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싱크탱크의 모색 上

삼성경제연구소는 한국 싱크탱크 생태계의 지각변동을 대표한다. 한경비즈니스가 실시하는 ‘대한민국 100대 싱크탱크’ 조사에서 매머드급 정부 출연 연구소들을 모두 제치고 3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 1986년 삼성그룹의 부설 연구소로 출발했지만 지금은 한국 사회의 의제 설정을 주도할 만큼 성장했다. 현장 밀착형 연구와 한발 앞서가는 대안 제시가 강점이다. 150여 명의 연구원이 생산한 방대한 지식 콘텐츠가 온라인과 동영상 보고서, 스마트폰을 통해 끊임없이 발신되고 있다.
융·복합 연구로 변화에 앞서간다- 삼성경제연구소
삼성그룹 주요 계열사들이 둥지를 틀고 있는 강남역 인근 ‘삼성타운’. 하늘로 깎아지른 듯 치솟은 초고층 건물들이 위압감을 자아낸다. 이 가운데 삼성전자 사옥과 마주선 삼성생명 서초빌딩에 삼성경제연구소가 입주해 있다. 2007년 11년간의 용산 시대를 마감하고 이곳으로 옮겨왔다.

지난 10월 25일 서초빌딩 30층 삼성경제연구소 정보센터에 들어서자 시원스레 펼쳐진 서울 시내 전망이 한눈에 들어왔다. 연구원들을 위한 도서관 겸 휴식 장소다. 한쪽에는 학술지와 잡지를 따로 모아 놓은 산뜻한 공간이 나온다. 연구원들의 방송 인터뷰 촬영을 위해 특별히 마련해 놓은 곳이다. 이날도 여러 건의 인터뷰가 예정돼 있다. 창 쪽에는 ‘식객’, ‘신의 물방울’ 같은 만화책들도 비치돼 있다. 연구원들의 유연한 사고와 상상력 제고를 위한 것이다.

정보센터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한 것은 수천 권의 전문 서적이 빽빽이 들어찬 서가다. 연구원들이 수시로 드나들며 필요한 책을 찾아볼 수 있도록 돼 있다. 자료 검색을 도와주는 전문 검색사도 5명이 근무한다. 안내를 맡은 문지원 연구조정실 팀장은 “국내 최고 수준의 전문 데이터베이스망을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융·복합 연구로 변화에 앞서간다- 삼성경제연구소
동영상 콘텐츠 자체 생산

삼성경제연구소는 이 빌딩 28~31층까지 4개 층을 사용한다. 28층에 자리한 스튜디오 역시 다른 국내 연구소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시설이다. 방송용 카메라 6대와 전문 영상 편집 장비 7대가 좁은 공간 안에 들어가 있다. 전체적으로 미국 브루킹스연구소의 방송 스튜디오와 비슷한 규모다. 차이점은 브루킹스연구소가 각종 TV 채널의 생방송 연결을 위해 스튜디오를 활용하는 반면 삼성경제연구소는 자체 동영상 콘텐츠 제작을 위해 이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보통 하루 5~6건씩 녹화 스케줄이 잡혀 있다. 이날도 ‘전쟁과 전략’, ‘위대한 광고의 조건’, ‘경영전략’, ‘알기 쉬운 경제지표’ 등의 녹화가 진행됐다. 모든 동영상은 6~10분 분량으로 제작돼 유료 사이트인 ‘SERI CEO’를 통해 제공된다. 시간에 쫓기는 최고경영자(CEO)들을 위해 복잡한 경제·경영 정보를 핵심만 뽑아 알기 쉽게 전달한다는 콘셉트다.

삼성경제연구소의 영향력은 다양한 분야에서 확인된다. 삼성경제연구소는 매주 최소 3건 이상의 연구 보고서를 공개한다. 경제포커스(월)와 CEO 인포메이션(수), 경영노트(목)를 기본 축으로 그때그때 각종 이슈 페이퍼가 추가 된다. 삼성경제연구소의 보고서는 환율과 유가 전망은 물론 히트 상품과 농업, 문화 산업 분석까지 거의 모든 주제를 포괄하며 항상 언론의 주목을 받는다. 하다못해 매년 선정하는 ‘휴가 때 CEO가 읽어야 할 책’까지 큰 화제를 모을 정도다.

