS and Mac OSX. Justin Sullivan/Getty Images/AFP== FOR NEWSPAPERS, INTERNET, TELCOS & TELEVISION USE ONLY == /2011-06-07 05:48:22/ <저작권자 ⓒ 1980-2011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잡스 디자인에 영감을 준 소니 디자인

그런데 잡스가 터틀넥에 호감을 가지게 된 계기도 재미있다. 전기에 따르면 당시 소니를 방문한 잡스는 소니 직원들이 유니폼을 입는 것을 신기하게 생각하고 아키오 모리타 당시 소니 사장에게 이유를 물었다. 모리타 사장은 전쟁 후 입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사원들에게 유니폼을 제공했는데, 이것이 나중에는 소니의 특징으로 발전했고 서로 단결하는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소니의 유니폼은 이세이 미야케가 만든 것으로, 소매가 지퍼로 제작돼 이를 떼어내면 조끼로도 입을 수 있는 혁신적인 디자인이었다. 말하자면 잡스가 터틀넥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 바로 터틀넥 디자인의 혁신성에 있었던 것이다.

1976년 창업한 잡스는 인근의 소니 영업장에 들러 제품 설명서를 살펴보면서 디자인에 눈을 떴다고 고백한 바 있다. 잡스에게 소니는 혁신성의 영감을 준 벤치마킹의 대상이었고 이를 창업 초기부터 잘 활용해 결국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터틀넥을 고집한 것은 이 옷을 입음으로써 혁신적인 삶을 늘 온몸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잡스의 터틀넥과 청바지 패션은 럭셔리 룩과는 거리가 멀었다. 세계적인 최고경영자(CEO)의 패션 치고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패션이었다. 그는 검소할 정도로 단조로운 패션을 고집스러울 정도로 선호했다. 이는 ‘반소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다른 사람과 ‘차이 나는 소비’를 추구하다 보면 결국 모두가 개성이 없어지게 된다. 이제 루이비통 핸드백은 (진품이든 짝퉁이든) 대부분 여성들이 소유하고 있다. 차이 나는 소비가 역설적으로 차이를 사라지게 한 것이다.

이때 극단적으로 반소비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시킴으로써 역으로 차이 나는 소비를 추구하기도 한다. 그것은 더 이상 과시적이거나 뽐냄에 의해서가 아니라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검소함으로 자신을 나타내는 것인데, 결국 보다 교묘한 차이를 나타내는 효과가 있다.

잡스의 터틀넥 패션은 신화적으로 설명하면 더 깊은 의미를 지니는 상징성을 보여준 것으로 보인다. 신화학자 로버트 블라이가 쓴 ‘무쇠 한스 이야기’에는 소년을 남자로 키우고 인도하는 무쇠 한스라고 불리는 ‘야성인’의 존재와 역할을 통해 기사로 변장한 왕자가 남성성을 회복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블라이에 따르면 현대사회는 지나치게 여성화돼 있다. 남자는 가족 내에서 남편으로서의, 아버지로서의 권위를 상실하고 외톨이가 되어가고 있으며, 더 이상 남자다움의 빛으로 아이들을 제대로 건사해 내지 못하고 있고, 가족의 울타리조차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보듯이 부드럽고 예의 바른 꽃미남들이 양산되면서 남자만의 거칠거칠한 생명력이 소멸하면서 수동적이고 착한 남자들을 양산하고 있다. 블라이는 이전의 ‘전사’처럼 싸우면서 가족과 자기 내면의 영역을 지켜내고 진정한 사회적 가치에 헌신, 원형질의 ‘남자다움’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것을 그는 무쇠 한스 이야기를 통해 이른바 ‘야성인’의 복권으로 전하고 있다. 블라이는 야성인과 야만인은 다르다고 주장한다. 자연적인 남자다움을 ‘야성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영혼이 없는 무반성적인 폭력성이야말로 ‘야만적’인 것이라고 한다.


