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스와 원저우


희귀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를 추모하는 열기는 중국에서도 뜨겁다. 애플 매장 앞에서 꽃다발을 놓으며 애도하는 중국인들의 모습과 잡스의 전기(傳記) 중문판을 사기 위해 문을 열기 전부터 서점 앞에서 줄을 선 시민들의 광경이 인터넷을 통해 그대로 전해졌다. 중국 관영 언론은 물론 인터넷에서는 잡스 추모를 통해 중국 현실에 대한 불만과 자기비판을 하는 글들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중국에 왜 잡스 같은 인재는 없을까’라는 평론과 인터넷 토론이 대표적이다. 때마침 잡스 사망 직전 불거진 원저우 기업인들의 야반도주가 다시 조명 받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원저우는 중국 민영기업의 고향으로 불리는 곳이다. 원저우 기업인들의 경영난 해법을 잡스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나온다.
[중국]원저우 기업의 ‘경영난 해법’ 찾기
중국 대륙도 울었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최근 베이징의 애플 매장 앞에 잡스의 사진과 함께 쭉 늘어선 꽃다발과 불타는 양초, 한 입 베어 문 사과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보도했다. 잡스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직후 이틀간 수백만 명의 중국 네티즌들이 중국판 트위터인 시나웨이보에 그를 애도하는 글을 올렸다.

중국에서도 잡스 전기 전 세계 동시 발간일인 10월 24일 21개 도시 30개 서점에서 중문판이 팔리기 시작했고, 대부분의 서점에서 순식간에 동이 났다고 중국 언론들이 보도했다. 상하이와 난징 등에서는 잡스 사망일 10월 5일을 기념해 정한 발매 시간 10시 5분을 2시간여 앞둔 때부터 100~200명이 서점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광경도 목격됐다. 대부분의 서점은 발매 1시간여 만인 오전 11시께 매진을 알리는 안내문을 내걸어야 했다.

중국 관영 글로벌타임스는 잡스 추모 열기는 중국 현실의 불만을 표현한 것이라며 당분간 중국에 잡스 같은 인재가 나오기 힘들 것이라는 논평을 냈다. “혁신 결핍은 제조 대국 중국의 미래에 치명적일 수 있다. 잡스를 존경하고 기억하는 동시에 중국의 신생 기업인에 더 관심을 갖자”는 게 글로벌타임스의 주문이다. 중국판 잡스를 길러낼 수 있는 것은 전체 사회라는 것이다. 인터넷을 달구는 추모 열기엔 더욱 거친 표현도 나온다.

한 네티즌은 “권위주의적인 정치체제, 과거만 바라보는 문화, 지식재산권 도용이 이뤄지는 곳에서 혁신의 종결자를 얘기하다니. 생각도 하지 말라”고 일침을 놓았다. 800만 명의 팔로워를 두고 있는 리카이푸 전 구글차이나 대표는 시나웨이보에 야후과 유튜브의 창업자인 제리 양과 스티브 첸을 사례로 들며 중국이 똑똑하지 않거나 잠재력이 없는 게 아니라 기억만을 요구하고 비판적 사고를 독려하지 않는 중국 교육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제리 양과 스티브 첸은 모두 대만 출신으로 어릴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예일대 천즈우 교수도 “중국에서 선생님이 하는 가장 첫 번째 일은 학생들의 튀는 부분을 다른 학생들 수준으로 다듬어주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중국 학자 우자샹은 “애플이 나무에 달린 과일이라면 그 가지는 사고하고 창조할 수 있는 자유이고, 뿌리는 민주주의”라며 “권위적인 정치체제에서 거대한 프로젝트를 함께 수행하는 건 가능하지만 과학기술의 거인은 만들어낼 수 없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잡스와 하이얼의 장루이민 회장을 상기시키며 가능성을 기대하는 평론도 있다. 중화공상시보는 ‘잡스와 장루이민’이라는 평론에서 잡스는 에디슨과 포드에서 시작해 마이크로소프트와 구글이 성장한 혁신 경쟁의 환경에서 살아왔지만 장루이민이 중국에서 하이얼이라는 작은 국유 기업을 맡았던 당시 회사 규정 1호는 자동차 사이에 소변을 누지 말라는 수준이었다며 하이얼은 이렇게 열악한 환경에서도 세계 최대 냉장고, 2위 세탁기 제조업체가 됐다고 평가했다.