삼성경제연구소가 최근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융·복합 연구다.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이제는 통합적 접근 없이는 문제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국내 연구소들은 대부분 주전공 분야를 갖고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거시 경제에 강하고, 산업연구원은 산업 분석,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통상정책, 노동연구원은 노동문제에 두각을 나타낸다. 반면 삼성경제연구소는 거시 경제에서부터 글로벌 경제, 공공 정책, 마케팅, 조직, 경영전략, 기술까지 모두 포괄한다. 삼성경제연구소가 미래 융·복합 연구에서 한발 앞서갈 수 있다고 확신하는 이유다.

삼성경제연구소는 1986년 일본의 노무라총합연구소(NRI)를 모델로 설립됐다. ‘삼성경제연구소 20년사’는 다부치 세츠야 일본 노무라증권 회장이 “앞으로는 경영 환경을 예측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며, 그런 만큼 세계의 흐름을 읽고 적절하게 대처해 나가는 방안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전략 조직이 필요하다”고 한 조언이 이병철 전 삼성 회장이 경제연구소 설립을 결심한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고 적고 있다.

류한호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조정실장은 “1980년대 중반 금융회사를 중심으로 부설 연구소를 만드는 것이 유행했다”고 말했다. 대신경제연구소와 대우경제연구소가 이때 등장했다. 주식시장 활황과 금융 산업의 성장으로 자체적인 거기 경제 지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또한 제조업체들이 해외시장 개척에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해외 정보 확보가 절실했다. 1980년대를 관통하면서 경제의 무게중심이 정부에서 민간 부문으로 이동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LG경제연구원과 현대경제연구원도 이 시기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문을 열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1986년 7월 삼성생명(당시 동방생명) 부설 연구소로 출발했다. 창립 연구원도 25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한국의 대표 싱크탱크를 꿈꿨다. 이병철 전 회장은 “(지금은) 필요에 의해 삼성생명의 부설로 설립하지만, 그 기능은 삼성그룹 전체를 지원하는 데 있다. 지금은 역량이 부족해 당분간 삼성그룹 내의 일에 전염하겠지만 어디까지나 그 지향점은 사회과학 분야의 종합 연구소에 있다”고 못을 박았다.

삼성경제연구소는 1990년 대 초반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을 지원하면서 그룹 내 싱크탱크로서 위상을 다졌다. 1997년 외환위기는 오히려 대약진의 발판이 됐다. 위기에 몰린 많은 대기업들이 연구소에 대한 지원을 대폭 줄이고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나섰지만 삼성은 달랐다. 아무리 대기업도 당장의 사업과 직결되지 않는 국책 연구소 규모의 경제 연구소에 지속적으로 투자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많은 연구소들이 문을 닫거나 규모를 줄이면서 삼성경제연구소의 존재감은 더욱 도드라지기 시작했다.

1997년 7월 삼성경제연구소는 연구 데이터베이스 무료 공개라는 파격적인 조치를 단행했다. 일반인들도 누구나 연구소 홈페이지(SERI.org)에서 삼성경제연구소 석박사급 인력들이 생산한 보고서들을 공짜로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연구소의 인지도와 영향력이 몰라보게 올라갔다. 삼성경제연구소의 연구 보고서는 그동안 이런 고급 보고서의 혜택을 보지 못하던 중소기업·대학생·언론에 큰 반향을 불렀다. 정보 공개가 삼성경제연구소를 새로운 지식 중심, 지식 권력으로 부상시켜 준 것이다.

현재 연구소의 홈페이지는 국내 최대의 지식 플랫폼으로 성장했다. 회원 수만 180만 명이 넘는다. 지난해 모바일 서비스(m.seri.org)를 시작했으며 트위터 팔로워도 5만 명을 돌파했다. 2001년 문을 연 SERI CEO도 새로운 성공 모델이다. 유료로 운영되는 이 서비스는 삼성경제연구소의 보고서 내용을 10분 이내의 짧은 동영상으로 담아 제공한다. 현재 유료 회원 수가 1만8000명에 달한다. 연구소는 SERI CEO로만 매년 180억 원을 벌어들인다.
융·복합 연구로 변화에 앞서간다- 삼성경제연구소
시장 지향적 연구…일차 고객은 삼성

삼성경제연구소는 시장 지향적인 연구를 강점으로 내세운다. 정보 서비스 수요자의 목소리에 적극적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이다. 국내 최고의 싱크탱크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연구소의 일차 고객은 지금도 삼성그룹이다. 이는 삼성경제연구소가 남다른 경쟁력을 갖게 된 이유 중 하나를 설명해 준다.

