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강 워싱턴의 지식 생태계 (2)

싱크탱크는 정책 도시 워싱턴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다. 이들이 빠지면 강대국의 파워풀한 정책 프로세스도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싱크탱크는 행정부 정책 결정자들에게 긴 호흡의 새로운 정책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보급기지이자 차기 정부에 준비된 인재를 공급하는 인력풀 역할을 한다.

공식적인 외교 채널로 처리하기 어려운 막후 접촉과 의견 조율을 담당하는 곳도 워싱턴 싱크탱크들이다. 세계 각국이 이들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이유다.

워싱턴의 대형 싱크탱크들은 저마다 화려한 이사진을 자랑한다. 이사회 멤버들은 연구소의 가장 큰 후원자이자 연구소의 역량을 나타내는 강력한 인적 네트워크의 출발점이다. 그래서 싱크탱크의 파워는 이사진에서 결정된다는 말도 나온다.

자타가 공인하는 넘버원 싱크탱크인 브루킹스연구소의 이사회 회장은 존 손튼 전 골드만삭스 사장이 맡고 있다. 예일대 경영대학원 출신으로 금융계에서 손꼽히는 억만장자다. 2000년대 초반 골드만삭스를 그만둔 후 중국 베이징의 칭화대 교수로 자리를 옮길 만큼 중국에 대한 관심이 유별나다. 거액을 기부해 자신의 이름을 딴 존손튼차이나센터를 연구소 내에 만들기도 했다.

매사추세츠 애버뉴를 사이에 두고 브루킹스연구소와 마주 보고 있는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 역시 막강한 이사진으로 유명한 곳이다. 1981년 문을 열어 워싱턴에서 비교적 신세대에 속하는 이 연구소의 이사회 회장은 다름 아닌 세계 최대 사모 펀드 블랙스톤의 창업자 피터 피터슨 회장이다.

2007년 블랙스톤을 상장해 단숨에 18억8000만 달러를 손에 쥔 그는 리먼브러더스 회장, 닉슨 정부의 상무장관,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이사 등을 역임한 월가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이사회에 국내외 거물급 포진

이 연구소는 지난 2006년 창립 25주년 때 피터슨 회장의 업적을 기려 연구소 이름을 아예 국제경제연구소(IIE)에서 ‘피터 G.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약칭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로 바꿨다. 이 연구소 47명의 이사 명단에는 국제금융과 국제경제계의 거물들이 총망라돼 있다.

첸유안 중국개발은행 총재, 모하메드 엘-에리안 핌코 최고경영자(CEO), 토이 헤이워드 BP CEO,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 세르지오 마르키오네 피아트·크라이슬러 CEO, 인드라 누이 펩시 회장, 폴 오닐 전 재무장관, 새뮤얼 팔리사노 IBM 회장, 장 클로드 트리셰 유럽중앙은행 총재, 폴 폴커 전 FRB 의장, 셰이크 하마디 사우드 알 사야리 전 사우디 통화청 총재 등을 비롯해 로스차일드 가문의 린 포스터 드 로스차일드 EL로스차일드 CEO, 스웨덴 발렌베리 가문의 야곱 발렌베리 인베스터 회장 등도 이름을 올려 놓고 있다.

피터슨은 국제경제에 특화된 전문 싱크탱크를 표방하며 단기간에 급성장했다. 대형 종합 싱크탱크인 브루킹스에 비하면 연구원도 소수 정예의 진용을 갖췄다. 피터슨은 설립 스토리부터 예사롭지 않다.

1976년 미국 독립 200주년을 기념해 독일 정부가 전후 마셜 플랜에 대한 보답의 의미로 출연한 독일마셜기금에서 초기 설립 자금의 상당 부분을 받았다. 마커스 놀랜드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 부소장은 “지금은 이 기금에서 돈을 받지 않은 지 오래됐다”고 말했다. 현재 연구소 운영 자금은 피터슨 회장이 기부한 기금의 운영 수익, 다른 비영리 재단의 연구비 지원, 개인 기부가 각각 3분의 1씩 차지한다.
놀랜드 부소장은 피터슨의 독특한 조직으로 기업자문위원회를 꼽았다. 그는 “10년 전 연구 활동에 기업들의 의견을 반영하기 위해 처음 위원회를 만들 때는 불필요한 간섭을 우려해 반대하는 직원이 많았다”며 “지금은 가장 흥미로운 위원회로 자리 잡았다”고 말했다.