평론은 하이얼이 지난 10월 18일 파나소닉 산하 산요전기의 일본과 동남아 백색가전 제조 및 판매 부문을 인수하는 최종 계약을 한 것을 사례로 들기도 했다. 그러나 잡스 전기 발매 하루 만에 길거리에 짝퉁 잡스 전기가 등장하고 인터넷에 짝퉁 무료 전자책이 나도는 현실은 중국에 잡스 같은 인재가 나오기에는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예고한다. 중문판을 펴낸 중신출판사는 “표지만 비슷할 뿐 내용은 다르다”며 “이전의 잡스 관련 책을 짜깁기한 것”이라고 전했다.

“잡스도 중국에 왔다면 관 위주의 사고와 짝퉁이 끊이지 않는 환경에서 이단아로 배척되며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원저우 기업들의 어려움은 자금이 부족한 게 아니라 혁신 능력이 부족한 때문이다.” 중국의 한 평론가가 인터넷에 올린 글이다. 잡스의 사망을 계기로 원저우의 자금난을 혁신에서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중국 ‘시장경제의 발원지’로 꼽히는 원저우에선 중소기업 사장들이 사채를 썼다가 자금난에 시달려 야반도주하거나 자살하는 사건이 잇따르고 있다. 최근엔 원자바오 총리까지 달려가 기업인들의 애로를 청취하는 모습이 TV 전파를 타기도 했다. 원저우의 한 인터넷 사이트엔 잡스의 사망은 원저우 기업들이 애벌레에서 나비로 변신할 수 있는 혁신 사고의 중요성을 되새기게 한다는 글이 올라왔다.

자산 거품으로 폭리의 유혹을 받은 원저우 기업인들이 실제 사업보다 고리대금업과 부동산 투자 등 투기를 시작했다며 자금난은 이미 예고됐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원저우 기업인을 정부 돈으로 구제하는 것은 납세자의 돈으로 투기꾼에게 비용을 대는 것이라며 반대론을 펴기까지 했다. 원저우인들은 부동산을 비롯해 탄광과 옥 등 돈 되는 투자라면 가리지 않고 앞장서 부(富)를 일구기 때문에 중국의 유대인이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원저우의 자금난은 투기꾼의 자금난이다. 그리 걱정해 줄 일이 아니다(황웨이핑 인민대 교수)”는 지적도 나온다.

원저우 기업인의 어려움은 중국 민영기업이 처한 현실적 한계를 보여준다는 분석도 있다. 좡위민 인민대 교수는 “원저우 기업은 대부분 신발·양말 등을 만드는 기업들로 첨단 기술로 성공한 기업을 찾기 어렵다”며 “중국에서 많은 자본이 요구되는 사업을 민영기업이 하기 힘들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안정성 위주로 대출해 온 중국 은행들이 국유 기업에만 주로 돈을 빌려주는 게 문제라는 것이다. 중국이 긴축정책을 시행할 만큼 유동성이 넘쳐나지만 돈이 필요한 중소 민영기업에는 자금이 제대로 흘러들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대출할 때 자산 규모가 비교적 큰 기업만 선호하는 등 중국 은행들의 혁신 능력 부족이 원저우 기업의 자금난을 키웠다는 지적이다.
[중국]원저우 기업의 ‘경영난 해법’ 찾기
시장 주도 발전 모델의 한계

결국 민영기업은 연이율 100~200%의 고리 사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대외 환경이 악화되면서 쉽게 충격을 받게 됐다는 것이다. 임금과 원자재 가격 급등, 미국과 유럽 재정 위기에 따른 수출 주문 감소, 중국 정부의 금융 긴축 정책에 자금난이 심화됐다는 지적이다. “원저우 중소기업 부채 중 은행에서 빌린 것은 30%, 사채 시장에서 빌린 고리대가 70%”라는 한 사채업자의 전언도 있다.

원저우의 어려움은 정부 주도의 경제발전 방식을 채택해 온 쑤저우 등 장쑤성 이남(쑤난) 지역의 상대적 안정과 대조되며 중국에서 해묵은 원저우 대 쑤난 발전 방식 모델의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대도시보다 현급의 작은 도시의 발전에 집중하면서 도농 불균형 문제를 해결한 쑤난 발전 방식은 정부가 주도한 때문에 첨단 업종 기업의 발전이 가능했고, 상대적으로 대외 위기에 탄력적인 체질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시장 주도의 발전 모델을 중시한 원저우 방식은 중국 같은 환경에서는 쑤난 방식에 비해 생존력이 떨어진다는 주장이 다시 힘을 얻고 있는 것이다. 잡스를 추모하는 열기에서 중국 고성장 뒤에 가려진 그림자를 보게 된다.




오광진 한국경제 국제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