나이 들수록 무채색에 끌리는 이유는

블라이는 이 책에서 야성인으로의 이행 과정을 색깔을 통해 단계적으로 성숙해 가는 것이라고 암시한다. 즉 기사로 변장한 왕자는 처음에는 ‘붉은 말’, 다음에는 ‘흰 말’, 그 다음에는 ‘검은 말’로 갈아탄다. 이러한 색깔은 남성의 인생과 관련해 논리적이고 상징적인 발전을 의미한다. 붉은색은 젊은 시절의 감정과 억제되지 않는 성욕을 뜻한다. 흰색은 자신의 일과 법규에 따르는 삶을, 검정색은 성숙을 의미하며 비로소 연민과 인류애가 꽃을 피운다는 것이다.

잡스가 검정 터틀넥을 즐겨 입은 것은 블라이가 말한 것에 대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잡스는 창업 후 패션을 보면 빨간색 등 컬러가 들어간 나비넥타이를 즐겨 착용했다. 이 시기에 잡스는 칭찬과 함께 위협·욕설·경멸 등으로 목표 달성으로 이끄는 냉혹한 리더라는 평가도 받았다.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냉혹하고도 뻔뻔스러운 리더도 서슴지 않았다. “훌륭하고 매력적이지만 폭발적이고 욕설도 서슴지 않고 퍼붓는 사람, 비인간적일 정도로 완벽을 추구하는 욕심 때문에 사기충천한 일꾼마저 나가버린다.” 포천지에는 이런 내용이 실리기도 했다. 잡스는 1980년대 소니를 방문하면서 터틀넥을 접하고 이 패션을 입기 시작했는데 이게 바로 흰색을 뛰어넘어 검은색으로의 이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잡스는 1985년 애플에서 쫓겨나면서 혹독한 시련기에 접어든다. 잡스는 창업과 내쫓김, 실패와 좌절, 그리고 재창업과 부활을 겪는다. 이 단계에서 정장에 흰색 셔츠 등 옷을 입은 모습도 보인다. 블라이의 표현대로 일과 법규에 충실하면서 재기를 암중모색했던 것이다.

그리고 애플에 복귀하면서 검은색 터틀넥이 그의 아이콘이 되었는데 이는 성숙의 단계로의 이행을 암시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스티브 잡스가 스물한 살 때 창업부터 애플에서 쫓겨나기까지는 거침없는 도전과 모험을 상징하는 붉은 말을 타고 있었던 기간이었다면 애플에서 쫓겨난 이후부터 애플에 복귀하기 전까지는 흰말로 갈아탔으며 애플에 복귀한 이후부터는 성숙의 단계로 접어든 검은 말로 갈아 탄 것으로 대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이’ 시리즈를 연속으로 내면서 잡스는 혁신과 창조가 최고의 원숙 단계로 이행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블라이는 임기 말의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검정색 말을 타고 있었다고 말한다. 링컨은 더 이상 감정(붉은색) 또는 외형적인 원칙이나 법규(흰색)로 나라를 다스리지 않았으며, 남을 탓하지 않았고 뛰어난 철학적인 유머 감각을 발휘했다. 검정색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남성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그런 남성은 진정으로 신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감춰진 구석이 전혀 없다. 자신의 어두운 그림자마저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통합하기 때문이다.

흔히 승용차를 보면 취향을 알 수 있는데 젊은 층은 주로 컬러가 강한 원색을 선호하고 나이가 들수록 흰색이나 검은색을 선호한다. 블라이에 따르면 이게 ‘젊음’에서 ‘성숙’으로의 진화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다만 젊은이가 검은색을 선호한다면 ‘조로증’을 경계해야 할 것이고 장년층이 원색을 선호한다면 뜻하지 않게 오해를 살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 또 자신의 ‘애마’가 무슨 색깔인지를 보면서 자신의 성숙 단계를 체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최효찬 자녀경영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