류한호 실장은 “산업 현실과 동떨어진 내용이나 핵심이 모호한 보고서를 내면 당장 그룹 내에서 불만이 터져 나온다”고 말했다. 정기영 삼성경제연구소장은 그룹의 사장단 회의에 참석해 정기적으로 경제 동향과 전망을 브리핑한다. 연구소에서 내놓은 거시지표 전망은 각 계열사들이 매년 사업 계획을 세우는 데 기준이 된다.

최근 그룹 내 연구 수요가 점점 증가하는 추세다. 삼성전자를 포함해 글로벌 톱 대열에 올라선 계열사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업계 선두 기업들은 보안 문제로 외부 컨설팅 의뢰를 꺼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산업의 융·복합 흐름에 따라 최근 기술산업실 인력을 대폭 보강했다.

삼성경제연구소의 올해 가장 큰 연구 테마는 중국이다. 산업 기술에서 강력한 라이벌로 부상한 중국을 재조명하는 프로젝트다. 류 실장은 “많은 사람이 산업 기술에서는 한국이 앞서간다고 막연하게 생각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며 “중국은 태양광 등 신산업에서 이미 한국을 앞지르고 있다”고 말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지난 7월 중국을 주제로 대규모 국제 심포지엄을 개최했으며 오는 12월 같은 주제로 두 번째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INTERVIEW

융·복합 연구로 변화에 앞서간다- 삼성경제연구소
류한호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조정실장
“팀 연구 강점…정보 발신 채널 다양화”

삼성경제연구소는 정보 발신 채널 다양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연구소 대표 사이트인 SERI.org는 이미 국내 최대 지식 플랫폼으로 자리를 잡았다. 최근에는 동영상 보고서와 오디오 보고서도 선보였다. 트위터 등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도 적극 활용한다. 류한호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조정실장은 “새로운 미디어 환경의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며 “정보와 그래픽을 결합한 인포그래픽 서비스도 조만간 선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어떤 연구를 지향하나.

앞선 연구, 현장 연구, 열린 연구가 연구소 모토다. 삼성경제연구소가 다른 연구소보다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은 시기적절한 연구를 하기 때문이다. 국책 연구소에 연구의 깊이나 논리, 정치성에서 훨씬 뛰어난 박사들이 많지만 보통 연구 기간이 6개월에서 1년이다. 우리는 필요하면 1주일 만에도 연구 결과를 내놓는다. 탁상공론을 지양하고 외부 전문가 의견을 적극적으로 들으려고 노력한다.

외부 전문가의 의견을 어떻게 듣나.

현재 150개가 넘는 연구회가 가동되고 있다. 전문가·교수·연구원·언론인·공무원들이 폭넓게 참여한다. 연구소에서 회의 장소도 제공하고 식사비도 지원한다. 이런 모임을 통해 누가 어떤 분야의 진짜 전문가인지 알 수 있다. 필요하면 공동 연구도 한다.

어떤 방식으로 연구가 이뤄지나.

혼자서 하는 단독 연구는 거의 없다. 적어도 3명 이상이 함께 참여한다. 연구 주제가 정해지면 그 연구의 프로젝트 매니저(PM)가 지정된다. 해당 연구에 대해서는 PM이 평가권도 갖는다. 동시에 여러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경우도 생긴다. 이제는 이런 방식이 체질화됐다.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헤어지고 다시 만난다.



융·복합 연구를 강조하는 이유는 뭔가.

삼성그룹만 해도 스마트 그리드 프로젝트를 하면 삼성전자 혼자 하지 않는다. 20여 개 계열사가 함께 연합군을 구성한다. 그래야 경쟁력을 갖는 시대다. 인재 역시 전자공학이나 물리학 같은 특정 영역 전공자와 경제·경영을 배운 융·복합형 인재가 각광을 받는다. 연구소에서 이런 인재들을 최근 대거 채용했다.

‘세리(SERI)’가 하나의 브랜드가 됐는데.

연구 기관의 생명은 신뢰성이다. 그동안 세리라는 브랜드가 자연스럽게 알려졌다. 이제는 적극적인 브랜드 가치 제고와 관리에 나설 것이다. 브랜드 이미지는 자칫하면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 내부 프로세스와 연구 체계를 꾸준히 정비할 필요가 있다.



취재=장승규 기자 skjang@hankyung.com│사진=김기남 기자 knk@hankyung.com│후원=한국언론진흥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