피터슨 회장이 이끄는 이사회는 실제 연구 활동에는 크게 간여하지 않는다. 연구 주제 설정, 신규 인력 확보 등과 관련해서는 오히려 베리 아이켄그린 버클리대 교수가 위원장을 맡은 연구자문위원회의 적극적인 조언과 감독을 받는다.

하지만 서로가 잘 아는 학계 동료들이다 보니 새로운 통찰을 얻기는 쉽지 않다. 놀랜드 부소장은 “기업인들은 굉장히 스마트하고 새로운 시각을 갖고 있어 많은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클린턴 정부에서 대통령경제자문위원회 수석 이코노미스트로 활약한 놀랜드 부소장은 미국 내 대표적인 한반도 문제 권위자 중 한 명이다. 놀랜드 부소장은 피터슨도 대외 홍보와 마케팅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다고 말했다.

그는 “언론 인터뷰를 하고 나면 받은 명함을 컴퓨터 e메일 주소록에 등록한다”며 “새로운 연구 결과를 낼 때마다 이렇게 등록된 주소로 e메일을 보내는 것이 중요한 업무 중 하나”라고 말했다.

워싱턴에는 크고 으리으리한 주류 싱크탱크만 있는 것이 아니다.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 바로 옆 건물에는 세계적인 환경 운동가인 래스터 브라운 소장이 1974년 설립한 월드와치가 입주해 있다.

상주 직원이 10명에 불과한 미니 싱크탱크지만 환경 분야에서 이들이 갖는 영향력은 막강하다. 1982년부터 발간해 온 ‘지구환경보고서’는 기후변화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처음 불러일으킨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월드와치는 최근 ‘후쿠시마 이후 세계의 원자력’이라는 보고서를 내 또 한 번 주목을 받았다. 세계 원전 산업의 현황을 분석한 이 보고서는 원자력발전이 경제성 면에서도 이미 경쟁력을 잃었으며, 지난해 전 세계 재생에너지 발전량이 사상 처음으로 원자력발전의 발전량을 넘어섰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월드와치 러셀 사이먼 연구원은 “보고서가 절반 이상 집필 완료된 상황에서 후쿠시마 원전 사태가 터졌다”며 “새로운 내용을 반영하고 발간을 서둘러 시기적절한 타이밍에 보고서를 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출판 수입·개인 기부는 감소 추세

연구 활동은 10여 명 규모의 선임 연구원들이 주축이 돼 이뤄진다. 이들은 대학이나 다른 연구소에 적을 두고 있으면서 주제에 따라 월드와치 연구에 참여한다. 연구소의 재정은 출판물 판매와 소액 개인 기부, 각종 공익 재단의 연구 보조금 등으로 충당된다.

출판물 판매는 지구환경보고서 등 각종 보고서를 유료로 판매해 얻는 수익이다. 개인 기부는 50달러에서 1000달러 이상까지 다양하다. 사이먼 연구원은 “지난 10년 동안 출판물 수입과 소액 기부는 감소 추세”라고 말했다.

현재 연구소가 가장 크게 의존하는 것은 공익 재단들의 연구 보조금이다. 하지만 이 자금들은 갈수록 까다로운 조건이 붙고 있다. 사이먼 연구원은 “과거에는 지원금을 받으면 연구소에서 알아서 자체적으로 쓸 수 있었다”며 “최근에는 특정 연구 분야를 지정해 돈을 주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월드와치는 2년 전 빌앤드멜린다게이츠재단이 ‘식량과 농업 프로그램’에 거액을 기부하면서 이 부문의 규모를 크게 늘리고 있다. 최근에는 10여 명의 인턴을 따로 채용하기도 했다.

아프리카에서 일어나는 농업 관련 혁신을 발굴하고 이것이 지구 전체의 지속 가능성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연구하는 것이다. 지난해 2명의 연구원이 15개월 동안 아프리카에 파견돼 현지 조사를 벌였다. 그 내용이 2011년 지구환경보고서에 따로 한 장으로 수록돼 있다.

환경 분야 싱크탱크들은 오바마 정부 출범이 가져온 변화를 실감하고 있다. 사이먼 연구원은 “정부의 기후변화 정책 방향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말했다. 환경보호청장의 교체가 단적인 사례다.

조지 부시 정부 때 환경보호청장은 산업 규제가 환경문제에 대한 적절한 대처 방안이 아니라는 소신을 가진 인물이었다. 당연히 기후변화 문제에서도 회의적인 입장을 지지했다. 반면 오바마 대통령 집권 후 새로 임명된 청장은 배출 가스 규제에 대한 강력한 옹호론자다.

싱크탱크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이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의 필요성도 커지고 있다. 펜실베이니아대 싱크탱크와 시민사회 프로그램 제임스 맥간 디렉터는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활약을 펼치고 있는 학자다.

그는 “싱크탱크는 한 국가의 시민사회의 성숙도를 재는 핵심 지표”라고 말했다. 싱크탱크에 자유로운 연구와 비판이 허용돼야만 정책 이슈에 대한 활발한 토론이 이뤄지고 성숙한 시민 정신이 탄생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맥간 디렉터는 지난 2007년부터 전문가 설문 조사를 토대로 세계 싱크탱크 순위를 발표하고 있다. 그는 “어떤 싱크탱크가 있는지, 원하는 정보를 얻기 위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려주기 위해 처음 조사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보고 명칭도 ‘글로벌 고투 싱크탱크 서베이(Global Go-To Think Tanks Survey)’로 붙였다. 이 조사는 싱크탱크에 자금을 지원하는 공익 재단들에는 중요한 판단 지표 역할도 할 수 있다.

과도한 영향력 우려 목소리도

올 초 나온 2010년 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세계 싱크탱크는 모두 6480개에 달한다. 이 가운데 57%를 북미와 유럽 지역이 차지하고 있다. 싱크탱크 숫자는 최근 수십 년 동안 폭발적으로 증가세를 보였다.

단순히 숫자만 늘어나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연구 영역과 영향력에서도 빠른 팽창을 기록했다. 보고서는 이러한 싱크탱크의 확산을 가져온 요인으로 민주화·세계화·현대화 등을 꼽았다.

최근 두드러지는 현상은 하이브리드 싱크탱크의 등장이다.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 싱크탱크들이 대학 연구소, 컨설팅 회사, 활동가 그룹, 정책 기업 등 다양한 조직 형태를 차용하면서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연구원들의 역할도 바뀌고 있다. 맥간 디렉터는 “오늘날 싱크탱크의 연구원은 학자와 언론인, 마케팅 담당자, 정책가 등 다양한 역할을 동시에 해내야만 한다”고 말했다.

물론 싱크탱크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만 있는 것은 아니다. 뉴욕에 본부를 둔 미디어 감시 단체 페어(FAIR)는 싱크탱크의 객관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 단체는 1996년부터 2008년까지 매년 미국 주요 언론 매체의 기사를 뒤져 ‘싱크탱크 언론 인용 순위’를 조사했다.

그 결과 싱크탱크 생태계의 심각한 불균형 현상이 드러났다. 페어의 스티브 랜달 선임연구원은 “거대 기업의 후원을 받는 보수·우익 성향의 싱크탱크는 쉽게 자금을 모으고 언론에도 더 자주 인용되는 반면 진보 성향의 싱크탱크는 위축된 모습을 보인다”고 말했다.

문제는 일부 싱크탱크의 주장이 언론을 통해 무비판적으로 증폭된다는 점이다. 랜달 연구원은 “기자들은 싱크탱크의 주장을 검증하는 노력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며 “일단 언론 매체에 실리면 일반인들은 이를 객관적인 사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관련이 없는 항목까지 포함해 미국의 복지 지출 규모를 부풀린 수치가 공개적인 토론의 논거로 버젓이 등장하는 일도 벌어진다. 랜달 연구원은 “단순히 인용 횟수만 볼 게 아니라 싱크탱크의 주장을 언론이 얼마나 정확하고 공정하게 인용했는지를 따져봐야 한다”고 말했다.

워싱턴·필라델피아·뉴욕(미국) =글·사진 장승규 기자 skjang@hankyung.comㅣ 후원=한국언롱진흥재단